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여름의 도살자 (48/274)



〈 48화 〉여름의 도살자

"다 처리했습니다. 나와보셔도 됩니다."

챠캉!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메이의 방패가 펼쳐져 화염을 흩어냈다.
한 번만으로는 완전히 꺼지지 않아서, 메이는 결국  번  방패를 접었다 펴며 불을 꺼야만 했다.
그렇게 불길이 사그라들고그 너머를 보았을 때, 나는 염려와 경악을 한 표정에 때려박은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겸사겸사 울상 짓고 있는 메이도.


얜 또 왜 이래?


아무튼 간에, 사람들은 안전해졌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내게 다가왔다.


"정말… 혼자 다 해치우셨군요."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담긴 경악과 놀라움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려운 적은 아니었습니다. 여름의 도살자께서 지켜보시는 덕에 해낼  있던 과업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시 대전사님을 따르기로  결정은 옳았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언행이 또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사막에 짱박혀서 들어갈 수 없는 도시를 지키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들에게, 내가 나타난 것만하더라도 상당히 희망찬 일일텐데 지금 이렇게 대전사로서의 강함을 증명해버렸으니.

그렇게 생각하자니 얘네 눈에는 내가 메시아 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마리암은 인파에 섞여있다가  마디를 더 얹었다.

"정말 대단해. 역시 대전사공이야…. 심지어 상처 하나 없다니. 나였으면 못 해냈을 일인데."

심지어 병사들 중 대부분이 내가 돌아온 모습을 보고 기웃거리다가, 내가 전부 해치웠다는 사실을알고는 '대전사! 대전사!'  일창하며 무기를 두드려댔다.
무슨 부족의 부족장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님 사이비던가.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메이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메이는 조용히 울상짓고만 있었다.
뭐여 씨발.
너무 사이비라서 눈물이 나오나? 종교가 아편이라는 사실에 주석을 떠올리고 눈물이 나는 건가?

녀석은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알고 나서야 내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라서, 나는 메이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내가  잡…."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건틀릿을  주먹으로 내 배를 통통 두드렸다.
물론 거기도 갑주가 두르고 있어아프진 않았지만… 얘 아까부터 왜 이래?
메이가 고개를 확 치켜올리더니 중얼거렸다.

"난… 네가 죽는 줄 알고…."

그렇게 말을 겨우 삼키더니, 내 흉갑에 그 치렁치렁한 웨이브 헤어를 드리우며  끌어안았다.

"네가 죽으면… 난 여기서 혼자인데…."


 죽지 않았나?
심지어 꽤 여유로웠는데.
봄의 순례자는 나한테 생채기 하나 못 입혔고, 나는 일방적으로 그 새끼를 쥐어패줬다.
한 술 더 떠서 그 새끼는 비장의 수를  개나 써놓고 줘털렸다.

혹시 이게 공통적 의식인가 싶어 인파로 고개를 돌리니, 마리암을 비롯한 몇 사람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엥?  이래 이 새끼들.

"안 죽었잖아?"
"그, 래도!"

녀석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더니 나한테 악을 질렀다.
평소라면 왜 소리를 치냐고 했겠는데, 진짜 존나 쌓인  많아보였다.

"맨날, 맨날… 위험한 짓만 하고… 나도 돕게 해달라구…."

…꽤 돕지않았나?
방패로 지렁이 새끼 밀쳐서 내가 심장이 안 뚫리게끔 엄호하기도 했고, 회색의 주인 때는 마지막에 결정적인 역할도 했는데.
하지만 녀석은 씩씩대더니 아예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어… 미안하다."

왜 이러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녀석은 나를  껴안은 채 한참간 눈물을 흘려댔다.
진정된 후에도 녀석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을 꼭 잡은 채 답지 않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오고는 했다.
그래서 그냥손 잡고 다니는 악세사리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메이의 손을 잡아 이끌어, 한창 짐을 싸고 있는 겨울의 처녀에게 가니 마리암도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왔네. 메이공은 좀 진정됐어?"
"음, 보시다시피요."

녀석은 마리암의 말에 거의 반응하지 않고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좀 귀엽네.

"그렇다면, 용건을 말해도 될까?"

무슨 용건?
봄의 순례자를 처리했으니 굳이 물어올 게 있나 싶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럼 사양 않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군단을 모을 생각만 있었지, 정확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터라 당연했다.
씨발 그러게, 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쎄요, 여름의 도살자는 제게 적을 말살하라고만 하셨지. 그 이상을 명령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저희 자율이 아닌가 싶긴 합니다."

마리암은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당장 귀공이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 말야. 미리 말하지만, 나와 나의 용병단, 기사단, 그리고 저기 덩치의 전사회를 비롯한 일동은 귀공을 따를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제 이 거대한 단체가 뭘 할지 정해달라는 건가?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여기서는 사이비 짓거리는  해도 되겠지. 괜히 메이의 눈치를  번 더 봤다.

"우선 요새의 재건과… 저기 골치덩이 친구들의 세력부터 흡수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 고갯짓이 향한 곳에는 화염 비늘족의 잔존 병사들이 기사단 측의 병사에게 얻어낸 식량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마리암이 말하길, 방어전에서 그들의 화염 비늘이 봄의 순례자들에게 무척이나 잘 먹혔다고 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도, 이렇게 인간에게 친화적인 도마뱀들이 군단에 합류한다면 봄의 순례자를 상대하는 일이 보다 쉬워질 것처럼 보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봄의 순례자 습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전 부족장이 어째서 그렇게 된 건지,  우리를 공격했는지도 알아야겠죠. 서열 정리도 좀 필요할테고… 우리에게 여전히 적대한다면 청소할 필요도 있고요."

마리암은 청소라는 말에 반응했다.
혹시 또 싸울 수 있을까봐 설레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여름의 광신도들.




*

기사단장은 도마뱀을 운전하며 내게 몇 가지 정보를 일러줬다.
예를 들자면, 화염 비늘족은 본래 왕국의 비호를 받은 부족이었는데 세상이 좆되기 시작하면서 이리 도피해오는 겸, 여름의 도살자가 내리는 계시를 따라 다른 집단과 반목을 하게 되었다는 거라던가.
아인 중에서 가장 인간에게 친화적인 아인이라던가.

나는  정보를 귀담아듣다가 질문했다.


"그럼 저희가 보호를 제공해준다고 했을  선뜻 응할까요?"

왕국이 못 지켜줘서 떠나왔다면 넘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사단장은 고개를 내저어 내 생각을 부정했다.

"아마 저희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국가에 맞먹는 수준도 아닌데다 이렇다할 요새도없으니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그럼 어쩔 수 없지.
고대의 도시로 데려가는 게 베스트겠거니, 싶었지만 당장에 그런 도시로 데려가준다고 한들 믿을지도 미지수였다.
대화가 끊어지려는 찰나 어느새 사막의 한 켠, 산맥을 접경지로 끼고 있어 왠지 붉은색이 도는 바위가 널려있는 곳에 도착했다.

바위 더미 사이로 마을이 언뜻 보였고, 그런 마을을둘러싼  순찰을 돌고 있는 이족 보행 도마뱀이나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의외로 제대로 되어있네?
나는 그정도의 희미한 감상을 품으면서 허리춤의 검을 뽑아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치솟는 화염이 검날을 타고 흐르자, 경계를 품으며 다가오던 화염 비늘족이 경계를 풀고 놀란 눈으로 나를 꼬라봤다.

음, 이건 사이비 아가리 각이군.
나는 망설임 없이 우리의 영원한 투쟁과 영원한 불꽃에 대한 개소리를 늘어놨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우리의 호위를 자처했다.

마을은 멀리서  때는 규모가 좀 작아보였는데, 생각보다 내부는 컸다.
바위산을 끼고 그림자에 숨어있는 주거지나 병영 같은 것도 있고, 심지어 바위산 안을 파내고 요새로 삼은 것도 있어 신선하게 놀라웠다.
좀 판타지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들고 있는 화염 탓에 나와 일행들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전사나 농민들이 시끄럽게 웅성댔다.


"멈추십시오. 고귀하신 대전사시여."


그때 그 웅성거림을 가르고 한 사람…이 아닌 도마뱀이 튀어나왔다.
두 다리로 걷고 있는  도마뱀은 왠지 목소리만큼은 겨울의 처녀만큼 듣기 좋았다.
생김새는  평범해보였는데, 호위하던 병사들이 벌벌 떠는 걸 보면 높으신 분인 모양이었다.


나는 화염을 두른 칼날을 칼집에 밀어넣었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말 없이 내 차림새를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견이 좆간지가 나니 대전사로 인정된 모양이었다.

"대화를 원하신다면 따라오시고, 전투를 원하시는 거라면 뒤돌아 나가주시지요."


그녀는 그런 말을 남기고 도시 내부로 걸어갔고, 난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대충 이 근처에서 머물러주세요. 대화 끝나면 나오겠습니다."
"난 같이 갈래."

메이가 드물게 떼를 썼으나, 차마 안된다고 하기에는 아직 퉁퉁 불어있는 눈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뒤에 찰싹 달라붙어 걷는 메이와 함께 암컷 도마뱀을 따라갔다.

그녀는 나와 메이를 어떤 건물 안으로 이끌었는데,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했다. 한 편으로는 미니멀리즘마저도 느껴졌다.
암컷 도마뱀이 먼저 앉고, 나와 메이는 그 앞에 앉았다.

"…마을을 통과하시면서 보셨을 겁니다. 전사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요."


흠, 그걸 많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협박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실 확인인지 알 수 없어, 나는 일부러 투구를 벗지 않고 대답했다.

"예, 봤죠."
"그럼 납득하실  있겠군요. 저희는 대전사님을 공격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사들을 이끌고 대전사님을 토벌한다는 불충을 저지른 건 부족장인 제 오라버니의 독단일 뿐, 제사장인 저와 대부분의 전사는 불응했습니다."


그게 오빠라고?
그 3m 넘는 게?
네 오빠 쩔더라.

나는 이 암컷 도마뱀의 어머니가 존나 큰 걸지, 아니면아버지가 존나 큰 걸지 고민했다.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저희를 놓아주신다면, 대전사님과 그 일행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이 사막을 떠나고 싶습니다."


오, 얌전한데.
으레 그렇듯 존재하는 뭐 단체의 온건파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저건 나쁜 제안이 아니다. 얘네 전사의 수를 보자면 싸운다고했을 때 귀찮아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얌전히 받아들이기엔 너무 아까웠다.

만약 봄의 순례자가 나를 노리고, 여름의 신도들을 공격해오는 일이 없었다면 '응~ 잘 꺼지시구연~' 했겠지.
하지만 봄의 순례자는 나를 여전히 노리고 있고, 화염 비늘족의 포로들은 맨몸으로도 봄의 순례자를 상대할  있다는 걸 증명했다.
어떻게 봄의 씹새끼가 부족장을 구워삶았는지는  수 없지만, 왜 구워삶았는지는  수 있었다.

"그러시군요. 그럼  제안도 들어보시겠습니까?"

암컷 도마뱀은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나는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선수쳤다.

"저희와 함께 하시죠. 저희와 함께 여름을 섬기고, 하나된 교단으로 안전과 안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메이는 나름 맞장구를 쳐주려는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를 보호하기로 했고 그리 해오던 왕국조차 멸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저희는 확실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왕국이 해오던 그런 확실한 보호를요."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네 세력이 너무 작아서 안될듯ㅋㅋ' 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사단장이 주었던 정보를 토대로 설득할 말을 떠올리다가….
걍 귀찮아져서 막 던지기로 했다.


"그래서 택하는 게 도피입니까? 당신께서 말하신대로 세상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해체되어 모두가 개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투구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놨고, 내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을 본 도마뱀의 눈동자가 움찔하는 걸 보았다.
존나 징그럽네.


"저는 저 먼 북부가 무너지는 걸, 야만의 땅이 무너지는 걸 봤습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도마뱀의 꼬리가 격하게 흔들렸다.
뭐여 씨발.
얼추 넘어오고 있는 건가?
나는 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저는 여기 제 종자와 함께 야만의 땅에서 왔습니다. 여름의 계시를 받고요. 여름께서 그러셨습니다. 맞서라고.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녀의 꼬리가 문득 멎었고, 나는 지금이  지를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투쟁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서이 멸망하는 세상에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적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내 손에 못박혔다.


"당신 혼자서, 당신의 부족만이 외따로 도망친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협박인가요?"
"아뇨, 이건 현실입니다. 저는 오는 길에 수많은 괴물들을 보았고, 그 중에는 이미 죽어 변질된 드래곤 역시 있었습니다. 당신은 드래곤보다 강하다고  수 있습니까? 당신의 부족은 어떻습니까?"


그녀의 눈동자에서 선명하게 갈등이 스쳐지나갔다.
좋아, 마무리 지어야지.

"저는 여름의 도살자께서 맡기신 과업을 끝내고 난다면, 당신의 부족과 당신, 제가 이끄는 모든 이들을 이끌고 고대의 도시, 여름께서 점지하신 신천지로 떠날 겁니다. 보호와 안녕, 평화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쐐기를 박았다.

"함께해주십시오."

그리고 미소!
내가 봐도 존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저 암컷 도마뱀이 어떤 감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건파인 이상 넘어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너무 불편한 침묵이라 나는 흘깃 메이를 보았다가 다시 도마뱀을 보았고, 도마뱀은 내 손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안 먹히나? 사이비 약빨 다 했나?
씁, 그간 잘 먹혔는데. 내가 손을 거두려는 찰나, 그녀는 내 손을 붙잡았다.


"믿겠습니다, 대전사님."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크, 역시 넘어올  알았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르륵 넘어와  손에 깍지를 끼는 순간 정색했다.

뭐야 씨발. 왜  그런 눈빛으로 봐.
제사장은 나를 열띤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