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여름의 도살자 (55/274)



〈 55화 〉여름의 도살자

"…허억, 후욱."

내가 숨을 몰아쉬자, 메이 역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우리 앞에 있는 무수한 짐승들의 시체에서 이글거리는 열기가  얼굴을 정신 없이 핥아댔다.
씨발, 존나 짜증나네.
나는 눅진눅진한 그레이톰의 심판을 검집에 꽂고는 등에 짊어졌던 폭군의 검을 뽑아들었다.


적당한 무게감이 손을 내달리자, 그제서야 나는 앞을 봤다.

두 마리의 악어 떡대는 나란히 머리가박살나 죽어있고, 그 옆에는 화염을 두른 코뿔소, 머리  개 달린 개새끼 같은 기괴한 생명체도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사자의 화염 갈기가 점차 빛을 잃음에 따라 우리의 호흡은 천천히 돌아왔다.

그렇게 힘겨운 상대들은 아니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 상대하기 어렵긴 했고, 또한 공격도 매서웠지만 일전에 쓰러트렸던 지렁이만큼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질량이 없는 만큼 메이의 방패는 이 새끼들한테  먹혔고, 나는 두 마리째가 나올 때부터는 화가 났던 탓에 거인의 힘으로 놈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그 뿐이었다.
여전히 짐승은 짐승이었고, 빡세기도 존나 빡셌다.

심지어 메이가 배운 화염 마법은 이 새끼들 전원이 화염 저항을 갖고 있던 탓에 쓰질 못했다.
메이가 침울하게 방패를 고쳐멨고, 나는 상석에서 우리를꼬라보고 있는 여름의 도살자를 노려봤다.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격철음이 손뼉소리와 맞물려 시끄러웠다.
저 씨발놈.

내가 이를 가니, 놈은 씩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녀석이 손뼉을 한 번 더 치더니, 화염을 일으키며 내 앞에 나타났다.
도끼를 등에 짊어진 녀석은 어느새 옆구리에 투구를 끼우고 있었다.


"지금 너를 보아라. 힘은 나에 필적하고, 감각도 최대로 깨어났지. 적당한 싸움 끝에 너의 잠재능력은 최대로 발휘되는 중이다. 지금보다 더 싸울만한 상황이 있나?"


존나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이 씨발놈이 적당한 상대만 내놓은 덕분에 나는 컨디션이 최대였고, 메이 역시 충분히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괜시리 꺼내든 빙결석을 폭군의 검에 긁어올렸고, 투박한 검날을 타고 거센 냉기가 몰아쳤다.

여름의 도살자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옆구리에끼워뒀던 투구를 뒤집어썼다.
길게 자라난 뿔에 맞물리게 되어있는 투구가 뿔을 달궜다.
달궈진 뿔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더니 투구에 완전히 동화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후드를 끌어올려 투구에 덮었다.

괜히 주변 온도가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보자고."

여름의 도살자가 선언하고.
나는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


카아아앙!


"이 씨발…!"


나는 잇소리를 내며 칼을 휘둘렀으나 여름의 씹새끼는 그걸 가볍게 도끼 자루로 걷어내며 박치기를 옆으로 내질렀다.
두 개의 달아오른 뿔이 휘둘러지자 달려들려던 메이가 튕겨져 나갔다.

"윽!"

그 틈에, 내가 몸을 뒤로 빼며 주먹을 날렸고, 녀석은 내 주먹을 고개를 돌려 피하고는 다리로 나를 밀쳤다.

카드득!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를 추격하는 도끼날.
 갑옷에 흠집 하나가  추가되고, 나는 겨우 몸을 비틀어 녀석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놈은 내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돌릴 틈도 없이 도끼가 나를 향해 쇄도했고, 나는 영원의 정신을 발동했다.
느려지는 세상 속, 내가 칼을 들어올리는 것보다 녀석의 도끼가 더 빨랐다.
나는 머리를 조금 젖혀 투구의 끝자락으로 녀석의 도끼를 튕겨냈다.


카아앙!


"큭."


머리가 울린다.
씨발, 360도를 도는 바이킹을 타도 이것보단  어지러울 거다.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억누르며 애써 폭군의 검을 휘두르지만 녀석은 여유롭게 발을 뒤로 놀려 몸을 빼냈다.
허공을 가르며 폭군의 검이 애꿎은 벽을 깨부쉈다.

콰강!

"씨발놈…."

메이는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었고, 나는 울리는 머리를억지로 부여잡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저 새끼,  여름의 씹새끼에게는 피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씨발 당연하겠지.
이쪽은 몬스터 새끼들 존나 상대하다가 싸우는 거고, 저 씨발놈은 상석에 편하게 앉아있었으니까.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분노로 인해 지속 시간이 상승합니다.]

그건 좋네.
나는 이를 악물며 지속 시간이 연장된 거인의 힘으로 폭군의 검을 단단히 쥐었다.

덜그럭


하지만 메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메이의 팔뚝을 두르고 있던 판금은 흉하게 찢어져 있었고, 그 팔뚝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 탓에 메이는 적조를 들고 있지 못했다.
바닥을 흘러내린 피를 적조가 먹어치웠다.
낭패감이 감도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미안해…."
"괜찮으니까  몸이나 챙겨."


전력은 줄었다. 내 갑주 성능이 좋은탓에 겨우 흠집 몇 번으로 끝났지만, 원래 사용하던 가죽 갑옷이나 드래곤 뼈 흉갑 같은 거였으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씨발, 썩어도 신이라고 존나게 세네.
나는 낭패감을 숨기며 숨을 골랐다.


결국 아낄 수는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내면으로 침잠했다.
권능을 발동하기 위해서.


내가 발동할 권능은 거인의 힘이었다.
거인의 힘에, 중복 발동이 안된다는 설명은 없었으니까.

물론 이 빌어먹을 놈의 기계음이 친절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순히 설명만 안 했을 뿐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재생 능력을 생각하면 실패하더라도 잃을 게 없는 도박이었다.


나는 내쉬는 숨결에 속으로 거인의 힘을 외쳤고, 그에 따라 기계음이 들려왔다.


[거인의 힘이 중복 발동됩니다.]


그리고 내 팔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뿌드득, 하고 억지로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강력한 권능이 팔에서부터 심장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기가 막힐 정도의 전능감이었다. 마치 하늘을 손에  듯한 차오르는 만족감에 나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숨결이 뜨거웠다.


"호오…?"


여름의 도살자는  기세를 눈치챘는지 흥미로워 하며 도끼를 끌어내려 쥐었고, 나는 좀 뻑뻑해진 눈을 끔뻑이고는 자세를 낮췄다.
내 육신이 함성을 질렀다. 뛰쳐나가고 싶어서 심장이 두근거렸고, 내 팔뚝을 타고 흐르는 어마어마한 거력이 칼자루를 신음하게 했다.

내가 틀어쥔 칼자루에서 금속음이 들렸다.


씨발, 개쩌네.
내가 웃자, 여름의 도살자 역시 자세를 낮췄다.

"근력이 더 올랐―"

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쩌어어엉!


내가 내리찍은 폭군의 검이 녀석의 팔을 으깰듯 쇄도했고,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격돌했다.
아까라면 흘려냈을 공격이었지만 씹새끼는 흘려내지 못했다. 오히려 버거운지 잇소리를 내며 무릎을 굽혔다.

"팔이… 삐걱대는군. 대단한 힘이야."


카아아아앙!

내가 힘을 줘서 밀어내는 것도 잠시, 녀석이 한손을 놓더니 몸을 기울여 칼을 튕겨냈다.
나는 튕겨나는 칼날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돌렸고, 이 새끼가 다시 도끼를 내리찍는 것보다도 빠르게 횡으로 휘둘렀다.


까가가각!

녀석의 자루를 타고 날아오른 검날을 내가 그대로 찍어누르자, 녀석은 다시 무릎을 굽히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내게 이 새끼만큼의 기술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법을 쓸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내게는 거인의 힘 곱빼기가 있었다.

"거슬리는 무기군…!"


여름의 도살자가 물러서며 도끼를 휘두르고, 나는 그에 폭군의 검을 마주 휘둘렀다.
달아오른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이 비척비척 물러났고, 나는 칼을 다시 휘둘렀다.

"받아가겠다!"

이 씹새끼는 내 무기가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인지, 휘둘러지는 검에 도끼 날을 걸치더니 그대로 잡아당겼다.

콰앙!


나는 바닥에 쳐박힌 폭군의 검을 포기하고는 앞으로 파고들었다.


쩌억!

그리고 박치기.
내 단단한 투구가 녀석의 머리에 추돌했다.


"큽."

녀석은 머리가 울리는지  머리를 짚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밀어붙여야 했다.





나는 녀석의 뿔을 단단히 쥐었다. 타들어가는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머리를 끌어내림과 동시에 무릎을 내질렀다.


카앙! 캉!

하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팔을 들어올려 묵묵히 내 니킥을 막아내더니, 오히려 내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붙잡히면 끝이다. 이 새끼의 기술을 생각한다면 마운트 당하는 순간 뒈진다.
그래서 나는 느리게 된 세상 속에서 애써 몸을 빼냈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올렸고,  눈동자에 낭패가 감돌았다.

나는  얼굴에 앞차기를 질렀다.
미숙하지만, 거인의 힘이 두 배로 담긴 존나  앞차기를.


카아앙!


겨우 들어올린 팔이 떠오르고, 가드가 풀렸다.
머리는 보호했지만 여전히 빈틈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틀어 주먹을쥐었고, 여름의 씹새끼가 팔을 끌어내리기도 전에.


투콰아아아아악!

그 건방진얼굴을 향해 날렸다.
녀석은 잔상만을 남기며 벽으로 날아갔고, 투기장 켠에 틀어박히며 모래 먼지를 뿜어냈다.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불길이 이리저리 넘실댔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타고 뿜어져나오는 불꽃이 탐욕스럽게 주변을 핥아댔다.

"…씨발놈."

 마지막 일격에서도, 놈은몸을 뒤로 던져 충격을 줄였다.
어떻게 알았냐면, 주먹에 선명하게 느껴졌어야 할 타격감이 없었다.
좆같은 전사신.

내가 주먹을 털어내며 폭군의 검을 주워들자, 넘실대는 불꽃 너머로 여름의 씹새끼가 걸어나왔다.


"멋진데. 예상 이상이야."

녀석의 투구는 흉하게 깨져있었다.
얼굴의 반 쪽을 드러낸 녀석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고, 흐르는 코피를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는 전사신이라는 이명에 걸맞지 않게 존나게 신중한 놈이라는 걸.

호쾌한 놈이지만 전투법은 무척이나 소극적이고 노련하다. 생존을 메인으로 움직인다는 걸 금방 눈치깔  있었다.
대부분의 동작은 방어가 중점이고, 카운터를 노린다.
메이처럼 싸움이 익숙치도 않은 좆밥이 팔이 갈라질만도 했다.

목이 안 떨어졌으니 어디야.

까드드득


나는 손에 든 빙결석을 아귀 힘만으로 쥐어 부쉈다.


뼈를 찌르는 냉기가 손아귀를 내달리고, 나는 그 빙결석 가루를 폭군의 검에 뿌렸다.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냉기를 두른 폭군의 검은 이 살을 녹일듯한 더위에서도 건재했다.


여름의 도살자는 즐거운 기색으로 나를 꼬라보더니, 도끼를 바닥에 꽂으며 말했다.


"너는 왜 싸우는 거냐?"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에는 진중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씹새끼.

"전사신이 그런 걸 묻는 거냐?"
"훌륭한 싸움에는 좋은 이유가 뒤따르는 법이지. 네가 왜 나와 대적하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건지 궁금해졌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부숴진 투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두 자루의 뿔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 놈을 꼬라보면서 말했다.


"…햄버거랑 치킨을 사서, 잔뜩 쳐먹고. 게임을 잔뜩 한 뒤에 집에서 침대에 누워 편히 푹 잔다."


녀석은못 알아들었음에도 나를 물끄러미, 흥미롭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그거면 부족하냐?"

그리고 웃었다.
호쾌한 미소였다.

"아니, 충분하군."

녀석은 그 말과 함께 천천히 불길을 피어올렸다.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화염은 넘실대며 녀석의전신을 삼켰고, 잔잔히 흐르는 위압감과 함께 나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진지하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녀석은 별이 되었다.
갑옷 속의 화염이 별의 죽음처럼 터져나오고, 내가 이를 악물며 물러서자  화염은 휘몰아치며 주변을 삼켰다.
집어삼키는 사물의 수만큼 화염은 격하게 타올랐다.

 화염은 점점 뭉치고 굳으며 고체처럼 형체를 이뤘다.

곧게 뻗은, 불타오르는 여덟 개의 다리.
그 다리의  끝에 달려있는 재질을 알  없는 붉은 발굽.
여덟 개의 다리를 이어둔 몸뚱아리는 태양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첨단에는 머리가 있었다.
두 개의 곧게 솟은 뿔과 가로로 흠집이 새겨진 두 개의 불타오르는 눈동자.


고고하게 타오르는 거대 화염 산양.
여름의 화신(化身)이 길게 울부짖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