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여름의 도살자 (44/274)



〈 44화 〉여름의 도살자

"괜찮은 거 확실해?"

메이는 드물게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메이에게 웃어주고는 혁대를 조이고, 그 혁대에 검집을 끼웠다.


"어. 괜찮아."

나는 메이의 손을 빌려 대충 갑주를 입고 있었다.
천으로 된, 갬비슨이라고 했던가? 그 위로 여름의 유물을 끼워입었다.
사슬 갑주도 둘렀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방금 전 전투에서 완전히 박살나서 더는 입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녹아내린 사슬이 닿았던 자리가 따끔거렸다. 그 위에 물약까지 뿌렸는데.

유물은 판금 갑주였다.
검은색 베이스에 은은하게 도는 붉은색이 특징적이었다. 화염 내성을 부여하는 갑주라고 했다.
메이는 내 흉갑을 조여주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색도 안 좋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는데…."

아, 내가 괜찮다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확실히 나도 좀 힘들었다.
서있는 것조차 빡세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거인의 힘이 꺼진 여파도 있겠지만.
이유는 모르겠는데 피로감이 심각했다. 아마 산성으로지져져서 고통이 존나 몰려온 탓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지만.
그게 나를 멈출 수는 없었다. 적어도 쉴 거면 돌아가서 쉬어야지.
나는 메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내 투구를 품에 끼우고 있던 메이는 그 손을 보고서는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그 큼직한 눈동자가 촉촉했다.

"그럼 치료약이라도 줘봐."
"아, 응."


그녀의 도구낭에서 끌어내진 물약은, 우리가 가진 마지막 물약이자 마지막 치료약이었다.
물론 지렁이 새끼도 해치웠으니 구태여 물약을 마실 필요는 없겠지만… 돌아가서 또 기절하고 싶진 않으니까.
적어도 '무수한 악수의 요청' 정도는 받고서  생각이었다.
즈그들 수장이라는 대전사가 약한 모습 보여서 좋을 것도 없고.


나는 물약 뚜껑을 열고는 심호흡 한 번을 뱉어냈다.
그리고 물약을 아가리에 때려박았다.


"윽… 크윽…."

다크 판타지 알보칠, 존나 아프네….
아가리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10분의 1로 줄어든 듯한 고통이 괜히 혀와 머리를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상처는 아물고,  탓인지 고통 역시 옅어져 생각보다 걸을만 했다.
나는 비어버린 병을 대충 버리고는 메이에게 고갯짓했다. 눈가를 문지르던 메이가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나를 일으켜줬다.
아, 혼자서 일어날 수 있는데.
그래도 굳이 뭐라고 하진 않았다.

"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들어간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생각해봐도 반나절은 지났다.
밖에서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문으로 다가갔고, 성인 7명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사이즈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

하지만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둑한 사막의 하늘 아래로 존나 으슬으슬한 추위가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고, 면갑을 모래가 두드렸다. 그리고 뻗은 손에 여름의 인장이 툭 떨어졌다.
도구낭에 도로 인장을 집어넣으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메이가 내 말에 호응했다.
메이는 아예 앞으로 나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모닥불도 괜히 발로 차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 왜 아무도 없지?"


나무토막 개가 들어있는 모닥불은 피워진 적도 없는지 재가  웅큼도 없었고, 주변의 모래 위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돌아간 수준인데.
뭐지? 우리 배웅만 하고 바로 들어간 건가?
물론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요새를 세우는 거라면 바쁠테니까.

그래도  섭섭했다. 그래서 괜히 멋쩍게 투구를 긁적였다.
나오자마자 '무수한 악수의 요청'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 모닥불을 뒤적이다가, 문득 메이가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고개를 돌렸다.
한창 호들갑을 떠느라 뭔가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시끄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무슨 충격적인 걸 본 것처럼 조용했다.


"저거…."


응?
메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짱깨는 어딘가를 하염 없이, 얼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메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내  가지 기이한 것을  수 있었다.
높게 솟은 검은 연기가 오아시스 방향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뚜렷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평범한 연기가 아니라는의미였다.
문득 기사단장의 말이 떠올랐다.


'검은 연막을 높게 피워둔다면, 무슨 일이 있다는 거니 조심하십시오.'


 좋은 신호였다.
나는 메이를 재촉해 오아시스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 내 몸은 점점 피로해졌다.

*

오아시스로 진입하자 보인 건, 자신의 뿌리를 다리로 삼은 듯한 기괴한 몬스터였다.
그런 몬스터가 걸어나왔고 갑주를 두른 병사가 그 나무에게 씹어먹히고 있었다.
구라가 아니다.
진짜 씨발 씹어먹고 있었다.
 어디서 시체를 비료로 뿌린다던가 하는 썰을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거랑은 존나 달랐다.


나무가,  쳐먹지 않아야 할 식물이 인간을 존나 맛있게 발라먹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딱 봐도 치타처럼 보이는 새끼가 그런 나무의 뒤에서 인간의 다리를 두 개, 욕심도 많게 아가리에 물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다리 두 개를 잃어버리고 몸통도 잃은 인간의 머리가, 기괴한 검은 핏줄에 뒤덮인 채로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나한테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삼류 좀비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제목을 정해보자면 '맨 vs 치타, 트리, 좀비' 정도일까.

나는 그 셋의 공통점으로 검은 핏줄을 찾을  있었다.
전신에 돋아난, 마치 고목의 뿌리나 촉수와 같은 모양새의 검은 핏줄.
그래서 그  하나가 나한테 고개를 돌렸을 때, 반사적으로 화염을 두른 그레이톰의 심판을 휘둘렀다.

콰가가곽!
화르르륵


단칼에 베어진 나무와 치타가 불타오르며 쓰러졌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떤 신을 떠올렸다.
4신 중 하나, 씹극혐 보스 투톱으로 뽑히는 새끼.
봄의 순례자.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떤 억하심정이 있는지, 혹은 여기 여름의 신도들한테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분명히 봄의 소행이었다.
씹창놈. 생긴대로 노는구만?


"메이, 화염석 써. 이 새, 끼들 화염 잘 먹힌다."


이미 투구를 뒤집어쓰고 적을 물끄러미 보던 메이는, 대답하지 않고 칼집에 적조를 쑥 밀어넣었다가 빼냈다.
적조의 붉은 칼날이 선연히 빛났다.
우리는 그렇게 나아갔다.
나는 새로 얻은 갑주를 믿고 화염을 붕붕 휘둘러댔고, 메이는 내가 그러다 균형을 잃거나 비틀거리면 나를 보조했다.
내 등을 받치고 밀어준 메이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지금도 또 넘어지려고…."
"괜, 찮아. 다른 사람들,  위험하잖냐."


걱정해주는 건 기쁜데, 씨발 지금  싸우면 뭐 개먹이 밖에  되겠냐.
나는 내게 달려드는 개를 내리찍고는 숨을 골랐다. 씨발. 진짜 안 좋긴 하다. 숨을 고르느라 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점점 숨이 가빠오는 게, 무슨 100m 전력질주라도 한 것 같았다.

좀 더 안 건강한 의미에서 숨쉬기 힘들었지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체력은 이미 검 몇 번 휘두르면 비틀거리는 수준이 되어있었고, 오히려 메이는 적을 처치하기 보다는 나를 보조하는데 집중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금방 보였다.
많은 수의 적한테 둘러싸인 마리암, 기사단장, 외팔 빡빡이를 비롯한 이 망할놈의 사이비 교단 중책들은 내가 휘두르는칼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꽃을 보고는 안색이 밝아졌다.
 중 산적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는 다가오던 놈에게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대전사께서 오셨다! 이거 봐, 난 해낼 줄 알았다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포위섬멸진 제일 후미에 있던 놈에게 강하게 휘둘렀다.


콱!

"크윽!"

동작이 너무 컸나.  공격을 피해낸 짐승새끼가 갑주 위로 이빨 자국을 남기길래, 칼날을 역수로 쥐어 내리찍었다.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짐승이 타올랐다.

몸이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는다. 동작을 하려고 해도 묘하게 굼떴다.
다행히 갑주 때문에 상처가 더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비틀거리면 포위를 풀어낼 수가 없다.


"후욱, 후우."

도대체 씨발, 왜 이러지?
마치 뱃속에서 뭔가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거센 압감을 느꼈고, 가슴팍은 불타는 듯이 뜨거웠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가오던 짐승에게 칼날을 휘둘렀다.
화염은 녀석들에게 확실히 잘 먹히는지, 스쳤을 뿐인 상처임에도 삽시간에 타올라 사라졌다.


"대, 대전사공께서 싸우고 계신다! 전원 돌격! 놈들의 포위를 풀어라!"

생각했던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다 처리했어야 할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모습에 숨을 억지로 토해내며 횡으로 휘둘렀다.


퍼버버벅!


네 마리의 괴물들이 화염에 꿰뚫려 쓰러졌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역시 안되겠어, 나한테 맡기고 쉬고 있어. 응?  지금 상태 너무 안 좋아."


제발, 이라며 애원하는 메이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씨발 나 아니면 누가 한다고.

 송장새끼들은 죽인 놈을 동포로 만들어버리는데, 원거리에서도 화염을  수 있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피해는 커진다.
지금도 포위망을 뚫어내려 각 도적단의 수장들이 불필요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내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한 마디 꺼내는 게 고역이었다.
마치 언어가 토사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에 마리암을 비롯한 일행들은 억지로 포위망을 뚫어냈다.
 측근이나 부하 중에 죽은 사람도 나온 모양이었다.
씨발, 움직여야 하는데.

겨우 헐떡이는 나를 보고는 마리암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부축했다.
나는 나를 부축하는 마리암의 어깨를 쥐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내 손아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헐떡이면서 겨우 마리암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귀공이 도시에 들어가고 나서 전령이 달려왔어. 적이 습격했다고. 급히 가보니 모래폭풍 너머에서 이놈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근데 귀공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거 같은데. 검도 제대로 못 쥐잖아!"

어?
진짜로, 내가 떨어트린 검을 기사단장이 집어들고는 안 그래도 자글자글한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나를 꼬라봤다.

"저는, 괜찮."


쿨럭 쿨럭

나는 터져나오는 기침을 억누르지 못했다.
기침을 막아낸 왼손에는 뭔가 검은 액체가 묻어있었다.


씹, 분명 치료약은 먹었는데.
존나 쓰고 아가리가 아프지만 억지로 뱃속으로 밀어넣었는데?


그보다 이건  씨발 뭐야.
나는 검은 액체를 물끄러미 보다가 털어냈고, 손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유적… 비어있, 습니다. 거기로 가, 서 이걸…."


도구낭을 떨리는 손으로 열어 인장을 내밀자, 마리암이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들긴 했지만 나를 여전히 걱정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동정하지마, 씨발. 아직 싸울 수 있어.
하지만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듣겠네, 귀공. 그러니 지금은…."

아냐, 닥치고. 내가 길을 열테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부축에서 벗어났다. 기사단장이 집어든 장검을 쥐고는, 헐떡이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길, 을."


아, 씨발 왜 세상이 도냐.
그들을 돌아보려 했던 회전은,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뱃속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나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나는 어딘가로 소리치는 마리암이나 일행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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