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여름의 도살자
이 좆같은 다크 판타지에서 현실과 똑같이 작용하는 법칙이 하나 있다.
크고 무거울 수록 강력하다는 것.
마치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최강인 것처럼.
나는 눈앞의 산양을 보면서 달궈지는 호흡을 뱉어냈다.
저건 분명 여름의 씹새끼의 본체였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도끼를 휘둘러대던 새끼의 본체.
그새끼한테 달려있는 뿔은 저 본모습을 상징하는 거였고, 다른 신들도 저런 특질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런만큼 저 모습은 예상했던 바였지만….
"씨발… 너무 크잖아."
게임에서보다 더 거대했다.
끽해야 여름의 대전사였던 지렁이에 준해야할 사이즈일텐데, 녀석은 그보다 두 배 이상은 거대했다.
쿵!
씨발.
녀석이 발을한 번 구르자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끌어올린 눈에 거대하고 고고한 산양의 두 눈동자가 들어왔고, 그 너머의 배경에서 화산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원치 않는 타임어택까지 하게 생겼다.
신이란 놈들은 좆같은 짓만 골라서 하나?
나는 숨을 겨우 들이키면서 벗겨졌던 후드를 고쳐썼다.
"괜찮냐?"
"흐으… 응, 아직 괜찮아."
메이는 숨을 쉬기 힘든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뭔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손 위로 띄워내더니 투구 속으로 밀어넣었다.
"화염 저항, 이야. 아직 싸울 수 있어."
그럼 다행인데.
저건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투레질을 하며 바닥을 구르는 2개의 발굽을 보았다.
씨발, 왜 다리가 여덟개나 있는 건데. 징그럽게.
다행히 거인의 힘은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팔뚝을 타고 흐르는 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게 얼마나 강해졌든, 거인의 힘을 2배로 받는 나만큼 강한 근력을 갖고 있진 않을 것이다.
아니면 좆되는 거지만.
"죽지 마라."
나는 메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몸을 튕겨냈다.
그리고 여름의 씹새끼도 우릴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거대한 발굽이 고고고,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올려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저게 명중률이 낮다는 걸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존나게 커서 명중률이 존나의미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얼추 때려맞추기만 해도 나는 모기처럼 뒈질 거다.
콰아아아앙!
무슨 씨발…!
발굽이 내리찍어지자 격한 진동이 반파된 투기장을 뒤흔들었고, 나는 균형을 잃어 흙바닥을 짚으면서 겨우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 위로 거대한 발굽이 떨어지고 있었다.
"흐읍…!"
피하기엔 늦었다. 빠르게 벗어나도 다리 쯔음에서 걸린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자세를 단단히 굳히고 양손으로 폭군의 검을 쥐었다. 칼날 위의 냉기가 손목을 간질였다.
쩌어어어어엉!
푸슈우욱
발굽이 깨져 파편이 흩날리고, 나는 완갑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크윽."
씨발, 존나 무겁네.
폭군의 검을 한손으로도 휘두를 수도 있는 근력임에도, 부딪힌 여파로 귀가 아리고 내장이 진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진탕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의 발굽에도 상당한 데미지가 가해졌다. 갈라져 찢어진 녀석의 거대한 발굽에서는 불타오르는 혈액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무슨 용암 같은 모양새였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여름의 씹새끼는 나한테 다시 발굽을 떨궜고, 나는 재빠르게 몸을 튕겨냈다.
쿠와아아아아!!!
격돌과동시에 모래로 된 바닥이 출렁이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폭발처럼 피어오른 먼지는 고요하게 부유했고, 나는그 먼지를 노려보면서 검을 고쳐쥐었다.
쿠오오오
먼지 구름을 걷어버리며 나타난 건 놈의 다리였다.
하나의 크기가 족히 덤프트럭의 크기 정도는 가볍게 넘어서는 육중한 다리가.
먼지가 걷혀 시야는 트였지만, 너무 거대하고 피할 수도 없었다. 곧 추돌한다.
궤적을 꺾어낼 수도 없다. 맞서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나는 팔이 버티기를 기도하면서 칼을 들어올려 방패처럼 내 앞을 틀어막았다.
카아아아아아앙!
금속끼리추돌하는 것만 같은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떠올랐다.
팔을 타고 거센 충격이 내달렸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팔이 덜컥거렸다.
지금 내가 날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벽면에 추돌하기 전에 숨을참았다.
쾅! 콰드드드드득!
"커헉!"
입에서 숨이 억지로 끌어나와졌다.
나는 투기장의 관객석을 이루고 있던 벽면을 여러개를 부수며 등으로 착지했고, 겨우 숨만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씹새끼는 내가 휴식하는 게 아니꼬왔던 모양이었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여서 나는 바람 소리가.
애미 없는 새끼. 안 보이면 좀 상황이라도 지켜보던가.
"씨발!"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고, 어둑한 지하 내부까지 발굽이 파고들어왔다.
쾅! 쾅! 콰가가가가가가!!
닿는 암석이나 의자 따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며 내리꽂힌 신의 발굽이 땅에 닿는 순간, 나는 또 다시 날아올랐다.
발굽에 실린 바람이 나와 함께 몇 개의 돌덩이를 밖으로 빼집어냈다.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며 다시 일어섰다.
안 일어나면 죽는다. 그것도 쥐포처럼 으깨져 죽는다.
차라리 칼에찔리거나 촉수에 먹혀죽는 게 낫지, 쥐포는 사양이다.
"현성아!"
뒤에서 메이가 외치고 있었다.
돕고 싶겠지만 화염 마법은 먹히지 않고, 방패를 사용해 공격하기엔 산양새끼는 내게만 집중하고 있어 그럴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옆에 딱 붙어봤자의미가 없다. 저 거체는 공격 범위가 너무 넓으니까.
"괜찮으니까 네 몸이나 지켜!"
나는 외치고는 다리를 벌리며 검을 등 뒤로 돌렸다.
나에게 여름의 앞다리 두 개가 날아오고 있었다.
산양의 다리는 파공성을 내며 날아왔고, 나는 그에 맞서 대검을 휘둘렀다.
까드드드드득!!!
소름끼치는 감각과 소리가 손아귀를 달리더니, 산양의 다리가 흉하게 뒤로 꺾이면서 불타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승리감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것도 잠시, 나는 다리가 밀려남과 동시에 날아올랐다.
오늘 세번째 비행이었다.
지면이 거세게 움직이면서 빙글빙글 돌았고, 나는 균형을 잡으려 몸을 비틀고는 폭군의 검을 땅에 박아넣었다. 깊게 파이는 도랑이 산양의 혈액으로 붉었다.
"후욱… 후욱."
산양은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틀며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빠르게 오른손을 쥐었다가 폈다.
아직 악력은 남아있다. 싸울 수 있다.
오히려 충돌의 순간 날아간 덕분에 부담이 덜 간 모양이었다.
아까처럼 벽에 연쇄추돌하면 몸이 버티질 못하겠지만, 재생력도 있으니 이렇게 날아가는 방식으로 목숨을 건지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새끼도 인간 형태일 때 내 주먹을 그런 식으로 흘려냈었으니, 나라도 못할 건 없지.
저 새끼 성격상 그런 거에 내로남불할 것 같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검을 다시쥐면서 놈을 노려봤다.
놈도 나를 노려봤다. 노려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녀석은 뒤틀던 몸을 그대로 띄워올렸다.
"이런 씨발."
그리고 발굽을 내밀어 내 방향을 겨누고 떨어져 내린다.
높이 뛰어오른 탓에 시간은 있지만,저게 그냥 떨어졌다간 메이도 휘말려 뒈진다.
나는 재빠르게 등을 돌려뛰어나갔고, 방패를 쥐고 있던 메이의 허리를 낚아챘다.
"현성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땅을 박찼고, 거센 속도감이 그대로 상승하는 걸 느끼며 날아올랐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그놈이 추돌한 땅이 불타오르며 치솟았고, 그 폭발은 무슨 핵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세게 치솟았다. 나는 뒤틀었던 몸 그대로 메이를 껴안고 땅에 충돌했다.
콰앙!
두 명 분의 체중이 내 허리를 조졌지만, 다행히 목숨까지 조지진 못했다.
"으… 씨발."
"콜록, 콜록."
나는 한창 기침을 쏟아내는 메이를 옆에 내려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등이 욱신거리는 게 슬슬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으켜 앞을 바라보니 여름의 씹새끼는 피어오르는 불길 한 가운데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봐라 이 씹새끼야.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놈은 몸을 크게 뒤로 빼면서 자세를 낮췄다. 뭔가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야."
"…응."
"내가 신호하면 방패 펼쳐. 부스터로 쓰게."
아무리 짱깨라지만 부스터가 뭔지는 아는지, 메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한참 말을 더듬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 그 말더듬기를 끊어먹었다.
"날 믿어."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제자리에서 다리를 풀었다.
지금까지 맞선 결과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여름의 도살자와 나의 데미지는 거의 비등비등하고,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력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상대적으로 내 몸은 작아서 회피율이 높았고, 대신 피통이 뒈지게 낮았다.
놈은 몸이 거대한만큼 피통이 뒈지게 높았고.
당당하게 정면 승부를 해서 내가 이길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되도록이면 이쪽의 피해를 줄이면서 큰 공격을 먹여야 하는데, 그런 거라면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카운터.
녀석의 돌진력까지 무기로 삼아 저 대가리에 꽂는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저놈 역시 똑같을 터였다.
확실한 공격으로 나를 끝내버리겠다는 속셈이겠지.
서로 노리는 수가 같으니, 자연히 이 승부수는 피할 수 없었다.
서로 거기까진 계산하고 있을테니까.
"응. 믿을게."
메이는 더 이상 더듬지 않았다. 뒤늦은 답을 들으면서 나는 자세를 잡았다.
"내가 뛰어오르면 나한테 겨누고 쏴."
"알겠어."
메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고, 나는 메마른 입을 달싹이고는 숨을 뱉어냈다.
"펼쳐!"
나는 바닥을 박쳐 뛰어올랐고, 그 순간 다리를 짓이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분명히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선명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툴툴댈 수는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산양의 뿔이 있었으니까.
몸을 젖혀 폭군의 검을 앞으로 내세우고 나는 화살처럼 날았다.
내밀고 있는 검첨을 따라 공기가 갈라져 폭음이 울렸고, 나는 검에 가까이 몸을 붙이면서 입을 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충돌은 가볍지 않았다.
콰득, 콰자작!
손을 달리는 선명한 타격감.
흩날리는 뿔 파편.
귀청을 찢어버릴 듯 울부짖는 산양.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두개골을 가르면서 나아간 칼이 쳐박히고, 뿔이 부러져 파편이 흩날리면서도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뒤흔들며 나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질긴 새끼…!"
나는잇소리를 삼키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좀 죽어라 이 씹새끼야!"
역수로 쥔 그레이톰의 심판이 회색빛으로 타올랐고, 나는 일렁이는 검날을 재빠르게 산양의 갈라지는 두개골에 쳐박았다.
깡! 까아앙!
단단하다. 손가락 마디만큼도 칼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씹새끼는 심지어 나를 떨구려고 벽에 머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아앙!
"커헉!"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 의식이 아득해진다.
씨발, 내장이 잘못됐는지 입에서 피가 울컥 새어나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이 새끼 한끼 식사로 전락한다.
쿵!
까앙!
녀석이 머리를 한 번 들이받을 때마다 나는 검을 휘둘렀고, 단단히 쥔 오른손을 앞으로 밀어 폭군의 검을 그 단단한 두개골에 밀어넣었다. 밀어넣어서 안되니 휘둘렀다.
나는 억지로 버티면서 녀석의 머리를 난도질했고, 놈은고통스러워 하면서 나를 벽에 들이받았다.
오 오 오오 오 오 오 오
그 순간,부유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느껴본 것 중 가장 거대한 부유감이.
내 몸이 떠오르고, 붙잡은 칼날만이 내 몸을 지지했다. 손아귀에서 그레이톰의 심판이 빠져나왔다.
무심결에 등뒤를 돌아본 순간, 지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예전에 탄 자이로드롭이 생각나는 것도 잠시였다. 이 자이로드롭에는 씨발 안전장치가 없었다.
"미친새끼가!"
여름의 씹새끼가 뛰어올라, 몸을 뒤집어 지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대비하며 검을 단단히 쥐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염 내성을 가진 갑주로도 막을 수 없을만큼 강력한 불길이 피어올라, 나에게 작열통을 선사했다.
그건, 진짜앰창 좆되게 아팠다.
거인의 힘으로 재생하는 몸뚱이로도 버틸 수 없었고, 온 몸에서 탄내가 풍겼다.
그래서 나는 폭발을 이겨내지 못했다.
내 몸이 튕겨져 나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바닥에 거세게 추돌했다.
쿠르르르 드드득
구르면서 부딪힌 돌무더기들이 어지럽게 흩어졌고, 나는 차오르는 숨을 겨우 억누르며 피를 토해냈다.
어디가 다쳤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내장이 좆됐다는 건 분명했다.
지금 내 몸은 좆이나 다름 없었다. 전신이 좆되고 있었으니.
"씨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아직 몸을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거인의 힘을 동력으로 폭군의 검을 집어들었다. 그걸 지지대 삼아 곧게 섰다.
눈 앞에 아직 적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인간으로 돌아온 어떤 씹새끼가.
뿔 한쪽은 부러지고, 갑주는 거의 다 파손되었다. 멀쩡했을 호박색 오른눈은 완전히 짓뭉게져 흔적만이 겨우 남아있었다.
녀석의 손에 든 도끼가 거세게 타올랐고, 그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존나 재수없게 웃네. 이 새끼도 인중 때려줘야지.
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녀석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무기를 단단히 쥐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