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여름의 도살자 (46/274)



〈 46화 〉여름의 도살자

봄의 순례자는 어떤 새끼인가, 하면.
이 새끼는 한 개체가 아니다.
이 새끼가 기생하기 시작한 모든 개체가 봄의 순례자였고, 본체랄 것도 없이 모든 개체를 잡아 쳐죽여야 봄의 순례자는 죽는다.


그 모든 개체의 정점에서 전부를 통제하는 하이브 마인드.
게임에서는 단순하게 봄의 순례자의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괴물을 쳐죽이면 됐지만, 여기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봄의 순례자라고…? 귀공 진심이야?"


마리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이 새끼한테 죽으면 봄의 순례자로 변해버리니,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 없다.
게다가 이 다크 판타지에서 여러번 보스전을 치루고 깨달은 건, 모든 보스와 몬스터들이 전부 자아를 가지고 철저히 계산한끝에 행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고통과는 완전히 무관한 하이브 마인드니, 내가 놓치기 시작한다면 개체 중 하나를 숨겨 다음을 도모할 수도 있겠지.


존나 음침한 씹새끼였다.
당장 겪어야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방향성을 틀어야  필요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당면한 문제기도 했다.

"봄의 순례자입니다. 그는 저를 통해 도살자께 해를 끼치고자 했으나, 여러분의 헌신적인 간호와 제 의지로 이겨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메이는 나한테 '사이비를 보는 눈빛'을 보내오지 않게 되었다. 대신 여전히 미심쩍게 보긴 했지만.

"오오… 역시 대전사님이십니다."


산적이 나를 보며 감탄했고, 기사단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책들도 엇비슷한 시선을 나에게 보내왔다.
물론 겨울의 폭군이 하드캐리 하긴 했지만, 안 그래도 수가 줄어들고 부상을 입은 이들이 많아 사기가 떨어진 이들에게 그런 소리를 곧이곧대로 할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살자의 신도이자 여름의 칼날입니다. 우린 무릎 꿇는 대신 죽음을 택하는 이들입니다. 저는 여름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고, 그에 응하여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여름께서는 싸우라고 하셨고, 저는 칼을 들고 뛰쳐나가 저들을 일소할 겁니다."


 마음 속에는 아무래도 훌륭한 광신도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대사가 잘도 나오네.
메이는 다시 '사이비를 보는 눈빛'을 꺼내들었다.
뭘 봐, 뒈질라고.
내가 눈을 부라리자 메이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는 팔꿈치로 내 허리를 툭툭 두드려댔다.


"하지만 대전사님, 우리는 병력도 꽤 줄어들고 정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식량과 식수는 있긴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테죠."


정면 돌파가 답인데, 정면 돌파를 할만한 준비가 되질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내 연설에 퍽 감명받은  했지만 기사단장이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적극 동의하지 못했다.

좋아, 그럼 내가 나설 때로군.
마침 새로 얻은 힘도 있고 하니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예?"


기사단장이 황당했는지 눈을 크게 떴고, 마리암은 아예 내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 뭐, 죽으러 가는 건줄 아는 건가.

"봄의 순례자는 화염에 약합니다. 제게는 여름께서 내려주신 화염의 권능이 있죠. 그걸 적절히 사용한다면 뭉쳐있는 적들은 제 적수가 되질 못합니다. 제가 그들을 일소하고 여러분들을 다시 오아시스로 이끌겠습니다."

그들은 그 말에 그제서야 안심한  보였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바로 문이었다.

"하지만 봄의 순례자들이 대전사님만을 노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희의 부족한 방비로는 문이 열리는  잠깐도 버틸 수 없을 겁니다. 화염이 잘 먹힌다지만… 저희는 대전사공의 종자처럼 화염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 그건 그러네.
그렇다고메이를 남기고 간다고 쳐도, 메이 혼자서  막기엔 저 통로 자체가 지나치게 넓다.
나야 믿는 구석이 있다지만.


내 고민에 다들 침묵했고, 그렇게 한참간이나 돌던 침묵을 산적이 깨버렸다. 그 큼직한 덩치로 내게 다가오더니, 자기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거라면 대전사 나으리, 나한테 이런 게 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꺼내든 것은 원시적인 화염병이었다.
구체형태로 되어있는 화염병은, 여름의 신도라면 익히 갖고 있을만한 방화광적인 물건이었다.
던지면 기름을 따라 불이 번지고,  불이 사방에 흩뿌려지는 그런 물건.
소비형 아이템으로 게임에서도 있었던 것 같은 물건이었다.

이걸 이제서야 꺼내든 것도, 꺼내들고 머뭇거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걸 쓰겠다는 건, 나를 앞열에 묶어두고 봄의 순례자들이 못 넘어오게 불을 질러서 막겠다는 거니까.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설령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돌이킬  없게 된다.

그래서 마리암의 표정이 무척이나 사나워졌고, 기사단장의 얼굴에서도 살기가 감돌았다.
씨발 이 새끼들 안 말리면 대머리 하나 죽겠네.
나는 손을 뻗어 화염병을 집어들었다.


"마침 이런 게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희생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희생하려는 거라서 질린 걸까.
그들이 말리려고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막아세웠다.

"이번에 제가 이 도시에서 죽인 전직 대전사가, 아주 좋은 유물을 갖고 있더군요."


기사단장만이 알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마리암은 여전히 두루뭉실한 표정이었다.

"그 유물은 투구를제외한 전신 갑주였는데, 내구성도 훌륭하고 화염에 완전한 내성을 부여하는 기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쓰러진 후에 옮기면서 봤을 겁니다."
"귀공 설마…."
"예, 그 설마입니다. 제가 그 갑주를 입고, 통로에 기름을 뿌린 뒤에 화염병을 사용한다면 여러분들을 보호하면서 저도 유사시에 도피할 수 있습니다."

마리암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기사단장은 뭔가 아는 구석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니 제 갑옷을 가져오십시오. 안에 입을 갬비슨도요."


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내 다리에 각반을 둘러주며, 겨울의 처녀가 속삭였다.
그녀의 손길은 다정했고, 걱정하는 음색은 미묘하게 물기가 어려있었다.
진짜 걱정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그럼요. 오히려… 너무 쉬울 거 같네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웃었고, 겨울의 처녀는 특유의 차가운 손으로 내 등판을쓸었다. 차가웠지만 솔직히 기분 좋았다.


"부디 상처 없이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아, 확실히.
그녀가 더듬는 부위들은 전부 흉터가 되어있거나, 상처가 아직  나아있었다.
회복력을 촉진하는 약초와 물약을 대량으로 썼댔나?
그런 걸 감안하면 지금 못 싸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섹시한 바디에 상처가 남는 건 겨울의 처녀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겠지.

나는 그녀의 걱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녀가 각반을 둘러주고  흉갑을 씌우기 위해 다가올 때 말했다.


"걱정마세요. 그럴테니까요."

솔직히 다칠 수가 없다.
내가 쓰는 건 거대한 불빠따고, 봄의 순례자는 불에 존나 약하니까.
내 몸뚱이로 땅따먹기를 하려고  죗값은 톡톡히 치러야지.


"무운이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녀는 내게 흉갑을 입혀줬고, 나는 단단히 채워진 흉갑을 손마디로 두드리고는 투구를 뒤집어 썼다.


오, 수리 존나 잘해놨네.
분명 지렁이한테 쳐맞아서 윗부분이 찌그러졌던 투구는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역시 겨울의 처녀였다.

"그게 그 유물인가 봐."


등에 폭군의 검을 짊어지고, 허리춤에 비상시에 뽑아서 쓸 그레이톰의 심판을 메어두자니 마리암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는 품에 망토 같은 걸 안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예, 투구가 화염 내성이 없어서 아쉬운 걸 빼자면… 언제든 치고 빠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화염을 지나갈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좀 했는데, 아마 팔로 머리를 가리고 지나가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재생력 믿고 휙 지나가던가.
내가 투구를 고쳐쓰니, 마리암이 내게 다가와 그 망토를 둘러줬다.


후드가 달려있는 망토였는데, 망토는 선명한 적색이라 갑주랑 잘 어울렸다.
근데 웬 망토?
이거 화염 지나가면 불타버릴 건데.
하지만 마리암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선조 때부터 물려받았던 물건이야. 입는 사람에게 딱 맞춰서 크기가 조정되는데, 두르고 있는 사람이 화염에 불타지 않도록 해주는 마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말하며 망토를 내 흉갑 위로 묶자, 조금 짧았던 망토가 늘어나 다리 언저리까지 늘어졌다.

…아이템이라고?
이걸 그냥 준다고?
내 놀란 표정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투구 쓰고 있으니 별 수 없지만.

"혹시 그 유물이 충분하지 않을까봐. 귀공한테 주는 거야. 귀공은 우리의 희망이니까."


아니 뭐 희망씩이야.
물론 존나 몰려있고 곧 좆될 거 같아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거기서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단에게 여름의 불꽃을 먹여주겠습니다."

그녀는 그제서야 웃었다.
나는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나갔고, 마리암은 그런  뒤를 따라오며 부하에게서 활을 받아들었다.

내가 가로지르니 병사들, 용병들, 기사들, 산적, 심지어 도마뱀 인간들마저 나를 보고 대전사! 대전사! 하며 환호했고, 나는 그들을 시크하고 존나 멋지게 지나쳤다. 통로까지는 금방이었다.

"오셨군요. 대전사님의 모습이 정말…."

산적은 내 모습을 보고는 인상 깊었는지 목소리가 떨렸고, 기사단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나에게 인장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씨발, 거울이 없는  존나 아쉽네.

존나 여름의 대전사 티도 나고 존나 멋있을 건데.
여름의 광신도단의 반응을 보자면  모습이 얼마나 멋질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쉬워 하면서도넋놓고 나를 보고 있는 메에이게 손짓했다.

"내가 문을 열면 화염이 치솟을 건데, 네가 보다가 뚫린다 싶으면 방패를 펼쳐서 잠깐이라도 버텨줘."
"…아, 응."


나는 일부러 폭군의 검의 칼자루를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큼직한 문 너머에서는 이따금씩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봄의 순례자는 내가 벗어난 걸 알았을테고, 그러니 내가 맞이하러 나올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안에서 화염을 다룰  있는   밖에 없으니까.
크게 숨을 들이키며 화염 부여를 쓰는 요령으로 거인의 힘을 내면에서 부르짖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봄의 약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전능감이 심장에서 쏘아져 신체 말단까지 뻗어나갔다.
숨결이 뜨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나는 등에서 짊어진 폭군의 검을 한손으로 끌어내려 양손으로 쥐었다.
개쩌는 성능이었다. 갑자기 겨울의 폭군에 대한 신앙심이 치솟는 걸 느낄 정도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면 속에서 화염 부여를 부르짖었다.

푸화아아아아악!


거세게 치솟은 불꽃은 폭군의 검을 뒤덮고는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동시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돌끼리 마찰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혈관이 전신을 뒤덮은 도마뱀, 그렇게 된 인간, 이족 보행 도마뱀, 선인장 따위가 나에게 미친듯이 팔을 내저으며 밀려들었다.
어느새 내 눈앞이 녀석들로 가득차서 너머가 보이지도 않았다.


보통이라면 겁에 질릴만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동요는 커녕 감정에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손에는 이 게임 최강의보스가 사용하는 검이 들려있었으니까.

내 뒤에서 화염병을 깨트렸는지 무언가 깨져나가고, 화염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나는 검을 휘둘렀다.


"―흐읍!"

젖 먹던 힘까지 짜낼 필요도 없었다. 이미 폭군의 검은 딱 내 손에 맞는 무기가 되어있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대검이 바로 앞에서 달려오던 봄의 순례자 다섯 마리를 단번에 쪼갰고, 몰려들던 새끼들이 밀쳐나 쓰러졌다. 베여나간 놈들이 타올랐다.
나는 그 화염을 보며 웃었다.

 뜻대로는 안된다, 씨발놈아.
나는 다시 놈들에게 달려들며 검을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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