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여름의 도살자 (54/274)



〈 54화 〉여름의 도살자

화산은 그렇게 넓은 지역이 아니다.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물론 2회차에다 이 말같지도 않은 다크 판타지 특성상 뭔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지만 완만한 구릉에는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메이는  뒤에 딱 붙어서 걸으면서도 칼을 뽑지 않았고, 나도 투구를 고쳐쓰기만 하고 장검에는 손도 가져가지 않았다.

구릉은 점차 완만해지다 평지가 되었고, 잘 깎인 화산의 암석은 붉은색을 띄었다.
 붉은 건지 나는 지질학적 지식이 없어서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저 앞에 서있는 거대한 신전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원래라면 여름의 도살자 보스전은 주변이 타오르는 분화구 인근에서 치뤄질텐데… 저 신전은 도대체 뭐지?


 의구심을 읽었는지 메이는 불안한 모습으로 주변을 기웃거렸고, 겨울의 처녀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들 동의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단단한 걸음으로 바닥을 딛어 신전으로 들어섰고, 그리스식 신전 엇비슷한 양식을 띄는 건물은 우리를 아무런 저항 없이 안으로 들였다.
안으로 들어섬에 따라 점차 밝고, 더워졌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내 코끝을 간질여 괜히 코가 시큰거릴 무렵, 나는 어둑한 신전의 복도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건 좀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구조였다.

"…콜로세움?"

무슨 로마 영화에서나 봤던 콜로세움이었다.
관객석은 비어있고 4방향에 철창으로 이뤄진 출입구가 존재하는 콜로세움은 그 목적에 충실한듯 벽에 피가 말라붙어 있거나 했다.
그리고  중심에, 내 이목을 잡아끄는 새끼가 있었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개의 뿔, 호박색으로 타오르는 선명한 눈동자. 짧게 친 머리칼이 검게 빛나는 남성.
어깨에 짊어진 도끼에서는 아직도 화염이 타올랐고, 갑주의 색은 스스로 빛을 내는지 층층이 진 화염을 흩날렸다.

"왔구만."

여름의 도살자.
4신 중 하나이자 전사신, 고대의 도시를 습격한 드래곤에게 화염을 선사한 장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 이 씹새끼야."

내 말에 메이가  옆구리를 통 쳤고, 나는 개의치 않고 녀석을 째려봤다.

"여전히 입이 걸걸하구만. 그래, 그게 전사의덕목 중 하나라면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꼴사납게 찡찡대는 거보단 한참 낫지."


그리고는 그 녀석은 씩 웃으면서 내게 걸어왔다.
걸음마다 모래바닥이 푹푹 패였다. 발에 실린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좆도 모르는 내가 보더라도 보통 힘은 아니었다.

"나는 네가 왜 왔는지 알고 있다. 그 이후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 말야."

그 이후.
정확히 언제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 말이라 내가 허리춤에 손을 뻗으니, 녀석은 호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도끼를 바닥에 꽂았다.

쿵!


대충 거인의 힘을 켠  수준은 되는  같은 근력이었다.

"도시 습격 말이야. 그런 조작은 영  장기가 아니라서 봄 그 녀석과 협력하려고 했는데, 녀석이 멋대로 내 점유지를 뺏어가지 뭔가. 그래서 나는 드래곤을 빼앗겼고. 너를 좀 끌어내고서 빠질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져버렸지."

녀석의 건틀릿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나를 가리켰다.


"나는 왜 끌어내려고 했는데."
"가장 강한 전사, 예언된 인간의 왕을 끌어내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호선을 그리는 녀석의 입매는 독특한 희열이 담겨있었다.

"처음엔  실망이었어. 전사라면 희생에 개의치 않는 법인데, 고작 반송장 살려놓겠다고  잡은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보였거든. 심지어 몰려있기도 했고 말이지. 나는 으레 다른 전사들이 그렇듯 쓰러져 죽는 걸 생각했고, 너는 내 예상을 정확히 깨부쉈어. 그때 깨달은 거지. 아, 내가 찾던 인간의 왕이 저놈이구나."

녀석의 검지가 접히니, 내 뒤에 있던 철창이 덜컹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겨울의 처녀가 철창 너머에서 당황한  보였다.

"감명 깊더군.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대역전! 전사라면 갖추고 있어야할 투지와 임기응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손가락이 튕겨지는 소리에 격철음이 묻어났고, 그와동시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관객석에 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녀석은 팔을 벌려 관객석을 가리키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느새 관객석은 나를 보고 환호하고, 야유하는 불꽃으로 가득했다. 여름의 씹새끼가 문득 웃음을 멈췄다.

"너라면 진짜 해방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해방자?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주인공을 겨울의 해방자라고 하는 건 잘 알고 있는데… 그거랑 무슨 상관인 거지?
녀석은 투구를 쓰고 있는 내 표정을 꿰뚫어본 것처럼 대답했다.

"아, 이런. 너무 앞서갔나. 미안하게 됐어. 내가 좀 격정적인 면이 있거든."


그리고는 그 호쾌한 얼굴로 씩 웃고는 턱을 짚었다.  켠을 바라보는 녀석의 호박색 동공은 가로선이 가해져 있었다.


"하지만 봄의 순례자한테 겨울의 해방자  광대놈을 참칭한 걸 보면… 아예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뭐 됐나.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힌트를 주자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 무엇을 위한 해방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녀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손뼉을 쳤고, 화염이 그 몸에서 피어오르더니 사라졌다.
뭐여 씨발, 빤스런인가?
양초에 붙은 불을 입으로 불어 끈듯, 갑작스러운 소멸이었다.


"난 단순히 너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야."


화르륵!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꺾으니 녀석은 딱 봐도 가장 상석인 곳에 있는, 잘 장식된 화산암 옥좌에 걸터앉았다. 심지어 화염이 주변에 일렁거렸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녀석은 소름끼치게 웃었다.
신 새끼들은  저렇게 웃는 게 특징이냐?
좆같은 놈들.

"한계까지 끌어낸, 최강의 너와 싸우고 싶은 거지."

녀석은 내가 쌍욕을 박을 틈을 주지 않았다. 씹새끼가 손을 휘젓자, 내 바로 건너편에 있는 거대한 철창이 열리더니 그 너머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기어나왔다.


"…이런 씹…."


타오르는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
 뱀이 나를 보며 세로동공을 빛냈고, 나는 허리춤에 끼워둔 그레이톰의 심판을 뽑아들었다.
여름의 씹새끼는 그 모습을 보면서 턱을 괴고 있었다.


"휴식은 없다. 나와 싸우고 싶다면 맞서싸워 승리해라. 한계까지  기량을 끌어내봐."

치리리릭

녀석의 명령에 뱀의 비늘이 꿀렁이며 마찰했다.
그 사이로 튀는 불똥이 눈부셨다.


*


또.
또 생소한 몬스터였다.
이 씨발놈들은 내가 좀 알고 있는 몬스터 내놓으면 안되는 건가?

하지만 싸움을 피할  있는 것도 아니다. 뽑아든 그레이톰의 심판에다 빙결석을 긁었다.


카가가각!


칼날을 타고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어떻게  거야?"


메이는 침착하게 방패를 들어올리면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나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새끼를 물끄러미 보았다.
녀석의 비늘은 불을 두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비늘이 마찰할 때마다 화염이 일어날 뿐.
내게 화염은 큰 피해를 주진못하지만, 비늘을 자의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상당히 신경 쓰였다.

화염 부여는  수 없다. 메이에게 방어를 맡기기엔 메이에겐 화염 내성이 없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는 그레이톰을 단단히 쥐며 앞으로 나섰고, 그에 뱀이 치릭거리며 내게 스멀스멀 다가왔다.

"싸워야지. 잘 보고 도와줘."


내가 신경 써야하는 건 물리 피해 뿐. 화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단단히 쥔 그레이톰의 심판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휘두른 검날에 뱀의 몸뚱아리가 겹쳤다. 겹쳐진 검날이 비늘 사이를 파고들듯 하면서 나아갔고, 불똥이 어지러이 튀겼다.

카아아앙!

"큭."


하지만 비늘은 존나게 단단했다.
튕겨나는 칼을 억지로 다잡으며 자세를 고쳤고, 곧장 나를 향해 쏘아지는 꼬리를 보며 칼날을 들어올렸다.


기기기긱!

뾰족하게 단련된 비늘은 내 갑주에 흠집을 남겼다. 나는 겨우 들어올린 검날 너머로 넘실대는 비늘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내 눈 앞이 거세게 타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앙!


그건 폭발이었다.
비늘 사이로 흘러나온 액체가 비늘의 마찰에 타오르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화염 완전 내성이라 다행이라고 하기엔 숨쉬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투구가 완전한 화염 내성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무튼 간에 빠르게 빠져나오는 게 좋았다. 내가 몸을 숙이며 빠져나오자 뱀의 동공이 나를 쫓더니 그대로 몸을 틀었다.


촤악!

놈의 꼬리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내 후드를 벗기며 쇄도했고, 나는 겨우 빗나간 꼬리를 눈으로 쫓으며 더 몸을 땅에 가깝게 기울였다.


빈틈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보통의 생물이라면 있어야할 주춤거림도 없었다. 그저 연속적으로 대가리를 날리거나 비늘을 두른 꼬리를 날리기만 했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숨겨왔던  수를 발동했다. 내면의 부르짖음에 따라  귓전에 기계음이 울렸다.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날아오는 꼬리를 보면서, 그대로 검을 들어올려 비늘 사이를 검으로 정확히 찔렀다.

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나는 검날을 바로잡았다.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쇄도하는 녀석의 대가리.
그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날아왔다.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 지극히 느린 세상 속에서 나는 놈의 움직임을 충분히 읽고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기울여 피하고는, 강하게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쩌저저적

금속음과 함께 들려오는 얼어붙는 소리.
녀석의 아가리는 빗나갔지만, 머리를 이루고 있는 비늘이 얼어붙고 있었다.


하지만 뱀새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듯, 공격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느린 세계를 유영했다.

영원의 정신.
순환, 영원, 합일, 초월을 관장하는 봄의 순례자를 엿먹이고 얻어낸 권능.
그 효과는 심플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내 정신을 극도로 가속시켜, 세계를 느려보이게 만드는 것.


그 덕분에 나는 보통이라면   튕겨져 나갔을 공격을 맞받아칠 수 있었다.

카앙!


내가 미끄러지며 휘두른 칼날에 녀석의 아가리 속이 얼어붙었고.

"흐읍!"


그 옆으로 빠져나온 내 검날이 그대로 내리찍혔다.

콰드드득!


얼어붙은 살결을 뚫고 검날이 빛을 뿌렸다.
검기는 창백한 빛을 주변에 뿌리며 뱀의 대가리를 얼려 깨뜨렸다.
흩날리는 얼음 파편에서 훌쩍 뛰어 물러나자, 거대한 뱀의 몸뚱아리가 지면에 떨어졌다.

쿠웅!


머리를 잃은 뱀은 몸을 한동안 떨더니 축 늘어졌다.

"…와아."

메이는 그런 내 모습에 순수하게 놀라워했고, 상석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여름의 도살자 역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나도 좀 놀랐다. 이렇게 수수하게 끝낼  있을 줄은.
나는 숨을 돌리려 등을 돌렸고, 그 순간 내 앞의 철창이 열리는 걸 봤다.


"말했잖나. 휴식은 없다고."

저 씨발놈.
여름의 씹새끼의 말대로, 바로 열린 철창 너머로 짐승  마리가 걸어나왔다.
묵직한 근육에 타오르는 비늘을 가진, 어쩐지 소름끼치게 생긴 악어.
이번 몬스터는 이족 보행을 하는 거대한 화염 악어였다. 씹, 악어면 기어다니던가.


내가 좆같아하는 것도 잠시, 놈들은 지성이 있는지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서고는 다른 한 마리가 먼저 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그렇게 나보다 한참은 큰 이족 보행 악어 두 마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씨발…."

슬슬 빡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빙결석을 칼날에 대고 긁어냈다.


카각!

그러자 한기가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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