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여름의 도살자 (53/274)



〈 53화 〉여름의 도살자

돌아오는 길에는 시체가 쌓여있고, 숲은 한층 더 생명을 잃어 이제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봄의 순례자를 족쳤다고  꼬라지가 된 걸 보면, 여기가 봄의 본진은 아니더라도 앞마당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요새까지 계속됐다.
나는 병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요새로 들어섰고,기사단장을 비롯한 중책들은 나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기사단장의 표정에 걱정이 일었다.
다 늙은 사람 걱정시키는 것도  짓은 못 되는데.

나는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우고는 씩 웃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 새끼 개좆밥이더군요."

물론 내가 하드 카운터라서 그런 거지만…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이들이 놀라워했다.

"혼자서 요새에도 대적할 수 있는 봄의 순례자를 처리하시다니… 굉장하십니다!"

이들은 나의 위업을 칭송했지만 녀석을 완전히 쓰러트린 것도 아니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이들을 멈춰세웠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봄의 순례자 역시 4신 중 하나. 저희가 섬기는 여름의 도살자께 버금가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쓰러트린 것 역시 그의 본신이 아니니,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그 말에 산적이 파리한 안색으로 허어, 하는 탄식을 흘렸다.
기사단장은 진중한 표정으로 제 턱을 짚었다.  고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놈의 병력 대다수는 시체로 돌아갔고, 녀석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잃었습니다. 다시 여기까지 오려거든 접경지의 숲을 제 손 아래에 넣으며 전진해야 할텐데,  속도는 굉장히 느릴 겁니다. 저는 그 전에 여름께 가야합니다."

기사단장이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어째서 여름께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어, 씨발.
실수했다.  여름한테 가려고 하는 건지 설명을  적이 단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나는 굳은 표정의 기사단장을 보면서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완전한 대전사가 아닙니다."


기사단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내면의 사이비를 최대한 불러일으켰다.
내게 힘을 빌려줘, 온 세상의 사이비들아!

"저희는 마지막 영원한 성전을 기다리고 있고, 저는 오직 마지막 투쟁만이 남았습니다. 여름께 제 강함을 증명하고 진정한 그의 사도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게 제가 저  야만의 땅에서 성지까지 찾아온 이유입니다."

기사단장은 그제서야 탄복했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안도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뒤에 여러분들을 이끌고 신천지로 가겠습니다. 그 전에, 제 마지막 시련을 위한 준비를 해주십시오."

기사단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달려나갔다.


"어휴… 좆되는 줄."

 주변이 싹 비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물론 싸워서 안될 건 없는데, 인간을 죽이는 건 역시 아직 부담이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수가 많은 병력을 상대로 단순히 화염과 신체능력만으로 밀어붙이기엔 곤란했고.
무엇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랑 하하호호 했던 사람들을 죽인다니, 할 짓이 못됐다.

나는 최선을 다 한 거라고 합리화했다.
그러는 나에게 메이가 다가왔고, 나는 사이비 아니라고 말하려 등을 돌렸다.
하지만 메이의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는 아가리를 닥쳤다.

"…왜 그래?"
"있잖아. 이번엔 나도 같이 싸우게 해줘."


응?
 예상했던  아니지만, 괜찮을까.
메이는 살로메에게 마법을 배웠고, 그런 걸 감안하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모두 화염일텐데.

"너 화염 마법 외에 쓸 수 있는 마법은 있냐?"
"없어. 화염 밖에 못 써."


그럼 곤란했다.
여름의 도살자에게는 화염이 먹히지 않고, 오히려 화염을 맞으면 회복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화염은 반드시 봉인해서 싸워야 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메이는 내 손을  잡았다.
메이의 얼굴은, 어쩐지 결의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목적을 읽을 수 없어 대답을 하지 못하니, 메이는 드문드문 설명했다.

"네가 그랬잖아.이 세계는살고 싶어하는 놈부터 죽는다구. 그건 그냥 했던 말이 아니잖아."

그걸 또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한 말을 내가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이어갈 말을 기다렸다.

"네가… 네가 열심히 싸우고. 맞서는 걸 보고 있으니까…."

메이는 그 뒤의 이어갈 말을 골라내는지 한참이나 입을 벙긋거렸다.
겨우 생각을 정리했는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방해는 안 할게. 함께 싸우자. 응?"


안된다고 하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크고 맑은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 그 핵쟁이 뉴비가 맞냐?


물론 얘를 데려간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른다.
싸우러 가는 상대는 평범한 놈도 아니고, 4신  하나.
그것도 투쟁과 생명을 관장하는 전사신인 여름의 도살자니까.
자칫하면 죽을 수도있다.
아니, 이 빌어먹을 다크 판타지 세상이라면 패배자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 뿐이다.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차라리 단숨에 죽으니 다행이겠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무게가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눈동자에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왠지 후회할  같은데, 그렇더라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지금껏 싸워온 방식을 되새기면 목숨이 위험하니 뒤에 짜져있으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게 좀 괴롭기도 했다.이럴  알았으면 좀 사리면서 싸우는 건데.
게다가 이 녀석이 처음으로 내세우는 자기 주장이 아닌가. 자기뜻으로 싸우려고 하는데….
결국 결론은 명확했다. 한숨이 사막의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손을 뻗었고, 녀석은 뭐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움츠려 충격에 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인중도 가렸다.
너무 때렸나?
그래서 나는 그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툭툭 두드렸다.
 손 아래에서 메이의 따스한 체온이랑 좋은 냄새가 물씬 느껴졌고, 나는  체온과 체향을 즐기면서 북슬북슬한 머리칼을 정돈해줬다.
메이는 웬일로 움직이지 않고 눈을 조심스럽게 뜨고는 얌전히 내 손길을 즐겼다.
오히려 눈을 접어 웃으면서, 내게  미소를 보내왔다.

"뭔 소리야. 우린 동료니까, 넌 당연히 나랑 같이 싸워야지."

메이는 밝게 웃었다.  미소는 왠지 천연덕스러워, 죽을지 모르는 자리에 싸우러 가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응!"

*

수송용도마뱀에 올라탄 우리는, 사막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생명의 흔적이 무척이나 드문 사막에는 위험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그 탓에 우리는 조금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메이가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자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그런 내게 기사단장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 그 인원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늙은 얼굴 위로 수심과 걱정이 떠올랐다.
하기야, 자기네 희망이자 교주, 대전사라는 새끼가 자꾸 나가서 위험을 자처하고 있으니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예, 이 사막에 도착하기 전에도 저희는 셋이서 잘만 다녔습니다."


겨울의 처녀는 내 말에 베일을 드리운 채로 조용했고, 메이는 이따금씩 잠꼬대를 뱉어내는 게 전부였다.
얼핏 보기에는 전투원은 두 명. 한 명은 보조적인 목적 밖에는 띄지 못한다. 전투원  명은 완전한 전력이라기엔 어폐가 있었고.

하지만 괜찮을 거다.
신 앞에서는 수가 의미가 없으니까.

내 미소를 보고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었고, 저 멀리서 치솟는 모래폭풍을 보면서 한숨을 뱉었다.


"부디 안전하게 시련을 마치시길 바랍니다. 이제 저희 교단은 당신 없이는 존속하지 못합니다."

확실히 그런 느낌은 있었다.
결정도 내가 하고, 사람들의 희망도 나에게 쏠려있었다.
이 멸망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오르는 불이라고 마리암은 나를 칭하기도 했었다.
신은 이들을 버렸으니.

나는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돌아오도록 할테니."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이 인근에 있는 민가에서 보초를 세워둘테니, 다 끝나셨으면 민가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금방 데리러 올 겁니다. 저희는 돌아가겠지만, 주기적으로 식량을 보내며 보초를 교대시킬 겁니다."


한 마디로  끝났을 때 즉시 픽업은 무리지만 좀 기다리면 온다는 얘기였다.
기사단장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보니 확실히 다 낡아빠진민가 같은 게 보였다. 사암으로 쌓아올린 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럴게요."


기사단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병사 몇 명을 민가로 가도록 했고, 수송용 도마뱀과대부분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투구를 뒤집어썼고, 메이는 졸린 눈을 비비다가 투구를 씌워주자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그대로 걸었다.
게임에서는 로딩과 함께 바뀌었을 풍경이, 우리가 걸음에 따라 차차 화산으로 바뀌었다.
정확히는 사막과 화산의 경계가 애매했다.
이따금씩 쌓인 모래는 화산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녹아내렸고, 나는 그걸 한참 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 멀리에 치솟은 붉은색 바위로 된 산과, 그 제일 꼭대기에 있는 분화구.
언뜻 웅장한 풍경은 이따금씩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용암으로 인해 퇴색되었다.
잿빛으로 물들어있는 세상은 그야말로 여름의 도살자라는 이름에 걸맞는 장소였다.


"으… 더워."

메이는 더워하면서도  손을 꼭 잡았고, 나는 그런 메이를 이끌면서 겨울의 처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겨울님은 안 더우세요?"

겨울의 처녀는 내 질문에 고개를 느긋하게 내저었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다른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조금 힘들었는데, 당신의 손을 잡으니 좀 괜찮아졌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부디 자신의 몸부터 챙겨주세요."

아,  상냥함.
그녀는  반응을 눈치챘는지 입을 가리며 웃었고, 베일 속에서 표정을 숨긴 채로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이걸 받아주세요."
"이건…."


그녀가 내미는  창백한 겨울처럼 푸른색의 겉면을 타고 한기가 잔잔히 흐르는, 조금 기묘하게 생긴 돌이었다.
처음에는 뭔지 알 수 없었는데, 나는 이걸 봤던 기억이 있음을 떠올렸다. 이거 씨발 설마?

"빙결석이군요!"


이걸 어디서 났대?
안 그래도 없어서 아쉽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원래 가지고 있었답니다. 당신께서 필요로 하지 않아서 가지고만 있었지만… 지금 당신께서 싸우시는 적은 화염을 사용하는 것 같아 꺼내봤습니다."


그녀는 이걸 수용소에서 주웠다고 했고, 나는 빠르게 납득했다.
죄수 중에 화염 마법사가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 놈들 상대하려면 필요하겠지.

이 기특한 여자를 어떻게 한다?
나는 빙결석을 챙겨 도구낭에 밀어넣고는 빈 손으로 그녀의 뺨을 슥슥 문질러줬다.
겨울의 처녀는 내게 얌전히 제 뺨을 맡긴 채로 말했다.

"당신께서 뭘 하려는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분들께는 거짓말을 하셔야 했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어우, 기특하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잡았고, 나는 그녀의 탄력 있는 뺨을 한참 주무르다가 놓았다.
겨울의 처녀는 아쉬운지 그런 내 손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럼 가볼까요? 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겨울의 처녀는 거부하지 않았고, 메이는 더워서 정신을 반 쯤 놓다시피 한지라 거부할 기색도 없었다.
잠시 뒤, 메이는 결국 겨울의 처녀의 등에 업혔다.
우리는 그렇게 화산지대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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