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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여름의 도살자 (52/274)



〈 52화 〉여름의 도살자

쿵 쿵 쿵  쿵 쿵!


발밑에서 땅이 움푹 패인다. 내딛는 걸음마다 세상이 빠르게 나아간다.
나는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는, 그대로 도약했다.

콰아아앙!

바닥을 박차자 순식간에 시야가 치솟는다. 거센 부유감을 즐기기도 잠시,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대검을 내리찍었다.

콰드드득!


으깨지는 소리와 흩날리는 썩은 살점. 그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 하지만 놈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발정난 개새끼들처럼 달려드는 놈들에게 크게 몸을 돌리며 대검을 때려박았다.


카앙!


"큭."


베여 날아가는 놈들 사이로 날아온 투창이 머리를 두드렸다.
투구를 쓰고 있던 탓에 뒈지진 않았지만 머리가 울려 속이 뒤집혔다. 치밀어오르는 신물을 억지로 삼키며 대검으로 몸을 가렸다.


카앙, 카앙!

그 위로 쇄도하는 압박감.
이대로 다 막아낼 수는 없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튕겨내 죽은 나무뒤로 몸을 숨겼다.


콰악, 우드득!


금세 벌집이 되어가는 나뭇결 위로 수줍게 창날이 비집어 나왔다.
씨발, 존나 많네 진짜.

싸움은 고착된 상태였다.

 염병할 놈들의 산송장 새끼들은 대부분이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인간형이었고, 난 그 탓에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억지로 좁히려고 하면 근거리무장과 단단히 갑주를 차려입은 탱커 새끼들이 내 길을 막아댔다.
그걸 상대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면 아까처럼 투창, 화살, 볼트 따위가 날아와 내 몸에 꽂히려고 했고.

준비 한 번 철저하게 했네.
이미 몇 번의 요새 침공을 겪은  봄의 씹새끼는 내가 원거리 공격 수단이 거의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탓에 철저하게 원거리 공격으로 나를 압박해 말려죽일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저런 새끼는 PVP할 때에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한 손에 원거리 무기와 빠른 근거리 무기를 들고 때리다가 거리를 벌리면 원거리 무기로 압박해 말려죽이는 게, 정확히 그런 놈들이랑 비슷했다.

자의적으로 그런 방식을 택하는 새끼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존나 얍삽하다는 거다.
나는 울리는 머리를 투구를 두드려 멈추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좋아, 어떻게 상대한다?


기억을 더듬는데, 몇 개의 창날과 도끼가 날아와 나무에꽂혔다.
가늘게 흔들리는 창날이 지리게 섬뜩했다.
그래도 이 나무가 버텨줘서 다행….

기이익

아, 씨발.
벌집이 된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고마웠다 나무야.
나는 나무의 밑동에 손을 얹고는, 단단히 쥐어 뜯어냈다.

꾸드드득

들이킨 숨을 따라 내 팔근육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투창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무를 던졌다.

쿠오오오오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나무에서는 굉음이 울렸고, 그에 시체들이 뒤늦게 반응했으나 때는 늦었다.

콰자자자작!

깔린  명의 시체들이 산산히 파괴되었고, 나는 그 충격에 밀려나는 시체들에게 돌진했다.
나를 막아세우고자 몇 전사들이 나에게 쇄도했으나, 폭군의 검은 문제 없다는 듯 달려오던 놈을 날려버렸다.


급조한 계획은 간단했다. 갑주와 거인의 힘에 새로 생겨난 재생빨을 믿고, 육탄 돌격해서  밀어버린다.
단순무식한 계획이지만 내가 명사수가 아닌 이상 나무를 던지는 걸로 전멸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단순무식하게 간다.

"으아아아아아!!!"

그래서 나는 나를 쏘아냈다.
뻗은 앞차기에 시체가 날아가 나무랑 부딪혔고, 나는 내 위로 쓰러지는 나무를 대검으로 쳐냈다.


쩌엉!

귓전을 우레처럼 강타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불타는 나무.
원거리 씹새들은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게 내가 노리는 바였다.

일단  놈!

내 쪽으로 다가오던 투창을 든 새끼의 머리부터 고간까지를 가르며 때려박혀진 폭군의 검이, 후두둑 떨어지는 내장을 빗겨낸 채로 타올랐다.
망설임 없이 집어든 투창을 단단히 쥐고는, 그대로 멀리서 도망가던 놈한테 던졌다.


투쾅!


아, 씨발 빗나감!

창은 던져본 적이 없어서 조준은 병신이었고, 날아간 투창은 도망치는 새끼 바로 옆의 나무를 꿰뚫었다.
마치 대포가 내리꽂힌 듯한 소음과 함께 기우는 나무.
산송장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쥐포가 되었다.


어쨌든 둘.


나는 바로 내게 쇄도하는 전사를 상대하면서, 전사의 목덜미를 붙잡고 화염 부여를 사용한 순간 떠올렸다.
이 화염 부여의 불꽃은 내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옮겨붙은 불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씨발, 이걸 나한테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존나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나는 바로 갑주에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화아아아아악!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은 내 갑주를 타고 올라 주변을 밝혔고, 나는 인간 횃불이 된 기분으로 바로 근처의 시체에게 돌진했다.

콰직!


그리고 죽빵.
꽂은 죽빵에 시체가 불타올랐고, 바로 다음 타겟을 찾았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놈들을 망설임 없이 불태우면서 나아갔다.



*


'이게 무슨….'


봄의 순례자는 드물게 당황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은 가볍지 않았고, 그동안 숱하게 많은 전사와 모험가를 봐왔다.

지금 데려온 전사들만 하더라도 그랬다.
이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용병단으로, 충실한 구성과 뛰어난 용력, 훌륭한 장비를 가지고 있어 여름을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병기로 남겨두었던 병력이었다.
그런만큼 고작 대전사 따위를 상대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오산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으면서 자신의 병력을 깨부수는야만인을 보면서 당혹감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무슨 위력이란 말인가.
심지어 전신에 두른 화염.
천성적으로 화염과 친하지 못한 자신이라고는 하지만, 전신과 칼에 화염을 두른 채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깨부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무슨 전사란 말인가. 역시 그때 죽여뒀어야 했다.'


이들이 오아시스에  근거지를 공격했을 때, 걸레짝인 모습에 굳이 잡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작업에 착수했건만.


봄의 순례자의 당혹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숲 전체로 뻗어난 감각이 위험을 알려왔다.


"윽…!"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날아온 나무를 잡아챘고, 바로 옆으로 흘려냈다.

콰아아앙!

내어지는 폭음. 하지만 한 숨은 돌렸다. 여기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있을 정도라면 슬슬 도망치는  맞다.
하지만 흩날리는 썩은 송진과 불똥 사이로, 주현성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 화염을 두른 채, 단단히 쥔 폭군의 검을 휘두르면서.

'위험하다. 방어를…!'

여기서 이 개체가 죽으면 숲에대한 제어를 상실하게 된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 일념 하에 권능을 끌어올리고, 그 권능으로 증폭된 근력으로 팔을 들어올려방어했다.
타이밍 좋게 폭군의 검에 둘러진 화염이 거둬졌지만, 그렇다고 충격량마저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쩌어어어엉!

금속을 으깨는 듯한 소리와 함께, 봄의 순례자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쾅!
콰아앙!
콰드드득!

나무들을 부수며 인간 대포처럼 쏘아진 시체가 부러진 팔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 앞에는 주현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병력은 없었다.




*

"역시 여름의 대전사군. 미친놈처럼 싸우는   그놈 수준이야."


와, 이걸 막네.


나는 폭군의 검을 등에 짊어지고, 주먹을 말아쥐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로브 위로도 선명히 보이는 부상.
시체라서 부상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뭐 어때.
인중 딱 대.
나는 예정했던대로 말아쥔 주먹을 그 새끼의 아가리에꽂았다.

투콰아악!

"크으윽…!"


내 주먹이 꽂힌 가면이 산산히 부숴지고, 녀석의 흉하게 박살난 아가리가 덜렁거렸다.
거인의 힘이 실린 주먹은 녀석을 바닥에 쳐박아버렸고, 푹 패인 구멍 안에서 그놈은 고통을 참아내면서도 나를 꼬라보았다.


"…와, 얼굴 씹극혐이네."


무슨 건포도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미라라고 하나 이런 걸?
내 감상에도 녀석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힘을 주어 밟았다.


으드드득!


아, 반대쪽도.


콰지직!

"미친놈…."


녀석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는데, 딱 봐도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나도 내가 좋아.

녀석의 머리를 잡아 자세히들여다봤다.

헌데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썩어도 화신(化身)정도는 데려왔을 거라고생각했는데, 화신은 커녕 권능이 좀 들어간 송장이었다.


잡았던 머리채를 놓자, 녀석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네놈, 여름의 대전사가 아니군? 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 밖에 보이지 않는 반응이었어."

나 투구 쓰고 있는데 뭔 반응.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녀석은 웃었다. 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네 몸 안에 있는 내 권능은 죽어있지만, 여전히 내가 널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아, 그런 거냐.
그럼 느금마다 씨발놈아.


내가 다시 주먹을 말아쥐자, 녀석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굳이 대답해줄 이유는 없지만, 나는 최대한 멋진 대사를 치고 싶었다.
그래서 구라를 쳤다.


"내가 겨울의 해방자다."


…그러자 봄의 순례자는 기이하게도 침묵했다.
내가 그 침묵을 의아해하자, 녀석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당황과 어이없음이었다.

뭔데?


"겨울의 해방자라고? 그럴리가 없다."


씨발 이 새끼도 인종차별인가?
나는 야만인은 겨울의 해방자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주먹을 날릴 것 같길래, 주먹을 다른 손으로 잡아 막았다.

"그놈은 내가 죽였으니까."


좋아, 파이어 펀치 각.
이 아닌데?
뭐라고?


"…뭐?"

겨울의 해방자를 이 새끼가 죽였다고?


"모르고 말한 건가? 어이 없는 놈이군."

녀석은 마치 멸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괜히 빡쳐서 그 인중에 다시 한 번 주먹을 꽂았다.


"크윽… 야만인놈… 좀 얘기를 들어라."


내가 멱살을틀어쥐고 들어올리자, 녀석이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대답이나 해, 구더기 새끼야. 왜 수용소를 부쉈지?"

이 새끼가 수용소를 안 부수고 겨울의 해방자만 죽였다던가  가능성은 낮았다.
겨울의 해방자를 죽인 방식과 지역 보스인영락한 거인목을 죽인 방식, 병기고의 간수 시체의상흔은 무척이나 닮아있었으니까.


봄의 씹새끼는 내 질문에 검은 피를 주륵 흘리면서 대답했다.


"간단하다. 이 세상이 준비한 비수가 바로 그놈이니까."


그건 내가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었다.
내가 예상했던 건, 이 게임에 나와 메이를 끌고 온 어떤 씹새끼가 얘한테 겨울의 해방자의 존재를 알려줬다는 그런 사실이었다.
찾아내기만 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실마리.


나는 맥이 풀려 녀석의멱살을 놓았고, 녀석은 다시 구덩이에 쳐박히면서도 끌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그럼 내가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어리석은 놈. 게다가, 나는 이미 약속했던 건 모두 알려줬―"

콰직!

나는 녀석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똥내나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 주먹이 다시 녀석의 광대를 으깨고, 거의 다 쪼개진 얼굴로 녀석은 웃었다.
씨발놈.


"내가 널 살려둘 이유도 없겠네."

건틀릿을 낀 손아귀로 녀석의 목을 틀어쥐고, 내면에서 화염 부여를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부르짖었다.


"딱 기다려라, 씨발놈아. 내가 반드시 조지러 갈테니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놈과 내가 눈을 마주쳤다.


퍼석!


움켜쥐자 몸이 다 타버린 숯덩이처럼 쪼개졌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화신(化身)은 아니지만 대전사 정도는 됐는지 내면 속으로 무언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는 거였다.

나는 눈 앞에 떠오르는 메세지를 보며 긴장이 탁 풀리는  느껴졌다.
거인의 힘이 풀려서 탈력감이 밀려오는  그와 동시였다.

[봄의 대전사를 죽여 권능 - 영원의 정신을 획득합니다.]

"씨발."

게임에서는 한 번도  적 없는 권능을 얻었음에도, 기분은 좋지 못했다.
여전히 집은 멀었고, 나는 여전히 다크 판타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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