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여름의 도살자
"구에에에엑!"
"그걸로 봄의 체액은 나오지 않는다. 네가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지."
이 씨발놈이자기 일 아니라고 존나 막말하네.
하지만 이 새끼 말대로 내 입으로 뿜어져나온건 신물 밖에 없었다.
한 병이나 때려박았으니 개좆된 건데.
나는 내가 토해낸 자국을 피해 앉고는 여름의 도살자를 꼬라봤다.
"힘내라."
"야이 씨발…."
뭐가 힘내라야 씨발놈아.
하필이면 내가 아가리에 때려박았던 그 약이 봄의 순례자가 만들어낸 물약이랜다. 그것도 쳐먹은 새끼를 뒤틀리게 만드는 물약.
나는 봄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비록 PvP 고인물이지만, 4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봄의 순례자는, 가장 역겨운 보스 랭킹을 정한다면 두번째는 들어가는 놈이었다.
놈에게 형태는 없고, 본체도 없으니까.
녀석은 어떤 이유인진 모르지만, 자신의 영역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 기생하고 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좆뺑이를 치면서 그 새끼가 들어갔을 법한 모든 생명체를 때려죽여야 하는데….
문제는 거기에는 동식물, 인간의 구분이 없다는거다.
무수하게 몰려드는 짐승과 괴물, 벌레와 인간들, 그걸 전부 잡아죽이면 보스전은 끝난다.
게임에서도 짜증나기 짝이 없는 보스인데, 그걸 이 망할 다크 판타지 속에서 잡으라고?
개좆같았다.
그래서 나는 여름의 도살자에게 고개를 치켜들고 외쳤다.
정확히는외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지럼증이 내 머리를 뒤흔들더니, 다시 나를 부족장의 시체 앞으로 뱉어냈으니까.
씨발.
"대전사공! 괜찮아?! 갑자기 사라졌었는데!"
내게 달려오는 마리암이나, 짱깨, 심각한 표정의 기사단장을 보면서 나는 손을 대충 흔들었다.
진짜 언젠가는 다 데리고 개종한다.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나 도구낭에서 인장을 꺼내니, 쪼개져 있었을 인장은 다시 붙어 완전한 원통형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기쁩니다. 여름의 도살자께서 제게다시 한 번 계시를 내리셨으니."
그 말에 걱정을 한 아름 품고 달려오던 마리암이나 산적들의 얼굴이 밝게 개었다.
이 새끼들 진짜 충성심 오지네.
"어, 어떤 계시였나?"
마리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물어왔고, 열렬한 태도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거짓된 대전사를 해치우고 인장을 되찾았으니, 도시에서 유물을 되찾고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저를 따라 인간의 마지막 도시에서 포교에 힘쓰라고 하시더군요."
물론 구라지만, 내 말에 그들은 흥미로운 기색을 띄었다.
인간의 국가나 도시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라고 알고있을 거라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그 도시라는 건…?"
"이 사막을 가로질러 산맥을 끼고 숲을벗어나면 나오는 도시입니다. 고대의 도시라고 합니다."
그들은 오랜만에 내리는 계시에 감격했고, 나에게 몰려들어 나를 추앙했다.
또 투구를 두드리고, 방패를 두드리고, 무기끼리 부딪히고 하는 소리와 대전사! 대전사! 하는 구호가 썩 마음에 들었다.
"사이비."
"쉿."
메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그들의 추앙을 받았다.
*
가짜 계시를 전한 건 좋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예를 들자면 저 폐도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좆도 없다는 점.
옛 대전사이자 여름의 투사이며 기사단장이었던 괴물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것.
그리고 봄이 나한테 뭔 개수작을 부렸는데 막상 뭔 짓거리를 하진 않고 인장을 회수하려고만 했다는 것.
내 추측에 메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왜 이렇게 신한테 이쁨 받아?난 받은 거 하나두 없는데."
"잘생겨서."
"…."
씨발 그런 표정은 좀 상처받는데.
오랜만에 나와 메이는 평상복을 입은 채, 기사단에서 내어준 텐트 안에 있었다.
겨울의 처녀는 식사를 가져온다고 나가버렸고, 둘만 남은 우리는 오랜만에 플레이어다운 대화를 할수 있었다.
"암튼 이 다음엔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고민했다.
그러게.
여름의 도살자를 잡으려고는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그리 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까 녀석의 공간으로 끌려들어가서도 봤던 거지만, 녀석의 주먹은 내지르는 것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그 근력으로 휘두르는 도끼도 그럴테고.
맞서려면 거인의 힘 정도 밖에없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강력한 화염은 나를 손쉽게 구워버릴 수 있을 거다.
그렇다고 저 충직한 사이비 군단을 쓰는 것도 무리인 게, 녀석들은 아무리 투쟁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신과 싸울 정도로 나에게 빠져있는 건 아니다.
내가 빌리고 있는 여름의 대전사란 칭호와 여름의 도살자라는 신의 이름을 믿고 있는 거지.
"폐도시에 가야지."
"왜? 기사단은 널 따른다고 했잖아."
"그거랑 별개야."
기사단장은 대략적으로 전 기사단장이자 여름의 대전사였던 이에 대해서 알려줬다.
괴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가 가지고 있는 유물은 화염에 대한 아주 높은 내성을 가진갑주라고.
물론 드래곤뼈 흉갑으로 바꾼지 얼마 안되어서 아쉽긴 하지만….
메이는 내 설명을 듣고는 내 다리에 머리를 뉘였다. 오아시스에서 멱을 감고와서 그런지 찰랑거리는 긴 곱슬머리가 내 다리에 담요처럼 덮어졌다.
"나도 같이 가는 거지?"
"왜, 가기 싫어서?"
"아니, 그냥."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미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냥… 나는 네 동료니까.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도 걸어줬는데,내가 그정도도못하면 안되니까…."
목숨을 걸어줬다니 무슨 소리래.
메이는 내 반응에 얼굴이 좀 달아오르더니, 그 조막만한 검지로 내 볼을 꾹 눌렀다.
"됐어, 바보야."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녀석도 굳이 말해주지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겨울의 처녀가 가져온스튜와 빵으로 식사를 마쳤고, 간단히 갑옷이나 무장 등을 점검하며 하루를 더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내게 딱 달라붙은 메이를 겨우 떼어내고, 칭얼대는 짱깨한테 내가 머리에 대고 잤던 나무토막을 안겨주었다. 녀석은 그 나무토막을 꼭 껴안고 웅얼댔다.
밖으로 나서니 아직도 작업이 한창이었다.
나무 토막을 나르고, 자르고 덧대거나 하면서 방벽의 내구성 자체를 올리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스튜 냄비가얹혀있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아직 쌀쌀한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는 보초병들도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더니 밝은 표정으로 이상한 손동작을 해보였다.
뭐야, 다크 판타지 뻐큐냐?
"일찍 일어났군."
그런 내게 다가온 마리암은 그 손동작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귀공이 검에 화염을 두를 때 사용하던 손동작을 따라한 거야. 이미 우리 교단에서는 하나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있는 중이지."
교단?
씨발 뭔 교단.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가 그냥 있었던 건 아니야. 대전사께서 행차하신다는데 아랫 것들이 철저히 준비해야지. 이미 지휘 체계와 계급은 확실히 나누었어. 각자 공로와 신앙심, 전투 능력에 따라서 말이지."
어… 그런 일이 있었어?
그녀에게 감사를 전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오히려 내 팔뚝을 붙잡고는 요염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시간이 좀 남나? 내 텐트는 혼자 써서 조금 넓은데 말야. 또 대접을 해주고 싶기도 하고."
오 씨발.
내가 새벽에 겨울의 처녀님께 쥐어짜여진 것만 아니면 흔쾌히 동의했겠는데.
확실히 요염하긴 했지만,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내 허리는 이미 충분히 혹사당했으니.
"애석하게도 오늘은 시간이 안될 것 같군요. 준비가 끝나는대로 바로 폐도시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녀는 내 거절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가 도시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예, 빠르게 해치워야죠."
"그렇게 깊은 신앙을 갖고 있다니… 물론 도살자께서 명하셨고 그걸 행하고 싶어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아줘."
그녀는 내 말을 형편 좋게 해석하고는 빛나는 눈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그래 뭐.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나는 상큼하게 웃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단장께 도시로 갈테니 병사를 붙여달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준비할 것도 있으니 준비해달라고 해주시고."
내가 등에 짊어진 배낭을 고쳐메자, 그녀는 그 모습을 흘깃 보더니 배낭을 넘겨받았다.
"내가 직접 해줄게."
아, 그럼 좋지.
나보다는 경험 많은 용병이 훨씬 준비를 잘할테고.
그녀는내 배낭을 받아들더니 다가왔다. 설마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쪽.
그녀는 건강한 혈색이 도는 입술을 내 입술에 겹쳐 소리를 내고는 다시 떨어졌다.
마리암의 구릿빛 얼굴이 미묘하게 붉었다.
오, 좀 꼴리네.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는 제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빠르게 내게서 벗어났다.
*
나는 두둑해진 배낭과 도구낭을 한 번 손으로 두드리고는 뒤를 일별했다.
기사단장은 나름 바빠보여서 그 병사들이 마중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사단장 그 본인과 마리암, 산적 두목을 비롯한 각 세력의 수장들이 직접나를 마중하러 나올 줄은 몰랐다.
그들은 나를 보며 기도를 올렸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대전사님."
그들 중 주교로 뽑힌 기사단장이 내게 대표로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광신도들 사이에서 한 명이 빠져나와 다가왔다.
"저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나처럼 승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곱게 모은 창백한 손을 보자 새벽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좀 어수선했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사브작댈 뿐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물론이죠. 겨울님이 절 그리워하기도 전에 돌아오겠습―"
그래서 웃으며 말하던 나는, 겨울의 처녀가 베일을 걷어올리고 내게 입맞춰올 때도 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나를 꼬운 눈으로 보던 메이가 놀라 자기 입을 가렸다.
"…독점욕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넵…."
마리암과 키스한 걸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걸 알아챈 것도 존나 대단하지만, 이렇게 대응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투구로 가렸고, 그녀는 제 입가를 우아하게 가리며 웃고는 베일을 도로 내렸다.
"다녀올게요."
그녀는 고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도시의 정문을 향해 걸었다.
내 옆에서 메이가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너 언니랑 뭐했어?"
"비밀. 애들은 몰라도 돼."
"나 애 아닌데…."
입술을 괜히 비죽 내밀길래, 나는 그녀의 입술을 검지로 톡 눌러 집어넣고는 도구낭에서 인장을 꺼내 쥐었다.
거대한 대문에는 왠지 얄팍한 홈이 하나 새겨져 있었고, 세월의 흔적은 녹록했으나 여전히 건재했다.
나는 그 문을 바라보면서 지저의 늪지에서 거대한 수레바퀴를 보았을 때와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경외감. 이런 유적은 역시 인간에게 경외감을 선사하는 모양이었다. 한참간이나 멀거니 보고 있자니, 메이가 내 옆구리를 두드렸다.
"구경은 나중에 하구, 빨리 들어가자. 나 더워."
안은 안 더울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메이가 더 징징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장을 문에 가져다댔다.
기이이이이
쿠구궁
인장은 가늘게 떨리더니, 내 손에서 강하게 빠져나와 날아갔다.
그 비행은 힘을 동반했고, 이내 문의 홈을 격하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문에 새겨진 균열들이 일제히 빛났다.
붉고, 희고, 노란색으로 빛나던 균열은 이제 문의 한 가운데, 안으로 이어지는 틈까지 빛을 뿌렸다.
그리고 그 빛은 마치 떠오르는 태양처럼 색을 뿜어내며 열렸다. 안에서 훅하고 열을 띈 바람이 불어왔다.
"…더워."
"그러게."
좆간지나긴 했지만, 씨발 존나 후덥지근한 바람이 안에서 밖으로 불어온 탓에 우리의 불쾌지수는 순식간에 천장을 뚫었다.
우리는 툴툴대며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