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여름의 도살자
…낯선 하늘이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지나치게 낯선 풍경이었다.
너무 어둡고 거대해,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어디 잘못된 곳에 있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두운 게 아니라, 사방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공간은, 맥동하며 덜컥였다.
"우왁!"
내 발밑에서 치솟는 움직임에 내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니, 그 움직임은 이내 다시 멎었다.
뿌리와도 같은 모양새의 그건, 자세히 보니 혈관이었다.
검게 물든 혈관이 균열처럼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이게 무슨…."
그 혈관이 벽을 이루고, 천장을 만들고, 바닥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존나 큰 심장 속에 들어와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이게 큰심장형 구조물이든 아니면 진짜 심장이든.
일단 나갈 길을 찾는 게 먼저다. 나는 바쁘게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문득 전에 없던 구조물을 찾아냈다.
그건 혈관이었다.
존나 크고, 검은 혈관.
그건 혈관이라기엔 너무 컸다.
그게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갈라지고 있었다.
"씨발…!"
혈관 크기와 이 공간의 크기를 감안하면 쏟아질 혈액은 홍수에 가까울 거다. 잘못하면 익사할 수도 있고.
아래에 구멍을 뚫으면 시간을 좀 벌겠지 싶어서 허리춤을 봤으나 검은 없었다.
것보다는 옷도 없었다.
뭐예요, 내 옷 돌려줘요.
내 쓸데없는 상념이 지날 동안, 그 혈관은 완전히 갈라지더니, 피의 홍수를―
쏟아내지 않았다.
나온 건 그저 피 한 방울이었다.
검고, 불길한 느낌이 드는 피 한 방울.
그 피는 역류하듯 하늘을 향해 쏘아지더니, 그대로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분명 검은색이라 검은 배경에 섞여 잘 안 보여야 할테지만, 그 추락은 선명함을 동반했다. 나는 괜히 물러섰다.
퍼억!
바닥에 부딪힌 피에서는 마치 고깃덩이 같은 소리가 났다.
그 피는 뭉그러지고, 끈적한 형태를 자랑이라도 하듯 뒤틀리고 일그러졌다.
그 형상은 점차 액체가 아닌 고체가 되어갔고, 그 고체는 이내 아무리 보더라도 익숙해질 수 없고 좆같이 생긴 무언가로 변했다.
검은색 촉수가 쉴새 없이 꿈틀거리는데, 그 촉수로 로브나 망토와 같은 것을 만든 것처럼 전신에 두른 기괴한 형상이었다.
"…이런 씹."
딱 봐도 존나 세보인다.
근데 이쪽은 무장이라고는 아랫도리에서 덜렁거리는 거 밖에 없다.
이게 씨발 야겜이면 이것도 먹힐텐데, 어림도 없지.
나는 침을 삼키고, 그 검은 형상이 행동하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뭐라도 말하기를 바라면서.
그 검은 형체가 한 번 더 일그러지더니 로브를 두른 형상처럼 보일 무렵,머릿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으라.]
성대가 없나? 이 씹새끼는 남의 머릿 속에다 지껄이네.
괜히 쫄지 않으려고 그깟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놈의 대전사답군.]
뭐여.
나는 대답 안 했는데?
마치 내 생각을읽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넘겨짚었나 싶었는데 문득 이 새끼가 웃었다.
생각을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게 맞았다.
웃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고, 다시 되돌아왔다.
마치 동굴 속에서 낸 소리가 메아리 퍼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군데 씹덕아.
나는 팔짱을 껴서 내 불만을 전면에 드러냈고, 놈은 즐거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런다면 알겠는가?]
녀석이 손을 뻗자, 벽을 빼곡히 채운 혈관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 혈관은 각각 갈라져 내게 꽤 익숙한 액체를 쏟아냈고, 나는 그게 내가 독의 하천에서 마셨던 그 물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물약을 만든 건 여름의 도살자의 말을 따르자면 그 새끼였다.
씨발, 봄의 순례자라고?
[그래, 사람들은 나를 봄의 순례자라고 부르며, 나는 나 자신을 영원과 순환의 구도자라고 칭하지.]
뭐라는 거야 씨발.
이 씹새는 내 생각에 별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틈에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검은색 심장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비쥬얼에 걸맞게, 벽에는 혈관이 빼곡했다.
물론 심장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건 아닌데….
좆같은 물약 마시지 말걸.
나갈 길이 보이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적셔져가는 발목으로 물약이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그걸 마신 덕분에 일이 아주 쉬워졌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녀석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내 바로 앞에 나타났다.
봄의 얼굴은 씨발 존나 징그럽게 생겼다. 굵은 검은색 혈관이 이리저리 지나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이게 본체인가?
진심 개좆같이 생겼네.
순례자는 더 이상 나의 생각에 반응하지 않았고,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 손목을 타고 검은색 혈관이 촉수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씨발 이 다크 판타지는 촉수가 국민 아이템인가?
왜 죄다 촉수를 쓰는 거야.
확실한 건, 이 씹새끼가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 팔을 타고 올라오는 혈관이, 어느덧 내 근육 속으로 스며들었다.
더 섬뜩한 건, 그 와중에 내 팔에는 좆도 아무런 감촉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버티려고 했지만, 내가 버티려고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그 검은 핏줄은 천천히 내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아, 좆됐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는 게 아니었어.
그따위 생각으로 눈을 감으려는 찰나, 갑자기 등이 확 차가워졌다.
"…엉?"
그 추위는 내 감각을 선명하게 일깨웠고, 나는 불쾌감이 점차 줄어드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떨구니, 내 팔을 기어오르던 검은 혈관이 점차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신이라고 할 건 없지만, 혈관이 파고들었던 상처가 쩌적하고갈라지더니 얼어붙었다.
봄의 순례자의 목소리에 격정이 어렸다.
[겨울의 폭군, 네놈도 이 인간을 주시하고 있었나.]
겨울의 폭군이면 다른 신 새끼인데?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여전히 검은 공간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부자연스럽게 서리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나와 봄의 순례자는 그 서리가 불어오는 방향을 무심결에 바라봤다.
쩌적
쩌저저적
무슨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허공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 균열은 빠르게 커지더니.
쿠오오오오오오!!!
가해진 금을 완전히 부숴뜨리며 눈과 서리가 불어닥쳤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눈사태가, 이 빌어먹을 뭔지도 모를 공간을 휩쓸기 시작했고.
"으븝 그륽."
나는 눈에 파묻히면서 눈을 감았다.
*
…이건 또 익숙한 천장인데.
나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텐트의 천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만 아래로 떨궈 내 몸을 체크했다.
내 몸의 상처들이나 골절상 같은 건 얼추 메꿔져있었는데, 한 편으로는 내 팔에는 처치되지 않은 상처가 하나 있었다.
그 상처는 유독 무슨 벌레 새끼가 산 채로 헤집은듯 살거죽이 뒤집혀 있었다.
심지어 미묘하게 차갑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 탓에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아, 씨발 꿈.'이 아니었나?
나는 상처가 난 팔을 내버려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얜 또 왜 여깄어."
내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놓고, 곤히 잠들어있는 사람은 메이였다.
겨울의 처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나는 도로 몸을 뉘였다.
도대체 아까 그건 뭐였을까. 나는 문득 다시 팔의 상처를 봤다.
단순히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데다, 그 추위마저도 실제와 다를 게 없었다.
봄의 순례자는 심지어 내 몸을 집어삼키려고 한 거 같았고.
나는 그 새끼가 아직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짚고 강렬하게 생각했다.
느금마 고추참치 절도하다가 걸려서 체포됨.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다는 걸로 쳐도 되는 걸까.
안심하며 목을 젖히는 순간, 내 눈앞에 뭔가 나타났다.
[거인의 힘 적합성이 상승합니다.]
[하루에 한 번 임의적으로 발동할 수 있으며, 유지 시간과 근력이 더 높게 상승합니다.]
[임의 발동 시 재생 능력이 상승합니다.]
…갑자기?
설마 씨발?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고, 그 가능성이 맞다는 것처럼 그 활자는 내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때였다.
퍼억!
억, 씨발.
내 가슴팍을 메이가 머리로 들이받았다.
"응… 머야…."
녀석은 나를 잠시 원망하는 눈으로 꼬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팔을 얹고 자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장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더니, 못볼 거라도 본것처럼 나를 보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내가 잘생긴 건 맞는데 그렇게 더듬을 필요는 없지 않냐.
심지어 녀석은 자기의 조그만한 손으로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성추행 지리네. 밖이었으면 고소각인데.
내 체향으로 딸도 치고, 내 몸을 성추행도 하고.
솔직히 아주 조금 고소가 마려웠다.
"너, 너… 괜찮아? 내 목소리는 들려? 내 이름은 알아?"
"짱깨잖아."
"…흐잉."
메이는 내 개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씩씩대거나 주먹으로 통통 내 몸을 때렸을 녀석이, 울먹이더니 내 몸을 꼭 껴안았다.
…이 촉감은 진짜 안 질리네.
처음엔 좀 답답했는데, 녀석이 껴안고 있는 팔의 힘을 풀지 않으니 그냥 즐기기로 했다. 나는 두 개의 살덩이가 내 몸을 꾹 누르는 감각을 느끼며 녀석의 등을 쓸어줬다.
"나는… 네가, 죽, 는 줄 알고."
녀석은 히끅히끅 눈물을 떨구고 콧물을 내 옷에 묻히면서도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대충말의골자와 이 새끼의 부족한 어휘 능력으로 하는 설명을조합하자면.
"내가 쓰러지고 나서 온몸에 검은 게 돋아났다고?"
"응…."
그거 개좆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몰랐지만, 봄의 순례자가 되기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그 뒤에 겨울의 처녀가 치료하고 기사단측 연금술사 역시 도우면서 어느 정도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건 잘됐는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으니 기묘하게 불안했다.
마치 일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만 같은.
그래서 나는 메이의 볼을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봄의 순례자는 어떻게 됐는데?"
"응?"
"그 검은색 새끼들 있잖아."
"아, 걔네라면…."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꺼렸다. 그래서 나는 직접 알아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다리에서 약간의 탈력감이 내달린 후에야제대로 설 수 있었다.
메이가 그런 내 몸을 옆에서 부축했고, 큼직한 빨통이 내게 다른 종류의 원기를 주었다.
그럼에도 내 몸은 무슨 하루종일 잔 것처럼 힘이 없었다. 아랫도리도 일어서지 못하는 게 상당히 안 좋았다.
"너 쓰러지구 나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도시까지 오긴 했어. 그래서…."
"…문 밖에 쌓여있겠지."
나와 메이가 있는 텐트는 중심부에 가까웠다. 그런 탓에 나는 밖에 나오자마자 참상을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텐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마차나 장비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텐트들 역시 우후죽순으로 자라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수가 부족했는지 대부분의 병사는 지렁이 새끼가 쓸어버린 흙더미나 돌조각 위에 대충 걸터앉아 있었다.
우리는 폐도시에 있었다.
나는 저만치에 벽에 꽂혀있는 지렁이를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 최악의 가능성이 맞는 모양이었다.
겨울의 해방자가 죽어, 담당일진이 사라진 4명의 신이라는 찐따들이 하는 짓은, 내 몸뚱이로 하는 땅따먹기였다.
"좆같은 신 새끼들…."
안 그래도 죽일 거였지만, 나는 신에 대한 살의가 들끓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