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여름의 도살자
싸움을 싫어하진 않았다.
여름의 도살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전사신이었으니까.
신이 된 태초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싸움을 거절해본 적이 없었고, 싸움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괴물을 상대하면서도 그는 항상 즐거웠다.
하지만 즐겁기만 할 뿐이었다.
싸움은 끝이 없었다.
적은 무한했고, 그런만큼 싸움의 의미는 점차 옅어져갔다.
신이 존재하는 한 괴물이나 인간의 변질은 계속해서 일어날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를 비롯한 신들은 도피했다. 몸을 숨겼다. 누군가는 사명을 위해서, 누군가는 재앙을 위해서, 누군가는 야망을 위해서였지만 여름은 달랐다.
지쳤다.
그게 그가 품은 감상의 전부였다.
아무도 찾지 않을 척박한 땅에 몸을 뉘이고, 타오르는 태양과 화산에 몸을 담그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숙하게나마, 세계에 퍼져있는 자신의 불로 세상을 관조했다.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생명은 아득했다.
인간의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름의 도살자는 확신했다.
이 인간이라면, 자신을 죽여줄 수 있을 거라고.
*
메이는 쓰러졌다.
나름대로 싸워보려고는 했지만, 화염 저항 정도로는 이 강렬한 열기 속에서 버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씹새끼가 걸레짝이 되기 전에 비해서 전투력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쩌어어어엉!
내리찍은 폭군의 검이 도끼자루에 틀어막힌다. 보통의 무기라면 부러질 법도 했건만, 저 빌어먹을 놈의 도끼는 아직 멀쩡했다.
"크으윽…!"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해도 녀석은 그걸 가볍게 흘려내고는 내게 도끼를 휘둘렀다. 거기에 뭔 묘리가 담겨있는지는 몰랐지만 저 도끼는 단순하게 맞서면 안됐다.
경험으로 얻어낸 지식이었다.
게임에서는 단순하게 화염 데미지만 선사했던 도끼질이 아주 악랄하게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아까 정면으로 맞서려고 했을 때 베였던 복부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젖혀 최대한 몸을 빼냈다.
까앙!
씨이발.
내 옆구리 갑주를 스친 도끼는 아까보다 더 강맹했다. 도끼날에 담긴 화염은 태양처럼 거세게 드글거렸고, 나는 화염 완전 내성을 갖추고 있는 갑주가 화염에 우그러드는 걸 보았다.
하지만 기죽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게 달려오는 씹새끼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횡으로 휘둘러지는 도끼를 향해 폭군의 검을 내리찍었다.
쩌어어어어어엉!
금속끼리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 완갑에서 피가 새어나왔지만, 여름의 도살자도 이 공격을 멀쩡하게 받아내진 못했다. 미소를 띄고 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읍!"
전사신은 도끼를 놓더니 나에게 다리를 내질렀다. 영원의 정신을 켜봤자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나는 몸을 뒤로 띄웠다.
콰아아앙!
이런 씨발.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나는 그대로쏘아져 바닥을 굴렀다.
등은 여전히 혹사당하고 있었고, 갑주는 슬슬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좆같은 상황에서도 여름의 도살자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또 다시나에게 향해오는 도끼. 도끼날에 담긴 화염을 슬쩍 바라보던 나는 폭군의 검의 검날을 붙잡고 밀어올렸다.
카앙!
드드드
중간에 가로막힌 도끼날이 이글거리며 폭군의 검을 녹여버리려고 했지만, 파괴 불가의 무기는 그 시도를 철저히 봉인했다. 도끼날이 덜덜 떨리면서 나를 찍어눌렀다.
씨발, 마음 같아서는 그레이톰의 심판도 휘두르고 싶은데, 그건 지면에 추돌하면서 놓친지 오래였다.
애석함을 담아 칼을 밀어냈다.
카앙!
그리고 그 빈틈을 노리고 도끼가 휘둘러졌다.
나는 거기에 맞서 대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다시 한 번 울리는 익숙한 소리에 귀청이 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충격까지 익숙하진 않았다. 팔에서 서서히 탈력감이 맴도는게, 금방이라도 거인의 힘이 거둬질 것만 같았다.
거인의 힘마저 사라진다면 내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나는 내 생명줄인 것처럼폭군의 검을 쥐고는 거세게 휘둘렀다.
콰과가가가아앙!
폭음이 울리며 바닥이 부숴지고, 튀는 돌무더기를 피하려 여름의 도살자가 뒤로 몸을 물렸다.
나는 거기에 따라붙으려 애써 검을 휘둘렀지만, 도끼날이 그 공격을 거둬냈다.
씨발놈, 작작하고 좀 쳐맞아주지.
나는 치밀어오르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래서 나는 도끼에 겹쳐진 검날을 애써 끌어내리고, 그 빈틈에 어깨를 들이박았다.
뻐어억!
도살자의 갑옷이 부숴진 덕에 내 어깨빵은 맨살에 강하게 틀어박혔고, 바닥을 나뒹굴던 여름의 도살자는 입에서 무언가를 토해냈다. 바닥에 파이는 도랑이 깊었다.
"크흡…."
"후우…."
녀석은 겨우 숨을골랐고, 나는 벅찬 숨을 억지로 뱉어냈다.
우리의 전투는 이렇게 지지부진했다.
나는 재생이 있고 데미지가 높지만 기술이 개후달렸다.
반면 저 씹새끼는 체력이 바닥이지만 기술이 개쩔어서 내 공격이 쥐뿔도 먹히지 않았다.
그 점이 좆같았다.
조금만 더 한다면 손에 닿을 거 같은데, 뭔 짓을 해도 붙잡히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겨루기 시작한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싸움은 명확한 고착 상태였다.
PVP에서도 그랬지만, 실력이 비등하다면 고착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면 서로 빈틈을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실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의미 없는 공방을 나누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이어나가게 된다.
지금의 양상이 그랬다.
승부를 내려거든 과감하게 한 발 내딛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마음을 굳혔고,여름의 씹새끼 역시 그러한 듯 보였다. 녀석은 결심이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자세를 잡았다.
내게는 무슨 자세가 좋고어떤 자세가 어떻고 하는 저런 기술적인 지식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이런 자세가 강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이 있을 뿐.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자세를 모방하기로 했다.
다리를 크게 벌리고, 오른 어깨 위로 대검을 굳건하게 들었다.
철컥
게임에서 해방자가 사용하는 폭군의 검 모션이었다.
여름의 도살자는 나를 보더니 달려들었고, 나 역시 그에 맞서 달려들었다.
내가 발을 박찰 때마다 파공성은 점차 강해졌고, 여름의 도살자는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점점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지는 걸 보면서 숨을 들이켰고, 그대로 내면 속에서 한 마디를 부르짖었다.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도끼는 내 머리를 향해 쏘아졌고, 나는 그보다 살짝 느리게 대검을 내리찍었다.
이대로 맞선다면 지는 건 나다. 내 머리를 향해오는 도끼는 단순히 시야가 좀 넓을 뿐인 투구를 종잇장처럼 썰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충돌 직전, 마지막 순간에 몸을 틀었다. 조금 더 오른쪽을 향한 몸뚱이는 멈춰세우는 다리에 따라 감속을 시작했고, 나는 너무도 느린 세상 속에서 대검을 내리그었다.
콰득!
카드드드드드드득!
내 어깨를 도끼가 찢어발겼고, 내 대검이 여름의 도살자의 몸뚱아리를 으깼다.
촤아아아악!
피가 뿜어져 나오고, 손에 생소한 감각이 내달렸다. 생살을 망치로 짓이기는 것만 같았다.
서로 지나치가며 베어낸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있었다. 등을 맞대다시피 하고 숨을 골랐다.
등 뒤에서 피가 치솟는소리가 들렸다.
내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피 탓에 내손에서 검이 미끄러졌다.
덜그럭 하고 울리는 쇳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왼손을 단단히 쥐었다. 피로가 천천히 발밑에서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악으로 버텨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이 새끼는 살아있다.
꾸구구구
단단히 쥔 주먹 위로 거인의 힘이 내달렸다.
산을 뽑아서 휘두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거력이 거세게 심장을 태웠다.
전신의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빨리 주먹을 내지르라고 재촉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자 귀에 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적이 세차게 타오를 무렵, 나와 녀석은 서부극의 총잡이마냥 동시에 등을 돌렸다.
마주본 우리는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녀석은 도끼를 들고, 나는 주먹을 들어올려서.
서로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공격을 그 손에 담았다.
콰아아아아!
타오르는 도끼가 닿기 전에, 내 주먹이 닿았다.
뿌드드드득
내 주먹이 여름의 도살자의 얼굴에 꽂히고, 한계까지 가속된 나의 정신이 선명하게 살을 터트리는 촉감을 주먹에 전했다. 완벽한 카운터였다.
나는 구부린 팔꿈치를 폈다.
다리를 앞으로 딛었다.
주먹을 더 단단히쥐고 내질렀다.
그러면서 한계까지 차오른 숨을 뱉었다. 고함이 뒤따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투콰아아아아아앙!
내 주먹에서 대포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여름의 도살자가 날아올랐다.
마치 물수제비처럼 여름의 도살자는 날아가면서 이따금씩 지면에 추돌했고, 추돌할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구르고는 다시 튕겨져 나갔다.
드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앙!
여름의 도살자는 바닥을 마구잡이로 긁으며 나아가다가 벽에 부딪혔다.
후두두둑
벽에 걸려있던 파편들이나 잔해가 마구잡이로 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 폭발처럼 피어올랐다.
녀석은 그 사이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집어들었다.
집어든 도끼는 갑자기 크기가 줄어들었고, 한손도끼에 가까운 사이즈가 되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나는 밀려오는 탈력감을 느끼며 여름의 도살자에게 걸어갔다. 피어오른 먼지는 천천히 걷혔다.
뚜둑 툭
녀석의 남은 뿔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얼굴은 박살나서 이제 양쪽 눈이 모두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크게 갈라진 상처는 가슴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새겨져 있었다.
놔둬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새끼를 직접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끼를 치켜드는 순간, 이 새끼가 말했다.
"멋…지군."
힘겨운 목소리로, 여름의 도살자는 억지로 말을 뱉어냈다.
"이게… 진, 짜 해방, 자…."
양쪽 눈은 전부 뭉게져 보이지 않을텐데도, 녀석은 내가 있을 방향을 올려다봤다.
존재하지 않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이겼다…."
여름의 도살자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도끼를 높게 들어올렸다.
도끼날에 담긴 화염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콰득!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권능 - 화신 강림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암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