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여름의 도살자
메이가 마법을 배우고, 나는 띵가띵가 놀면서 시간을 보낸게 한 2주 정도 쯤 됐다.
그간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이제 그만 놀고 일하러 갔겠지만, 세상은 나를 그렇게 얌전히 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향해 뻗어지는 흉수를 잡아채걷어차고, 걷어차인 시체가 기울기 무섭게 나는 그 머리 위로 발을 내리찍었다.
콰득!
나는 발 밑에서 흩어지는 살점에 희미한 감상을 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으깨는 것과 별 감각적인 차이는 없었다.
이게 전부 시체고,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긴 했어도 신의 장난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당연했다.
아니, 수족이라고 했던가.
그게 그거 같다. 나는 철장화 밑에 눌러붙은 뭔지 모를 조각을 손가락으로 잡아 떼냈다. 내던져진 살점에서는 철퍽소리가 울렸다.
"에휴, 씨발놈."
이 습격은 2주간 내가 요새에 머물면서 준비를 하고, 교단이 제대로 구성되는 동안 쭉 이어졌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습격에도 우리 측 피해가 경미했던 걸 생각하면 이 요새는 제대로 기동하고 있었다.
쌓아올려진 사암벽에언제든 위에서 투사체 무기를 쏠 수 있는 틈, 내부에 진입한 놈이 있더라도 화염 비늘족이 비늘에서 불꽃을 일으키고는 달려들어 불태워버리거나 메이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화염을 쏟아부어 토벌한다.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에다가가서 철장화에 화염 부여를 사용했고, 타오르는 발을 들어올렸다.
내 등뒤에서는 닫힌 대문 너머로 교단의 사람들이 부상자를 이송하거나, 성벽에 놓아둘 화살을 가져오거나 하면서 분주했다.
즉, 이 새끼가 뭔 소리를 하든 들을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헛소리 안 할테니 이번엔 부수지 말아다오."
그래서 그 시체는 그간 해오듯 가오를 있는대로 잡으면서 말하는 게 아닌, 왠지 좀 비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시야 끄트머리만을 검게 물들인 면갑 사이로 녀석을 보았다.
검은 혈관이 이리저리 내달리는, 역겨운 생김새의 인간은 얼굴마저 부패했는지 눈알이 희게 멀어있어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 허공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얼굴을 지그시 보고 있으니, 봄의 순례자는 제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조잘댔다.
"제안이다. 네가 궁금해할 정보도 있으니 들어보고 결정해라."
평소라면 두 마디 했을 때 '스킵' 해버렸겠지만 솔직히 이 새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고고하게 매번 '너희 요새를 어쩌구' 하다가 머리에 화살 꽂히던 놈이라서 좀 측은했다.
물론 이야기를 얌전히 들어주는 이유에, 이 지리멸렬한 소모전 끝에는 패배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나는 괜찮다지만 전사들의 피로는 상당했고, 마법사들은 분투한 덕에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해봐."
"다행이군….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다. 여름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해치운 시체들은 그저 내 수족일 뿐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피해가 없고, 나는 그런 미미한 병력으로는 네 성벽을 넘지도 못하지."
서론이 길어 씨발.
나는 불타는 다리를 다시 들어올렸고, 그제서야 시체가 황급히 다시 말했다.
"진정하고 들어라! 거기서 내 제안이 있다. 너도 나도 서로를 해치우지 못하니 내가 지정하는 장소에서 서로 공평하게 붙음이 어떠냐. 일종의… 결투지."
공평은 얼어죽을.
이 빌어먹을 새끼는 지 수족을 가져왔으니 상관 없지 않냐고 한 무더기를 끌고 올테고, 나는 다룰 수 있는 몸뚱이가 단 한 개이니 나 혼자 가야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내가 유리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괜히 흥미 없다는 목소리를 가장해서 대답했다.
"내가 거기에 응할 이유가 있냐?"
시체는 내 말에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가 좆같아서 스킵하려고 하니, 녀석이 빠르게 말했다.
"수용소에 갔었던데. 거기가 왜그런 꼴이 됐는지 알고 싶지 않나? 나는 알고 있는데 말이지."
뭐야 씨발.
수용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그리 이상하진 않다. 세상 끝의 수용소는 유명하니까.
문제는 이 새끼가 어떻게 알고 있고,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건 또 어찌 아느냐다.
게다가 내가 그걸 궁금해할 거라는 건 또 어찌 알고?
존나 미심쩍은데.
그런 내 생각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녀석은 말을 이었다.
"혼자 오면 알려주겠다. 그 이후에 결판을 내자."
흐음.
딱 봐도 함정이긴 하다.
분명 뭔 짓거리를 할 건 분명했다. 혼자를 강조하는 걸 보면 더더욱.
하지만 걸려줄만한 함정이었다.
우선 내가 이 새끼의 하드 카운터라는 것도 있었지만, 이 새끼가 수용소에서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다면 뭐가 해방자를 죽였고 왜 죽였는지 정도도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분명 해방자를 죽인 놈은 이 게임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벽지에 있는 주인공을 죽인 놈이라면 분명 게임에 대해서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쩌면 그 새끼가 나를 이 게임에 쳐박은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즉, 이 망할놈의 다크 판타지에서 나갈 수있는 길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체에게 다가가, 그레이톰의 심판으로 썩은 고목 같은 목을 썰었다. 길 안내는 필요할테니.
"좋지. 여기서 기다려라. 준비하고 올테니."
녀석은 섬뜩하게 웃었다.
그래서 괜히 그 대가리를 발로 툭 차고는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
물론 마리암을 비롯한 교단원들은 내 결정에 반대했다.
내가 죽으면 교단 꼴이 말이 아니게 되는데다 자기들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테니 당연하긴 하겠지.
겨울의 처녀는 내게 무운을 빈다며 직접 만든 물약을 쥐어주기까지 했지만, 메이는 그와 다르게 또 펑펑 울었다.
내가 또 드라마틱한 희생이라도 하는 건줄 알았던 모양이었는지 한참이나 울면서 나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나한테 의존하게 된 건지.
그래서 나는 괜히 '유사시에 여길 맡길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다.' 라는 말로 녀석을 달래고 쓰다듬어줬다.
녀석은 그렇게 나의 열렬한 케어 하에 눈물을 그쳤고,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꼭 돌아와야 한다고 내 손을 꼭 잡아주기까지 했다.
자기 방패까지 건네주려고 하길래 말려야 하긴 했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 숲속에 있었다.
생명의 흔적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숲.
내가 옆구리에 매단 대가리가 폐도 없이 성대로만 말하는 길을 따라가다보니 나온 곳이었다.
근데 씨발 이 새끼는 어떻게 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 대가리가 말했다.
"여기서 쭉 직진이다."
직진이라.
숲이 너무 울창해서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딱 봐도 함정인 만큼 뭔 짓거리를 할텐데.
"여기라고?"
봄의 순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가 봄의 영역과 유사하긴 하다.
숲이고, 나무들은 죄다 뒈져있어서 을씨년스럽고.
하지만 유사할 뿐, 봄의 영역과는 뭔가 많이 달랐다.
대표적으로는 게임에서는 아무런 생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던 봄의 영역과는 다르게 약하게 생명의 흔적들이 남아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더 전진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캠프를 펴겠다고 봄의 순례자에게 선언했고, 이 씹새는 '좋을대로 해라.' 라면서 조용해졌다.
나는 죽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고, 그 불을 쬐면서 걸터앉아 음식물을 위에 밀어넣었다.
존나 쓴맛이 나는 고기였다. 심지어 씹기도 힘들고.
긴 여정이 되진 않았겠지만 요새에 남은 휴대 식량은 이것 뿐이라 툴툴대도 별 수 없었다.
나는 빠르게 육포를 아가리에 밀어넣고는 물을 때려박았고, 이 씹새가 뭔가를 보내와서 내 머리를 쏘기 전에 도로 투구를 썼다.
"정말 여기 맞냐? 뭔가 상상하던 거랑 다른데."
나는 대가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걸어왔던 말들에 대답하지 않는 게, 굳이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나는 한참 조용한 머리를, 정확히는 그 뒷통수를 내려다봤다.
그 머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마.
나는 황급히, 대가리가 물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머리를 잡아채 들여다봤다.
그 시체의 대가리에는 돋아있어야 할 검은 혈관이 싹 사라져 있었다.
봄의 순례자가 이 시체와의 연결을 끊어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자면.
"이 씨발새끼가…!"
그 대가리를 던져버리고, 바로 자리를 박쳐 내달렸다.
불이 피워진 자리를 향해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내가 몸을 비틀며 내던지자 그 자리에 무언가 내리꽂혔다.
콰아앙!
흩날리는 나무 파편과 송진이 썩은 냄새.
나무였다. 나무가 뽑아져 원형 그대로 날아왔다.
이 씨발놈이 나를 속여?
알고서 속아준 거였지만, 막상 속으니 빡쳤다.
내 분노를 연료로 거력이 타올랐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나는 그 거력에 몸을 맡겨 튕겨지듯이 직립했고, 발 밑에서 땅이 꾸드득하는 소리를 냈다.
"이리나와 이 씹-새-끼-야!!!"
내가 폭군의 검을 뽑아들며 화염 부여를 사용하자, 횡으로 든 검날을 타고 화염이 타올랐다. 수십의 나뭇잎이 타올라 흩날렸다.
그 순간 보았다.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죽은 나무를. 나는 그에 도망치지 않고 다리를 벌렸다. 양손으로 잡은 폭군의 검이 이글거리며 타올랐고, 나는 정확한 때를 노려 칼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폭군의 검에 부딪힌 나무는 부숴졌으나 그 흩날리는 파편 사이로 무언가 나를 향해 치달아 왔다.
양손에 처음 보는 해괴한 쌍검을 든 새끼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나는 이미 폭군의 검을 휘두른 상태였다는 거다.
이 새끼한테 칼을 박기엔 내 칼날은 저만치에 있었다.
좆됐네.
그때 내 머릿 속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회색의 주인이었다.
정확히는 그 틀딱이 나한테 썼던 공격 방식을, 그 검술을 떠올렸다. 칼을 아래에서 위로 휘돌려 치고, 그대로 손잡이를 뒤집어 찔러오는 독특한 공격.
뭔가 그럴 듯 했던 공격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근력이면 안될 건 없어보였다.
벌린 발을 약간 오므리고, 배와 어깨에 힘을 주어 칼날을 억지로 뒤집었다.
쿠오오오
칼날을 따라 화염이타올랐고, 거대한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콰직!
손을 내달리는 선명한 타격감.
쌍검충의 으깨진 철 투구에서 액체가 새어나왔고, 뒤이어 전신이 타올랐다.
나는 그 시체를 걷어차고는 그 시체의 등 뒤에서부터 날아오는 나무 토막을 또 다시 쳐냈다.
쩌엉!
실린 힘은 아까보단 약했으나, 여전히 맞으면 위험해보였다.
부숴진 나뭇조각이 타오르고, 그 재가 흩날리는 틈으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긴 검은 로브를 둘러 맨살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 씹새끼.
딱 봐도 난 악역이고 흑막이오, 하는 차림이었다.
이 새끼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갑주나 딱 봐도 마법사요 하는 차림을 두르고 있는 한 무리의 인간 역시 튀어나왔다. 근데 나를 둘러싼 그 형태가….
또 '포위섬멸진'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포위섬멸진이랑촉수가 국룰이냐?
나는 폭군의 검을 단단히 쥐고 로브를 두른 씹새끼, 봄의 순례자에게 외쳤다.
"약속했던 수용소에 대한 건 말 안 해주냐. 씹새끼야?"
"아,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지."
놈은 능청을 부리며 잠시 휘적휘적 걷더니 손짓했고, 그에 시체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 죽을 놈에게 입 아프게 설명할 이유는 없지 않나? 살아남는다면 고려해보겠다."
녀석은 그렇게 띠꺼웠다.
저 씹새끼 인중 꼭 때려준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시체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