소설리스트

〈 37화 〉여름의 도살자 (37/274)



〈 37화 〉여름의 도살자
"대전사님이 날 보셨어! 날 성전으로 데려가실 거야!"

…씨발.
나는 착잡한 눈으로 나를 선두로 뒤따르는 도적들과 용병들을 보았다.
그들은 도마뱀을 몰고 나를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 수는 이백을 넘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심지어 산적 두목은 팔이 잘렸음에도 오히려 그걸 자랑하고 있다.
 망할 다크 판타지에 팔 잃어버리는 건 살짝 긁힌 정도 밖에 안되나?

내 착잡한 표정을 보고 메이가 말을 걸었다.

"너 밖에서 뭐했어?"

존나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편의점 점장."
"거짓말."

뭐가 거짓말이야 이 씨발 쪼꼬만 짱깨가.
내가 눈을 부라리니까 녀석은 움츠러들긴 했지만 꿋꿋하게 말했다.


"사이비 교주 아니었어?"


…하, 씨발.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내 꼬라지를 보면 전혀 아니었다.
이거 젖탱이라도 때려줘야 닥치나.
음소거 버튼을 찾아 내가 몸을 일으키니, 메이는 내 움직임에 뒤로 물러났다.

"아냐."
"한국은 사이비가 많다는데, 너도…."

아 씨발 진짜.
존나 착잡했지만 팩트였다.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지 말고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란말이다.

"주석 놀리더니 꼴 좋다."

메이는 드물게 보이는개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팩트였다. 내가 지금 사이비 교주 짓을 하는 건 부인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착잡해지는기분으로도마뱀을 몰고 있는 마리암을 흘깃 보았다.


"아가리 해 씨발… 느그 주석도 좆병신이니까."
"응~ 사이비~"

우리는 그렇게 여유롭게 투닥댔는데, 우리의 뒤에서 따라오는 도적단이 내걸은 깃발만 4종류인 걸 감안하면 당연했다.
괴물이 나오든, 어떤 산적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든, 우리에게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무언가는  사막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나 있긴 한데,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나타나는 거 보면 신경  가치도 없었다.
이 사막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은 우리였으니.


산적 두목의 세력을 흡수하자마자, 마리암은 나에게 다른 도적단에게 찾아갈 것을 권유했고 우리는 바로 인근에 있는 도적단의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그 마을의 병사들은 내가 이끌고 온 막대한 병력을 보자 공격보다는 대화를 하기로 했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익숙하게 권능을 썼고.
 마을은 바로 나에게 합류했다.
심지어 그들은 도마뱀이 존나 많았다.
탈 것과 병력이 늘어나니,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렇게 마을의 병사들을 이끌고  번 더 반복.
결과가 이거였다. 나는 뭔지 알  없는 수신호로 손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는 미친 여름의 페티시단을 보았다.
이거 씨발 매드 맥스 아니냐?
다행히 화염을 내뿜는 기타를 연주하는 놈은 없었다.


차오르는 좆같음과 미묘한 고양감 사이에서 줄다리를 타던 나는, 내 옆에서 묵묵하게 있던 겨울의 처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나요?"
"…겨울님은 제가 사이비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주실래요…?"
"물론이예요. 저는 언제나 당신의 편이니까요."


역시  편은 겨울의 처녀 뿐이다.
사이비라는 말이 뭔지 알아들은 거 같진 않지만.
벅차오르는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자니, 도마뱀을 한창 몰고 있던 마리암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귀공, 거의 다 도착한 거 같아."


그녀의 말대로 자욱한 모래 먼지 너머로 그럴 듯한 오아시스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추 보기에도 마리암의 용병단이 기거하던 요새 따위랑은 비교도 안되게 거대했다.
오아시스 전체를 아우르는 목책과 많은 병사들, 심지어 민간인 역시 섞여있는지 내부에는 밭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존나 세력이 크네요."
"저들이 원래는 가장 강했거든."


확실히, 그럴 듯한 외양에 이따금씩 잘 훈련되고 잘 차려입은 병사 같은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요격할 생각인 듯 보였지만, 우리가 멈춰서기 시작하자 공격하려는 시도를 아예 거두었다.
다가오는 인파를 바라보던 나는 도마뱀에 내렸다. 후덥지근한 불쾌함이 장화를 파고들었다.

병사들은 전형적인 중세 기사에 가까웠는데, 갖추고있는 갑주가 찜통 더위에서는 존나 치명적으로보였는데 잘도 입고 있었다.
안 덥나?
땀을 흘리는지 알아볼 수가 없는 게, 투구를 착실히 뒤집어 써서 표정은 커녕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근데 뭐… 오아시스가 바로 옆에 있으니 괜찮을 거 같기도 했다. 더우면 알아서 갑옷 벗고 다이빙하던가 하겠지.
난 마리암과 메이, 마리암의 부하 몇 명을 끌고 오아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병사들은 나를 보고 가로막으려고 했으나, 이내 내 검날을 타고 흐르는 불꽃을 보고는 무기를 거뒀다.


신앙이 깊네.
광신도 새끼들.

사이비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말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이런 즉각적 광신은 선진국에서살아온 사람한테는 너무 생경했다.
착잡함을 숨기며 한참을 걸으니, 넓게쳐진 석벽에 세워진 망루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봐도 폐허처럼 보이는 석벽이었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람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폐망루에서 걸어나온 남자는 긴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날이 덥지도 않은지 망토는 털가죽이었다.
독특한 새끼네.


"호오."


그런데  털망토를 두른 녀석은 나를 보며 흥미로워 했다.
하기야, 어떤 새끼가 손에 불타는 검을 들고 있는데  화염이 팔을 스치든 뭘하든 해도 아픈 기색 하나 없으니.

"이제서야 여름의 대전사라니. 도살자께서도 야속하시지."

그 망토 속의 사람은 그다지 젊지 않았는데, 자글자글한 피부와는 별개로 화상 자국이 상당했다.
이게 성기사단의 기사단장인가?
나는 문득 마리암이 전해줬던 정보를 떠올렸다.

 때 어떤 왕국의 일각이었던 이들은 기사단째로 세계가 몰락함과 동시에  땅으로왔고, 그 이후로 계시에 따라 도시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었다.
내 눈이 슬쩍 돌아가자, 망토 속의 노년은 허허롭게 웃었다.

"어서오시죠, 여름의 대전사여. 병사들을 이끌고 오지 않은 건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말에 그는 여유롭게 웃었고, 나도 마주 웃으며 검을 검집에 밀어넣었다.


"헌데 이런 누추한 곳에 어째서 왔습니까? 우리는 충실하게 계시를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라.
뭔 계시 씨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는 한 가지 용건 때문에 왔습니다."


내 말에 그는 알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는데, 이제 보니 의수를 차고 있었다.
전투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몸, 화상자국, 의수.
이미 피폐할대로 피폐한 모습이었다.
이거… 게임에서처럼 갈아엎으러 왔으면 죄악감 개 지렸겠는데.
어찌됐든, 나는 하던대로 아가리를 열어 사이비스러운 말들을 꺼냈다.

"성전을 대비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세계는 몰락하고 있고, 우리가 설 땅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가올 영원한 투쟁에 몸을 던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대전사로서 받은 사명입니다."


노인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얼굴에 화상자국이 없음에도 왠지 일그러진  보였다.


"그 성전은 실존하는 겁니까? 저희는그런 계시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희 기사단 역사상 단 번도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모호한 계시를 내려주시지도 않았죠."

대충 넘어오진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름의 독실한 신자이기 이전에 기사들을 이끄는 기사단장이라면 단순히 무력만 강한 멍청이일리 없었다.
나는 팔이 잘렸지만 좋다고 자랑하던 산적을 떠올리고는 침울해졌다. 그래, 멍청이들만 있는 것보단 한 명 정도는 멀쩡한 게 좋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세계는 무너지고, 재앙은 속출하며, 인간들은 괴물로 변해갑니다. 게다가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두문불출 하시죠. 그게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성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결국 때가 오면 모든 신이 사라지고 하나의 신만이 남을 겁니다.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그렇게 된다면 세상을 영원한 투쟁의 땅으로 만드실 겁니다. 거기엔 죽음도 삶도 없습니다. 오직 투쟁 뿐이죠. 팔다리가 잘려도 영원히 싸울  있을 겁니다."

원래라면 동의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씨발 미쳤냐고 학을 떼야 정상인 내용이지.
하지만 여름의 광신도단은 그런 새끼들이 아니고, 나는 눈앞의 노인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거든.
마리암과 노인 모두.

죄다 미친새끼들이다. 내 감상과는 별개로 노인은 대답했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저희도 기쁘게 함께하겠습니다…만."

…뭔데 씨발.
넘어올  하더니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게 이 새끼가 이중인격이 아닌가 싶게 만든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노인이 웃으며 망토 속에서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은, 오아시스 인근에있는 거대한 폐허였다. 얼핏 봐도 입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노인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이 받은 또 하나의 계시와 그를 위한 준비물.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이 오아시스에 있었는지.

"…결론적으로는. 저기에 있는 폐도시에 전대 대전사이자타락한 전대 기사단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유물을 회수하는 것 역시 계시라서 지금은 합류를못하고, 내가 그걸 대신 해주면 합류해서 성전에 함께하시겠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씨이발.
노인공격 마렵네.


존나 쉽게 넘어가나 했는데 갑작스럽게 서브 퀘스트를 쥐어줘버리니 좆같아졌다.
하지만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애초에 도적을 통합해야 내가 여름의 도살자에게 가는 길을 뚫던가 말던가 하는 거니까.
나는 지금의 사이비 교주라는 자리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런데 들어가는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저희에게 자신의 인장을 찾아 도시의 봉인을 풀고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남은 반쪽의 위치는 알지만 남은 반쪽을 찾을 수 없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노인을 보자니 내 배낭 속에 있던 망할 놈의 쇠붙이가 떠올랐다.
그게 인장이라 이거지?
그 씨발놈은 여기까지 계산하고 저지른 걸까, 아니면 마구잡이로 내던지다 보니 내가 걸린 걸까.

나는 착잡한 마음과 함께 양해를 구하고는 배낭에서 그 쇠붙이를 꺼내들었다. 쇠붙이에 새겨진 여름의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깐 이거 원래 안 빛났는데?
인장을 알아본 기사단장이 말했다.

"오, 여름의 대전사께서는 준비성도 철저―"

부 우 우 우 우  우

그때 우리의 사이를 가르며, 거센 소리가 들려왔다.
뭔 부족 전쟁 게임을 하면 들어볼 수 있을 법한 나팔소리였는데, 내가 고개를 돌리니 진짜 나팔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평선, 굽이치는 파도와 같은 모래 위로 상당한 량의 도마뱀들이 도마뱀을 탄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빛나는 여름의 인장을 흘깃 보고는 도마뱀 중에 가장 크고 존나 뭔가 뒤틀려있는 놈을 보았는데, 그놈은 손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인장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빛이.

"어째서 화염 비늘족이 이곳에…!"

기사단장은 놀라며 자기의 수하들에게 방어를 준비하라고 외쳤고, 나는 마리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빠르게 튀어나갔다.

얘네 전에도 대화 끝날 쯤에 들이닥쳤던 거 같은데.
내가 애석한 데자뷰를 느끼고 있자니, 그 큼직한 놈은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빛나는 물건을 품에 집어넣었다.
 씨발놈, 노렸구나.

그 큼직한 놈이 손에  장창을 높이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