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여름의 도살자
숨이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기세 좋게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아까 얻어맞은 곳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치유 물약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오는 건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투구를 고쳐쓰고, 장검을 찢어진 장갑으로 내 손목에 묶었다.
키 에 에 에 에 에 에
멀거니 포효가 들려왔다. 소름끼치는, 등골을 아리게 하는 포효였다.
"해보자고."
두렵지 않다던가, 이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던가.
그런 멋진 생각이 머릿 속에서 솟아났지만 내 진심은 그럴 때마다 그걸 정면으로 부정했다.
적이랍시고 나온 새끼가 좆같이 크니 별로 희망찬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장검을 고쳐들었고, 그 소리에 녀석이 달려들었다.
무슨 전차가 제트 엔진 달고 달려오는 것만 같은 좆같은 풍경이었다.
꾸드득
콰카가가가가가가가!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이 새끼가 스치는 바닥에서 미친 듯이 튀어오르는 먼지를 보자면 맞부딪혔을 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거인의 힘이 켜졌다고 한들, 이전에 몇 번 부딪혔을 때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거인의 힘이 실린 공격이니만큼 아주 데미지가 없진않겠지만, 치고받아서 손해보는 건 나였다.
작전대로 가려면 피해야 한다.
"흡!"
콰아아아앙!
나는, 내 시야를 빨갛게 채우며 달려드는 녀석의 몸통을 옆으로 뛰어 피했다.
허공에 뜬 나는 거센 바람이 투구에 부딪히는 걸 느끼면서 바닥을 굴렀다.
낙법은 여전히 잘 하지 못했다.
등이 아려왔지만, 초인적인 힘이 몸을 내달리는 통에 겨우 버틸 수 있었다. 한창 구르던 걸 멈추고,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녀석의 몸뚱이는 크다. 그만큼 다시 돌격을 하려면 준비동작이 필요할 거다.
그래서 그 잠깐의 시간을 유의미하게 쓰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쿠 우 우 웅!
녹록치 않았다. 이 씹창놈이 몸을 비틀 때마다 일어나는 바람에 몸이 끌려갈 정도로, 녀석의 크기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씨발, 이렇게 괴물이 되는 방법이있다면 나도 좀 알고 싶은데.
나는 다시 몸을 비틀어올리는 씹새끼를 보면서 덤프 트럭이 생명체라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추 크기도 비슷하네.
씨발.
이번에도 맞으면 즉사다.
나는 용을 쓰며 장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장검이 회백색 잔상을 남기며 날아들고, 그 궤적에 거대한 붉은색이 겹쳤다. 불티가 어지럽게 튀며 눈앞을 밝혔다.
까아아아앙!
손아귀가 찢겨져나가는 느낌이 들고는 녀석이 내 위를 스쳐지나가 벽에 꽂혔다.
도시의 유적이었던 것이 거세게 울렸다.
뭔 씨발 석재 건물을 종처럼 울리게 만드냐.
"씨…발."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답도 없는 보스다.
아가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각을 안 내준다.
대가리가 장식은 아닌가 보다. 역시 전직 기사단장이야.
그럼 억지로라도 비집고 들어가야지.
한 끼 식사 되기 딱 좋은 생각이지만 그 외의 승산은 없어보였다.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일어났다.
이 새끼는 나한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라도 그러겠지만, 이 새끼는 자신의 무기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면 씨발 이렇게 계속 몸뚱아리를내던질리가 없지.
튼튼하고, 강력하고, 저 큰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데 지치는 기색도 없었다.
벌레들은 다 지구력이 존나 오지기라도―
카가가가가각!
내 상념을 끼어드는 돌진에 반사적으로 장검을 뻗었고, 장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새끼의 징그러운 비늘이 칼날을 긁으면서 무슨 용접하는 것처럼 불똥이 튀었고, 나는 무릎이 점점 주저앉는 게 느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억지로 이를 악물고 밀어내니 튕겨져 나가긴 했지만, 손이 덜컥거리는 게 영 좋지 못했다.
딱 봐도손가락 뼈 정도는 가볍게 나간 느낌이었다.
다행히 별로 아프지는 않은 게, 아드레날린이라도 솟는 모양이었다.
그때 바람 소리가 또, 또 들렸다.
"큭."
달려드는가 싶어서 칼을 휘두르니 녀석은 그 자리에 없었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혀를 차고는 호흡을 뱉기도 전에 바닥을 박찼다.
방금 전까지 내가 딛고 있던 자리에 거체가 내려앉아, 어마어마한 양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쾅!!!
씨이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난 비틀거리다 땅을 짚고는 정면을 보았다.
지렁이 새끼는 내 자세가 흐트러지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괴물새끼가 그 기다란 몸통을 뒤로 물리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가오는 거대한 입에는 으레 이딴 지렁이형 괴물이 그러하듯, 촉수 수십개와 수천개의 이빨이 믹서기처럼 돌아가고있었다.
그냥 맞으면 죽는다. 점프를 늦어도 죽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용기가 필요했다. 뱃심으로 소리를 질렀다.
"씨이바아아아아알!"
뛰어야 한다. 상대할 방법은 이정도 뿐이다. 나는 마주 달려갔고, 씹새가 아가리를 닫으려는 순간 몸을 앞으로 띄우며 다리를 박찼다.
거인의 힘으로 증폭된 각력이 나를 높이 띄워올렸고, 나는 다리가 닿을까 앞으로 발을 뻗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이번 점프는 정확히 나를 아가리로 때려박았고, 나는 내 얼굴로 다가오는 거대한 이빨을 칼로 두들겨 내 몸을 갈리지 않도록 튕겨냈다.
나는 녀석의 혀 엇비슷한 거에 부딪히고 굴렀다.
치이이익
씨발 소화액이 여기부터?
나는 드래곤뼈 흉갑이 등부터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녀석이 몸을 일으켰는지, 중력이 나를 그대로 미끄럼틀에 태운 듯 위장 속으로 쳐넣었다.
그래도 나는 정신을 놓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위장의 폭만 하더라도 10m 남짓. 하지만 10m라면 충분히 내 칼이 닿는다.
정확히는, 그레이톰의 심판이라면 닿는다. 나는 전력으로 허리를 틀어 칼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화염과 뒤섞인 회색의 마력이 검기처럼 쏘아져 지렁이 새끼의 위장을 태웠다.
"커헉…!"
치이이이익
심지어 바닥을 딛은 장화, 흉갑, 완갑, 각반이 타올랐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에 휘둘리면서도 장검을 정신 없이 휘몰아쳤다.
"으아아아아!!"
칼날은 내 손에 아직도 단단히 묶여있었다. 등에는 아직 폭군의 검이 있다. 산성액이 차오르기 전에, 나는 이길 수 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절망감이 나를 덮쳐올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촤악!
그래서 나는 달렸다. 미끈거리는 바닥을 억지로 박찼고, 발바닥을 산이 녹이는 감각에 입술을 짓씹으면서 달렸다.
"크으윽…!"
발가락이 없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도 멈추지 못했고, 억지로 발을 앞으로 딛으면서 마구잡이로 장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이익
새어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튀어오른 위액이 내 손목을 녹여서 체인메일에 손목이 늘러붙고 있었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무시했다.
카가가각!
주변이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바닥에 고인 위산은 나를 덮치려 뛰어올랐다.
나는 그 산성의 파도를 피하기 위해 다시 안으로 달려나갔다.
그렇게 달리고, 휘두르고, 날아가고, 피를 토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푸슈욱
장검에서 불꽃이 꺼지고, 나는 다시 폭군의 검을 등에서꺼내들었다.
"좀 뒈져 씹새끼야!!!"
한손으로 들어올린 팔에서어마어마한 탈력감과 함께 근육의 비명이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단단히 붙잡은 왼손에서 화염이 피어올라 폭군의 검을 뒤덮었다.
그리고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내리찍힌 자리에서 화염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고, 나는 그 화염이 점차 기울어지는 걸 보았다.
아니.
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내가 뛰어들어온 방향으로 튕겨져 나면서도 폭군의 검을 단단히 쥐었다. 날아가는 감각은 이미 익숙해지고 있었다.
크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커헉!"
아가리를 지나, 마침내 바닥에 내리꽂힌 나는 저려오는 등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갑옷이 전부 녹아내렸다. 피부도 조금.
체인메일은 거의 녹아 흘러내렸다. 나는 그 감각에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녀석이 살아있었다.
"징한 새끼…."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괴로워하고는 있지만, 아직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 결국 남은 건 한 가지였다.
녀석의 본체. 지렁이의 대가리에 매달린 인간형의 몸뚱아리.
그게 약점이겠지.
하.
나는 웃었다.
마침 잘됐다. 녀석은 큰 공격과 정확한 공격을 내가 맞받아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다지 잘 돌아가진 않는 벌레의 대가리로 열심히 생각해볼 거다.
아마 그러면 한 가지 밖에 안 나올테지.
점공격.
나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바닥에 꽂고, 거추장스러운 검집을 풀어 바닥에 버려뒀다.
뒤이어 뜯어낸 체인메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가죽 갑옷은 바닥에 닿자마자 바스라졌다.
삽시간에 천옷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오른손으로 고쳐쥔 폭군의 검에 화염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이번에 진다면 갑옷은 의미가 없고,이긴다면 저 갑옷은 내 거다.
완전히 파손된 갑주에게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폭군의 검을 얼굴 언저리까지 가져와 그 칼자루를 마주 보고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면에서 소리쳤다.
화염 부여.
푸화아아아악!
단단히 쥔 폭군의 검에서 불이 넘실댔다.
한참 몸부림치던 지렁이가 크게 몸을 젖혔다.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살의는 끔찍하도록 선명했다.
좆까, 씨발.
나는 그 살의에맞서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내게 가장 잘 맞는 자세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게 가장 익숙한 자세를 잡았다. 게임에서 항상 보던, 해방자의 자세.
칼을 높이 들고, 몸을 낮추고, 어깨 앞에 칼자루 끄트머리를 댄다.
슈우우우우
콰아아아아아아아!
그러자 어마어마한 힘이 파괴를동반하며 내게 쏘아졌다.
20m를 조금 넘는 듯한 육중한 몸뚱아리를 운동시켜 나에게 돌진, 그 최첨단에는 죽음이 있었다.
크 아 아 아 아 아!
그 끝에달린 인간이 나에게 기병창을 겨눈 채로 울부짖었다. 녀석의 창은 나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나는 그 창이 심장이 꽂히기 전에 칼을 휘두를 수 있을지, 확실하게 일격으로 끝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저 존나 큰 지렁이가 나와 그 뒤에 연쇄추돌 사고를 내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휘두르려고 했다. 누가 튀어나오지만 않았다면.
그건 메이였다. 메이는 방패를 쥐고 뛰어나와, 몸을 틀었다.
챠카아앙!
방패가 펼쳐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리고, 내게 돌격하던 지렁이의 옆면을 강타했다.
비록 방패라고는 하지만, 저 펼쳐지는 힘은 만만치 않다. 드래곤의 턱을 튕겨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내게 창을 내지르며 돌격하던 전 기사단장의 대가리가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전신에 검붉은 갑주를 두른 녀석이, 나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녀석의 창이 그 약간의 충격에 휘말려 궤도가 틀어지고 있었다. 그 궤적은 점차비틀어져 밖으로 빠져나왔고, 나는 오히려 앞으로 내딛으며 웃었다.
"다음부터는…."
콰드드득!
"뚝배기를 써 병신아!!!"
콰직!
녀석의 머리가 내가 휘두른폭군의 검에 산산히 조각났고, 녀석의 창이 내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내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콰아아아앙!
내게 겨우 1m, 지척에서 스쳐지나간 지렁이가 그대로 벽에 꼬라박혔다.
원형 경기장의 관중석처럼 경사가 진 플랫폼을 때려부수며 놈은 나아갔고, 단단한 기둥에 부딪히고는 몸을 치켜올렸다.
나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채로 그걸 바라봤다.
쿠 우 우 우 우 웅!
이내 그 몸이 내려앉고,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벌레 새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