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여름의 도살자
철저히 준비했다.
육신은 완전히 지배되었고, 이들의 정신은 내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절망 역시 없다.
그저 내가 움직이고자 하면 움직이는 내 수족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분명히 공포와 고통이었으며, 내가 느끼는 건 있을리 없는 절망감이었다.
놈은 그 절망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놈의 몸을 파고들었을 나의 권능은 얼어붙어 사라졌고, 녀석은 서리거인의 힘을 지닌 채 증오스러운 여름의 불꽃을 휘둘러댔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내 수족 서넛이 한꺼번에 토막이 나거나 불타 사라졌다.
괴물 같은 놈….
머리에 두른 후드와 망토가 흩날리고, 전신에 두른 검붉은색의 갑주에는 이빨 하나 박히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놈의 양손에 들린 거검이 휘둘러지자 또 내 수족 여럿이 불탄다. 나는 고통이 전해지기 전에 연결을 끊었다.
물론 화염을 사용하고, 공격 범위가 넓은 탓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약점을 어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보완하려고 놈의 육체와 저 유물을 탐냈던 게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들, 이대로 밀리기만 한다면 내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아껴두려고 했건만.
웬 야만인 하나가끼어든 탓에 일이 꼬인 걸 짜증내면서, 나는 내 내면에 침잠한 나의 권능을 부르짖었다.
*
아, 개꿀.
이렇게 손쉬운 싸움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내가 폭군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밀쳐진 놈들은 불타 사라졌고, 딱 적당한 거리에 있던 놈들은 휘두른 방향을 따라 쏘아지며 둘로 쪼개졌다.
물론 단단하기야 했지만, 거인의 힘을 킨 내 상대는 되지 않았다.
"…흐읍!"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군의 검이 단순하게 붕쯔붕쯔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휘두르려면 큰 자세가 필요했고, 이 씹새들은 그 빈틈을 파고들어 내 갑주에 이빨 자국을 새기려고 하거나공격해왔지만….
먹힐리가 있나.
저쪽은 냉병기 미만의 공격 수단이고, 이쪽이 장착하고 있는 갑주는 여름의 대전사가 사용하던 개쩌는 아이템이다.
그거에 흠집이라도 나는 건 좀 아니지.
내가 이걸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콰드드득!
길게 휘두른 폭군의 검이 걸어다니는 나무를 못 걸어다니는 나무로 바꾸고, 이내 태워버렸다.
그걸 보자니 그건 이 좆망 다크 판타지에서 겪은 설움이 좀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 맛이지.
이 맛에 무쌍 찍지.
나는 다시 한 번 빈틈을 파고드려는 늑대에게 칼을 내리찍었다.
쿵!
엉?
어디갔어 씨발.
내가 내리찍은 자리는 비어있었다.
까득!
"윽…!"
갑자기 빨라졌다고?
나는 내 옆구리에 매달린 늑대의 머리를 왼손으로 짓뭉개고는 몰려오는 괴물들을 바라봤다.
확실히 빨라져 있었다.
심지어 몸에서는 고름 같은 액체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는데, 딱 봐도 관절이나 근육이 무리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이건… 권능인데?
심지어 익숙한 권능이었다.
봄의 순례자를 섬겨서 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권능 중 하나, '한계 초월'이었다.
나는 검은 핏줄이 이제 전신에 돋아난 괴물새끼들을 보면서 몇 걸음을 뒤로 물렸다.
오 씨발, 확실히 훨씬 빠르고 강력해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덤벼오는 탓에 나는 오히려 한시름 놓았다.
만약 이 새끼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면 더 귀찮았을 건데.
나는 입꼬리를 틀어올리면서 몸을 젖히고는, 그대로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칼날이 부딪힌 벽에서 파편이 튀었고, 그 사선에 있던 괴물 두 놈은 나란히 머리와 몸통이 갈라졌다.
보통이라면 겁을 집어먹어야 할 공격인데도 이 개새끼들은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미친새끼…!"
봄의 순례자의 의도는 뻔했다. 내가 쉴 틈을 주지 않겠다 이거겠지.
아무리 초인적인 근력을 가지고 있든 뭐하든, 결국 지구력의한계는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놈의 생각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녀석의 짓거리에 어울려줬다.
왜냐?
지금의 나는 지구력이 엄청난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내게 한계는 없었고, 봄의 순례자는 그것도 모른 채 징그러운 새끼들을 연신 나에게 돌진시켰다. 문 너머로 보이는 놈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콰드득! 푸화악!
내가 휘두른 폭군의 검에서 화염이 거둬지고, 그걸 두들겨 맞은 괴물놈이 칼날을 붙잡았다.
아마 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화염이 없어졌으니 이제 놈은 아무것도 아니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화염 부여는 분명 강력한 기능이고, 화염 부여가 켜지지 않은 폭군의 검은 강력하긴 하지만 막아내지 못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니까.
그래서 막을 수 없는 확실한 공격 수단을 준비했다.
나는 폭군의 검에서 미련 없이 한손을 놓았고, 자유로워진 왼손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나는 머릿 속에서 화염 부여를 외쳤고, 그러자 화염은 내 주먹에서 들고 일어났다.
일렁이는 화염이 주먹을 타고 거칠게 치솟았고, 나는 그 주먹을 단단히 쥐고 어깨를 젖혔다.
내게 달려들려던 괴물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내 주먹 때문이었다.
"파이어 펀치!"
화르륵!
물론 내게 주먹질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칼을 다루는 거보다는 주먹이 익숙했다.
쭉 뻗어져 얼굴에 틀어박힌 주먹질 한 번에 머리가 으깨진 늑대인간이 주저앉았다.머리가 불타오르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 소리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아예 폭군의 검을 한손으로 휘둘렀다.
쾅!
벽에 키스한 나무토막이 흉하게 부숴졌고, 그 뒤에서 기습을 노리던 놈을 빠르게 주먹을 내질러 죽였다.
이미 죽은 놈들이 끝 없이 몰려오지만 내 적수가 되지 않았다.
투쾅!
심지어 거인의 힘으로 상승한 근력 탓에 내 주먹은 화염을 제외하더라도 상당한 위력이었다. 대포 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가 으깨지는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내게 두들겨 맞은 괴물의 눈깔이 뭉개져 수정체가 툭 하고 흘러나왔고, 나는 손을 털어내면서 그대로 내게 손톱을 뻗어오는 놈을 걷어찼다.
콰직!
단단한각반에 고간이 차인 놈은 마치 고통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바로 폭군의 검을 내리찍어 놈을 반으로 갈라 죽였다.
갑주 존나 좋네.
화염 내성에아주 뛰어난 내구성, 물샐 틈 없이 완벽한 방어력까지.
나는 일방적으로 봄의 순례자들을 때려죽였다.
카앙!
내 머리를 뭔 이상한 게 두드렸지만, 뚫리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갑주의 방어력을 믿고 앞으로 달려나갔고, 그대로 돌진력을 실어 몸을 틀었다.
방향 전환과 함께 쏘아진 대검이 두 놈을 연달아 쪼갰다.
쾅!
퍼억!
그리고 곧장 손을 뻗어 괴물의 목을 잡아채 으깼다.
으드득, 콰직!
쉴새 없이 몰아치는 괴물들을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거나, 폭군의 검을 놓고 양손으로 잡아 찢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학살을 이어나갔다.
똑같이 빈틈을 노리다가 쪼개지거나 불타죽는 괴물이 잔뜩 쌓여, 잿더미로 눈 앞이 흐릴 쯔음에 갑자기 무언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건 존나 익숙한 놈이었다.
분명 뒈졌어야 하는 놈이었는데, 아마 봄의 순례자가 회수한 모양이었다.
3m에 가까운 크기에 우락부락한 근육, 그 위를 내달리는 검은 혈관들.
입을 멍청하게 벌리고 나를 꼬라보는, 내가 죽였던 부족장이었다.
그놈이 나를 향해 창을 뻗었고, 나는 칼을 휘둘러 막았다.
카아앙!
"크윽."
왜 시체 근처에다 창을 둔 거야 씨발.
나는 밀려나려는 걸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는, 달려들었다.
그놈은 일전에 쓰던 창술은 잊어버린 듯,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부웅! 후우우웅!
4m는 넘는 창은 휘두를 때마다 내 망토를 휘날리게 했으나, 나는 그렇게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동작을 찬찬히 보다가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폭군의 검을 던졌다.
으지지지지직!!!
일반인은 들 수도 없는, 그야말로 거인만을위한 검.
압도적인 질량을 가진 칼날이 그대로 쇄도하자 놈의 창대가 그대로 꺾였다.
나는 흩날리는 나무 파편 사이로 몸을 던졌다.
콰아앙!
놈과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 부족장의 육신은 내게 달려들어 나의 팔을 붙들었고, 나 역시 건틀릿을 낀 손으로 녀석의 팔뚝과 손목을 붙잡았다.
드드드득
"으아아아아아아아!!!"
놈과 부딪힌 내 근육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고, 녀석의 팔에서 고름이 푸슉하고 튀어나왔다.
이 씹새끼는 봄에게서 권능을 존나게 받기라도 했는지, 거인의 힘을 켠 나와 대등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그 균형도 곧 무너진다.
나는 손가락을 세워 녀석의 손목을 으깼다. 그리고 그렇게 으깨진 손목에서 점점 힘이 빠지더니 내 팔을 놓쳤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좆까아아아아!!!"
악을 지르며 파고들었다. 녀석의 팔이 나를 잡아채려는 듯이 움직였다. 나는 그보다 더 빠르게, 단단히 쥔 주먹을 녀석의 대가리에 때려박았다.
콰아아아아앙!!!
주먹이 살을 가르는 감촉과 뼈를 으스러뜨리는 감촉이 동시에 느껴지고, 녀석의 머리가 부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 씹새들은 머리가 없어도 잘만 움직이니까.
내 주먹이 곧장 포탄처럼 쏘아졌다.
쾅!
두드린 옆구리가 부숴져 겨우 매달려있던 팔이 툭 떨어졌고.
퍼억!
횡으로 휘두른 주먹에 남아있는 아랫턱이 바스라졌다.
으드득!
뻗으려던 팔을 잡아채 뽑아내고.
콰직!
고간을 발로 찼다.
선명하게 다리 위로 뭉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일련의 잔혹한 공격에도 녀석은 계속해서 움직였고, 나는 그런 산송장에 주먹질을 계속했다.
솟구치는 힘을 그저 무식하게 주먹에 때려박아 휘둘렀고, 그럴 때마다 육편이 산산조각이 나 흩날렸다.
봄의 순례자가 시체도 조종한다는 걸 알았으니, 멀쩡한 형태로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나는 쓰러지려는 놈의 시체에 올라타 주먹을 계속 휘둘렀다.
마치 노동을 하는 것처럼 정직하게 휘둘러댄 주먹에 놈은 곤죽으로 변했고, 나는 움찔움찔 떠는 고깃덩이를 발로 툭 찬 다음에야 폭군의 검을 집어들었다.
"후… 씨발."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는 전부 움직이지 않았고, 이 넓은 통로에서 움직이는 건 나 하나 뿐인 것처럼 보였다.
좋아, 게임 끝.
나는 도시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시체 중 하나가 나한테 말만 걸지 않았다면.
나는 갑자기 입을 열어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는 시체에게 다가갔다.
"대단하군. 대전사가 이…."
으직!
"스킵."
내가 발로 밟은 탓에 시체의 대가리는 없어졌고, 주변이 뇌조각이나 회백질 같은 게 흩날렸다.
그 옆, 다른 시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듣지도 않."
"스킵."
산산히 부숴지는 두개골의 감촉이 내 강철 장화 아래에서 느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꽤 격정된 목소리로 다른 시체가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해라! 내 말을 듣."
"스킵!"
머리가 부숴져 부들부들 떠는 시체를 뒤로 하고, 나는 윗턱만 남아 눈을 말똥말똥히 뜨고 있는 시체에게 다가갔다.
"씹히니까 좀 빡치냐? 부들부들해?"
나는 그 시체의 머가리에 발을 올려놨다.
"딱 기다려 씨발놈아."
으지직
"내가 조지러 간다."
콰드득
기어코 나는 마지막 시체의 대가리를 부쉈고, 봄의 순례자는 내 꼴을 더 보고 싶지 않았는지 시체를 내버려뒀다.
시체의 피부에 흐르던 검은 핏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