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여름의 도살자 (50/274)



〈 50화 〉여름의 도살자

그녀가 나를 이끌어 안내한 방은, 3m가 넘는 거구가 쓰기엔 지나치게 작은 방이었다.
딱 리자드맨 평균치 정도 될 법한 놈들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방.
나는 그 방의 정체에 대해 듣고는 솔직히 좀 놀랐다.

"이게  부족장의 방이라고요?"
"예, 전임 부족장이 쓰던 방입니다."
"근데 이 정도 크기의 방이라면 못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녀…라고 해야할  조신한 암컷 도마뱀 마법사는 침울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그 약 때문입니다."

약?
내가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길래,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고는 물건을 훑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먼지가 쌓여있는 가구들에서는 기묘하게도 손을  흔적이 있었다.

"어느날… 저희 정찰대들이 사람 하나를 데려왔습니다. 그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가면으로 가리고 전신을 두르는 로브를 입었는데, 너무 큰 화상을 입어 가면과 로브를 벗기를 주저한다고 했었습니다.  오라버니이자 부족장이신 로미어는 그에 관대하게 가면을 벗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그 뿐만이 아니라 식량과 치료 역시 제공해주겠다고 했었죠."

오, 그런 새끼로는  보였는데.
그냥 미친 새끼로만 보였지.

"그에 그 떠돌이는 감사의 표시로 전사의 영약이라는 걸 3 병, 건넸습니다. 안에 든 액체는 반투명한 흰색이었고, 언뜻 무해해보여 오라버니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었습니다. 심지어 한 병은 그 자리에서 들이키기까지 했죠. 저는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거겠지.
얼추 듣기로는 호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됐겠군요."
"예… 오라버니는 빠르게 몸집이 부풀었고, 곧이어 성격도 흉포하게 변했습니다. 저희는 뒤늦게라도 그 떠돌이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암컷 도마뱀의 침통한 목소리에 대충  일인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봄의 순례자가 이렇게 영악한 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에는오라버니께서는 여름이 계시를 내렸다며 전사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뒤는 대전사님도 아시는대로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대충 정리했다.
그러니까, 봄의 순례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장을 손에 넣고자 했고 그 도구로 부족장을 채택했다.
부족장은 그에 호구처럼 넘어가 봄의 순례자가 되었고,  결과 나한테 죽었다.


심지어 고깃덩이가 됐다.
이거 존나 미안한데.

"오라버니께서는… 돌아가셨습니까?"
"…예, 선택권이 없더군요."

 말에 그녀의 큼직한 파충류 눈알에서 눈물이 또륵 떨어졌다.
파충류도 울 수 있나?

"그렇다면 부족장은 공석이군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뭐 내부적인 문제라도…."
"아뇨, 그런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이 부족장을 겸임할 수는 없고, 제가 부족을 잘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어깨를  내리며 슬픈 표정을 짓는 도마뱀에게 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애완동물이 기죽은 채로 낑낑대는 것 같았다.
근데 이 새끼가 은근슬쩍 나를 꼬라보는 게 뭔가 묘했다. 씨발설마….

"저희 화염 비늘족은 당신을 부족장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아, 역시나.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안될 거 없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도마뱀의 표현이나 표정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저거 그거지? 호감 표시.
나는 존나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 새끼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면 내가 도마뱀들 표정을 못 읽듯이 얘도 인간들 표정을 못 읽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듣지 않았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녀는 겨울의 처녀만큼이나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숙였다.


"인사를 드리는 것도 잊고 용건만 말씀 드렸군요. 살로메라고 합니다. 이 화염 비늘족의 제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왠지 웃는 것 같은 도마뱀의 얼굴에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부족의 도마뱀들은 원래 살아가던 마을을 버려야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짓는데 들어간 수고를 생각하면 싫을만도하건데.
아마 도피 생활에 익숙하고 짓는  정도는 쉽기 때문일까. 심지어 이들은 오아시스가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어울리게 시원한 물에서 수영하는 걸 좋아한다던가. 그렇게 설명하는 살로메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후에 나는 좀 더 상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 도마뱀들의 건축 기술은 보통이 아니었다. 금세 목책을 대놨을 뿐인 요새의 벽이 사암으로 만든 돌들이 쌓아올려지고,  금세 방어하기 좋은 대문 같은 것도 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사는 곳이 누추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들은 어차피언젠가는 떠나게 될 이 요새에 하나 뿐인 나의 주거지를 만들어놨다.
나는 창 밖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화염 비늘족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메이 얘는 또 어딨대.
나는 나한테 흉갑을 입히고, 완갑을 조이고, 각반을 제대로 입히면서 은근슬쩍 내 복근을 문지르는 겨울의 처녀에게 물었다.


"메이 어디갔는지 아세요?"


한창 내 복부를 문지르던 겨울의 처녀가 베일을 흔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 얘도 모르면 진짜 아무도 모르는 건데.


"요즘 메이씨가 살로메씨한테 마법을 배운다고 하던데… 거길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정확히는 몰라도 짐작 가는 곳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짐작은 아마 맞갰지.
이 망할놈의 다크 판타지에서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칼라미티 사가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이적이 있었다.


하나는 권능.
4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이적이었다.
사용하는데 어떤 부담도 없고, 대가도 없어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좋은 종류의 기술이었다.
게임에서는 약간의 제약이 있긴 했지만,  제약은 게임 속으로 들어온 지금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또 하나는 마법.
마법은 세레나가 가지고 있던 회색 마도서처럼 대가가 빡센 종류가 있는가 하면 부족장과 싸울 때 마법을 쏘아대던 도마뱀들이 쓰던 것처럼 대가가 드물거나 없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습득이 어렵고, 게임에서는 선결 조건을 몇 개 채워야 겨우 배워서 쓸 수 있었다.
심지어 시전하는데에도 시간이 들어가니,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나는 마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게임 속으로 들어온 이상 찬밥 더운밥을 가릴 차이가 아니었다.
근데 플레이어가 마법을 배울 수 있나? 그냥 메이가 헛수고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일순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망토를 여미던 겨울의 처녀가 베일을 걷으며 내 뺨에 입맞췄다.

"…요즘 자주 그러시네요."
"저를 봐주실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요. 나름 노력해보고 있답니다."

귀엽긴.
내가 피식 웃자, 그녀는 투구를 내밀었다.


"당신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메이씨의 성취가 상당하다고 살로메씨가 말씀하셨으니 당신께서   들러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빡대가리가?
나는 메이의 성취가 높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놀라웠고, 다른 일을 마치고 가볼까 하던 생각을 돌려 바로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메이가 되는데 내가 안될리가 없잖아?
받아든 투구를 머리에쓰고는 후드를 둘렀다.

살로메가 있는 요새 한 켠으로 가는 동안, 수많은 도마뱀과 전사, 용병, 기사들이 나를 보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기도는 으레 클리셰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구호와 무기를 두드리는 동작이 있어 시끄러웠다.
그 탓에 내가 살로메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살로메와 메이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의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며 돌아가는 화염을 보고는 놀라워 입을 딱 벌렸다.
와, 씨발 진짜 마법이네.
조금 부럽긴 했지만, 나도 배운다면 문제될 건 없었다.

"부족장 님도 오셨군요. 어서오시길."


살로메가 내게 인사했고, 나는 손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이게  마법이군요. 메이는 잘 배우고 있습니까?"

솔직히 불덩이 떠있는  신기하긴 한데 저게 어느 수준인지는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예, 제가 지금껏 가르친 마법사 중에 최고입니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어찌 전사로써 싸워오신 건지 모르겠군요."


어, 그정도야?
나는 놀라워 하며 메이를 돌아봤고, 메이는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활짝 웃었다.

"야만족에는 마법 교육이 없거든요.  되어간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온 겁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살로메는 내 대답을 재촉하는지 눈을 깜빡였다.

"제게도 마법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살로메는 좀 어두운 낯빛… 아니, 비늘빛? 을 띄며 곤란해했다.
뭔데?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일인전승 그런 건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 권능을 습득하신 대전사께서는 마법을 사용할  없다고 전해집니다."

…엥, 그럴리가.
게임에서는 겨울의 해방자가 마법과 권능을 모두 써재끼는데.


"에이,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알려주시죠."

그녀는 도마뱀임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다면 간단하게,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부터 알아봅시다. 기초 중의 기초로…."


그녀는 머뭇머뭇 다가와 내게 설명했다.

"대전사이시니 익숙하실테지만, 내면에 침잠한 영혼에게 진언해서 마법을 불러내야 합니다. 본래라면 마법은 그렇습니다만… 대전사님께서는 어떨지  수 없으니 마법의 발현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오, 본격적인데.
뭔가 주문 같은 걸 외우는 걸까 싶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을 향하게 하고는 건틀릿을 벗겼다.


"내면에 내리쬐는 태양을 떠올리시고, 그 태양빛을 그러모아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걸 연상해보세요. 그리고 권능을 쓰실 때처럼 영혼에게 그리 하라고 명령하세요."

쉬운데?
메이가 쉽게 배울만도 했다. 현대인이라면 원리를  아는 것도 있고, 지식도 있으니 현상을 상상하기 쉬울테니까.


이러면 껌이지.
나는 대마법사 주현성이라고 불리우는 미래를 문득 떠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태양을 상상했다. 언젠가  적이 있는 태양상상도 같은  상상하며  화염이 내 손 안에서 그러모아져 구체가 되는 걸 상상했다. 그리고 권능을 쓰는 것처럼 내면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뭔가 치솟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오, 씨발 개껌인데?
나는 눈을 떴고, 그러자.

퍼엉!

"으악!"

내 손바닥이 씨발 갑자기 폭발했다.
그렇게 심한 상처도 아니고 약간 살갗이 찢어진 정도였지만, 솔직히 존나 놀랐다.
나는 살로메를 보았고, 살로메는드물게 눈을 존나 크게 뜨고 있었다.

"…성공인가요?"


마법 한 번 배우기 빡세네.

"아뇨, 실패이십니다."


씨발 실패라고?
나는 공연히 찢어진 손바닥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꼬라봤다.

"…왜 실패한 건가요?"

살로메는 나보다 더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 대전사님의 체내에 있는 권능들이마법을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그 탓에 마법을 형성하자마자 반발이 일어나 손바닥이 찢어진 거겠죠…."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저는 마법을  쓴다는 얘기인가요?"


"예, 정확합니다."


풋.
메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렸고, 나는 저 짱깨의 손바닥 위에서 타들어가는 화염구를 보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마법 고자라니.
 절망감은 메이의 웃음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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