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여름의 도살자
그녀가 나를 이끌어 안내한 방은, 3m가 넘는 거구가 쓰기엔 지나치게 작은 방이었다.
딱 리자드맨 평균치 정도 될 법한 놈들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방.
나는 그 방의 정체에 대해 듣고는 솔직히 좀 놀랐다.
"이게 그 부족장의 방이라고요?"
"예, 전임 부족장이 쓰던 방입니다."
"근데 이 정도 크기의 방이라면 못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녀…라고 해야할 이 조신한 암컷 도마뱀 마법사는 침울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그 약 때문입니다."
약?
내가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길래,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고는 물건을 훑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먼지가 쌓여있는 가구들에서는 기묘하게도 손을 탄 흔적이 있었다.
"어느날… 저희 정찰대들이 사람 하나를 데려왔습니다. 그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가면으로 가리고 전신을 두르는 로브를 입었는데, 너무 큰 화상을 입어 가면과 로브를 벗기를 주저한다고 했었습니다. 제 오라버니이자 부족장이신 로미어는 그에 관대하게 가면을 벗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그 뿐만이 아니라 식량과 치료 역시 제공해주겠다고 했었죠."
오, 그런 새끼로는 안 보였는데.
그냥 미친 새끼로만 보였지.
"그에 그 떠돌이는 감사의 표시로 전사의 영약이라는 걸 3 병, 건넸습니다. 안에 든 액체는 반투명한 흰색이었고, 언뜻 무해해보여 오라버니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었습니다. 심지어 한 병은 그 자리에서 들이키기까지 했죠. 저는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거겠지.
얼추 듣기로는 호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됐겠군요."
"예… 오라버니는 빠르게 몸집이 부풀었고, 곧이어 성격도 흉포하게 변했습니다. 저희는 뒤늦게라도 그 떠돌이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암컷 도마뱀의 침통한 목소리에 대충 뭔 일인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봄의 순례자가 이렇게 영악한 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에는오라버니께서는 여름이 계시를 내렸다며 전사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 뒤는 대전사님도 아시는대로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대충 정리했다.
그러니까, 봄의 순례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장을 손에 넣고자 했고 그 도구로 부족장을 채택했다.
부족장은 그에 호구처럼 넘어가 봄의 순례자가 되었고, 그 결과 나한테 죽었다.
심지어 고깃덩이가 됐다.
이거 존나 미안한데.
"오라버니께서는… 돌아가셨습니까?"
"…예, 선택권이 없더군요."
그 말에 그녀의 큼직한 파충류 눈알에서 눈물이 또륵 떨어졌다.
파충류도 울 수 있나?
"그렇다면 부족장은 공석이군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뭐 내부적인 문제라도…."
"아뇨, 그런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이 부족장을 겸임할 수는 없고, 제가 부족을 잘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어깨를 축 내리며 슬픈 표정을 짓는 도마뱀에게 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애완동물이 기죽은 채로 낑낑대는 것 같았다.
근데 이 새끼가 은근슬쩍 나를 꼬라보는 게 뭔가 묘했다. 씨발설마….
"저희 화염 비늘족은 당신을 부족장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아, 역시나.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안될 거 없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도마뱀의 표현이나 표정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저거 그거지? 호감 표시.
나는 존나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 새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면 내가 도마뱀들 표정을 못 읽듯이 얘도 인간들 표정을 못 읽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듣지 않았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녀는 겨울의 처녀만큼이나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숙였다.
"인사를 드리는 것도 잊고 용건만 말씀 드렸군요. 살로메라고 합니다. 이 화염 비늘족의 제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왠지 웃는 것 같은 도마뱀의 얼굴에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부족의 도마뱀들은 원래 살아가던 마을을 버려야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짓는데 들어간 수고를 생각하면 싫을만도하건데.
아마 도피 생활에 익숙하고 짓는 것 정도는 쉽기 때문일까. 심지어 이들은 오아시스가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안 어울리게 시원한 물에서 수영하는 걸 좋아한다던가. 그렇게 설명하는 살로메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후에 나는 좀 더 상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 도마뱀들의 건축 기술은 보통이 아니었다. 금세 목책을 대놨을 뿐인 요새의 벽이 사암으로 만든 돌들이 쌓아올려지고, 또 금세 방어하기 좋은 대문 같은 것도 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사는 곳이 누추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들은 어차피언젠가는 떠나게 될 이 요새에 하나 뿐인 나의 주거지를 만들어놨다.
나는 창 밖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화염 비늘족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메이 얘는 또 어딨대.
나는 나한테 흉갑을 입히고, 완갑을 조이고, 각반을 제대로 입히면서 은근슬쩍 내 복근을 문지르는 겨울의 처녀에게 물었다.
"메이 어디갔는지 아세요?"
한창 내 복부를 문지르던 겨울의 처녀가 베일을 흔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 얘도 모르면 진짜 아무도 모르는 건데.
"요즘 메이씨가 살로메씨한테 마법을 배운다고 하던데… 거길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정확히는 몰라도 짐작 가는 곳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짐작은 아마 맞갰지.
이 망할놈의 다크 판타지에서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칼라미티 사가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이적이 있었다.
하나는 권능.
4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이적이었다.
사용하는데 어떤 부담도 없고, 대가도 없어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좋은 종류의 기술이었다.
게임에서는 약간의 제약이 있긴 했지만, 그 제약은 게임 속으로 들어온 지금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또 하나는 마법.
마법은 세레나가 가지고 있던 회색 마도서처럼 대가가 빡센 종류가 있는가 하면 부족장과 싸울 때 마법을 쏘아대던 도마뱀들이 쓰던 것처럼 대가가 드물거나 없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습득이 어렵고, 게임에서는 선결 조건을 몇 개 채워야 겨우 배워서 쓸 수 있었다.
심지어 시전하는데에도 시간이 들어가니,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나는 마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게임 속으로 들어온 이상 찬밥 더운밥을 가릴 차이가 아니었다.
근데 플레이어가 마법을 배울 수 있나? 그냥 메이가 헛수고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일순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망토를 여미던 겨울의 처녀가 베일을 걷으며 내 뺨에 입맞췄다.
"…요즘 자주 그러시네요."
"저를 봐주실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요. 나름 노력해보고 있답니다."
귀엽긴.
내가 피식 웃자, 그녀는 투구를 내밀었다.
"당신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메이씨의 성취가 상당하다고 살로메씨가 말씀하셨으니 당신께서 한 번 들러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 빡대가리가?
나는 메이의 성취가 높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놀라웠고, 다른 일을 마치고 가볼까 하던 생각을 돌려 바로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메이가 되는데 내가 안될리가 없잖아?
받아든 투구를 머리에쓰고는 후드를 둘렀다.
살로메가 있는 요새 한 켠으로 가는 동안, 수많은 도마뱀과 전사, 용병, 기사들이 나를 보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기도는 으레 클리셰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구호와 무기를 두드리는 동작이 있어 시끄러웠다.
그 탓에 내가 살로메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살로메와 메이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의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며 돌아가는 화염을 보고는 놀라워 입을 딱 벌렸다.
와, 씨발 진짜 마법이네.
조금 부럽긴 했지만, 나도 배운다면 문제될 건 없었다.
"부족장 님도 오셨군요. 어서오시길."
살로메가 내게 인사했고, 나는 손짓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이게 그 마법이군요. 메이는 잘 배우고 있습니까?"
솔직히 불덩이 떠있는 게 신기하긴 한데 저게 어느 수준인지는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예, 제가 지금껏 가르친 마법사 중에 최고입니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어찌 전사로써 싸워오신 건지 모르겠군요."
어, 그정도야?
나는 놀라워 하며 메이를 돌아봤고, 메이는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활짝 웃었다.
"야만족에는 마법 교육이 없거든요. 잘 되어간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온 겁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살로메는 내 대답을 재촉하는지 눈을 깜빡였다.
"제게도 마법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살로메는 좀 어두운 낯빛… 아니, 비늘빛? 을 띄며 곤란해했다.
뭔데? 뭐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일인전승 그런 건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 권능을 습득하신 대전사께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전해집니다."
…엥, 그럴리가.
게임에서는 겨울의 해방자가 마법과 권능을 모두 써재끼는데.
"에이,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알려주시죠."
그녀는 도마뱀임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다면 간단하게,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부터 알아봅시다. 기초 중의 기초로…."
그녀는 머뭇머뭇 다가와 내게 설명했다.
"대전사이시니 익숙하실테지만, 내면에 침잠한 영혼에게 진언해서 마법을 불러내야 합니다. 본래라면 마법은 그렇습니다만… 대전사님께서는 어떨지 알 수 없으니 마법의 발현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오, 본격적인데.
뭔가 주문 같은 걸 외우는 걸까 싶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을 향하게 하고는 건틀릿을 벗겼다.
"내면에 내리쬐는 태양을 떠올리시고, 그 태양빛을 그러모아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걸 연상해보세요. 그리고 권능을 쓰실 때처럼 영혼에게 그리 하라고 명령하세요."
쉬운데?
메이가 쉽게 배울만도 했다. 현대인이라면 원리를 좀 아는 것도 있고, 지식도 있으니 현상을 상상하기 쉬울테니까.
이러면 껌이지.
나는 대마법사 주현성이라고 불리우는 미래를 문득 떠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태양을 상상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태양상상도 같은 걸 상상하며 그 화염이 내 손 안에서 그러모아져 구체가 되는 걸 상상했다. 그리고 권능을 쓰는 것처럼 내면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뭔가 치솟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오, 씨발 개껌인데?
나는 눈을 떴고, 그러자.
퍼엉!
"으악!"
내 손바닥이 씨발 갑자기 폭발했다.
그렇게 심한 상처도 아니고 약간 살갗이 찢어진 정도였지만, 솔직히 존나 놀랐다.
나는 살로메를 보았고, 살로메는드물게 눈을 존나 크게 뜨고 있었다.
"…성공인가요?"
마법 한 번 배우기 빡세네.
"아뇨, 실패이십니다."
씨발 실패라고?
나는 공연히 찢어진 손바닥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꼬라봤다.
"…왜 실패한 건가요?"
살로메는 나보다 더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 대전사님의 체내에 있는 권능들이마법을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그 탓에 마법을 형성하자마자 반발이 일어나 손바닥이 찢어진 거겠죠…."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저는 마법을 못 쓴다는 얘기인가요?"
"예, 정확합니다."
풋.
메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렸고, 나는 저 짱깨의 손바닥 위에서 타들어가는 화염구를 보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마법 고자라니.
내 절망감은 메이의 웃음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