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여름의 도살자
…여긴 어디야.
문득 정신을 차리니 무척이나 낯선 공간 속에 있었다.
근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한 번 와봤던 곳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공에는 구멍이, 얼어붙은 채로 뚫려있었고 구석에는 뭔얼어붙은 검은 혈관 같은 것들이 널려있었다.
존나 크고검은 공간에 그정도 소품이 전부였다.
나는 여기가 신들이 땅따먹기 했던 공간임을눈치챘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내가 병신이진 않았다.
지난 번처럼 내가 알몸인 것도 있었지만.
"…허어, 겨울과 봄이 왔다갔었군. 왠지 유난히 잘 피한다 싶었는데."
그런 기묘한 공간에는, 방금 전 도끼로 두개골이 쪼개져 죽었던 한 남자가 서있었다. 다행히 이 새끼는 알몸은 아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며 손을 들어올렸다.
"어, 그냥 대화를 하려는 거니까 손은 내려놓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말아쥔 손가락은 인중을 때리기에 적합한 형태로 움직였다.
"진정하고 말을 들어라. 부탁이니."
"뭔데 씨발놈아."
내가 알몸으로 웬 사내새끼 앞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존나 빡치게 했다.
그래서 일단 인중부터 때리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남자,여름의 도살자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멈추고는 웃었다.
"나는 네게 선물을 주러 온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모습이 부담이 된다면 네 취향에 맞춰주지."
딱!
녀석의 손가락이 마찰하더니, 원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녀석의 모습이 바뀌었다.
검은색 단발이 잘 어울리는, 두 개의 안으로 굽은 뿔이 머리 양쪽에 달린 호박색 눈동자의 미녀.
나는 그런 여름의 도살자를 보며 다가가.
"악!"
인중을 때렸다.
물론 좆같음은 덜어졌지만, 여전히 내 내면으로 땅따먹기를 하러 왔다는 사실은 차이가 없었다.
"끄으…."
"그거 가지고 엄살은."
방금 전까지 벌이던 살육전을 떠올리면, 이건 명백한 엄살이었다.
여름의 도살자는 제 하관을 손으로 감싸고 아파하더니 말했다.
"아니, 진짜 아프단 말이다. 그 소녀가 불쌍해지는데… 이런 걸 그렇게 때려댔다니."
제 인중을 몇 번 쓸어대던 여름의 도살자는 겨우 손을 치우고는 말했다.
"우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니까 진정해라. 나는 죽었다."
"그럼 넌 뭔데. 죽었으면 혀 빼물고 누워있어야지."
"음… 그렇게 추하게 죽은 건 아니지만… 대충 설명하자면 네가 흡수한 신성에 섞인 내 영혼 정도로 생각해다오."
뭐라는 거야.
신성은 또 뭐고.
이 세계에 영혼이고 자시고도 있었나?
하기야, 마법소녀 해골 틀딱(남)도 있는 걸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 준다는 건 뭔데. 내 몸을 줄게 이딴 거면 패버린다."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긴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 진정하고 제발 그 손 좀 내려라."
나는 말아쥔 손가락을 풀고는 손을 내렸다.
여름의 도살자는 그제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를 죽인 걸 축하하마."
여름의 도살자가 또랑또랑한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해서, 나는적당히 땅에 주저앉았다.
애초에 이게 땅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던 신성에 얽힌 이야기지만… 이미 권능을 몇 개 갖고 있으니 간단히 설명하겠다. 너는 나를 죽이고 나의 신성과 나의 화신을 흡수했다."
문득 내가 이 새끼의 골통을 쪼개고 들려왔던 기계음이 떠올랐다.
뭐랬더라, 화신 강림?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뭐가 맞는데. 쳐맞을라고.
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며 인중을 조준했고, 여름의 도살자는 제 하관을 손으로 감싸 가리고는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손바닥 탓에 웅얼거렸다.
"…그 권능의 위력은 네가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강대할 거다."
"존나 자신만만하네. 나한테 뒈진 새끼가."
"…너무 그러지 마라. 너도 꽤 아슬아슬 했잖나."
"아닌데? 아니어도 내가 이길 거였는데?"
여름의 도살자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래, 패자와 망자는 말이 없는 법.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나를 모욕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 위력은 네 눈으로 직접 보게될테니."
그…가 아닌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허공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겨울의 폭군이 눈을 쏟아부어서 부숴버린 허공을.
그 허공에는 갑자기 뭔 화산을 비추는 화면이 생겨났고, 그 화면에는 익숙한 투기장이 있었다.
완전 개박살났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그 화면이 점차 투기장을 향해 가까워지더니, 익숙한 사람들과 존나 잘생긴 남자가 보였다.
아, 그 잘생긴 놈은 나였네!
"…좀 기분 나쁜 표정이군. 네가봐야할 건 그게 아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휘저으니 화면이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투기장 밖으로,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버린 흔적을 따라, 그렇게 비춰지는 장소에서는 꽤 낯선 것들이 즐비했다.
"오…."
그건 투기장으로 몰려오는 일종의 병력처럼 보였다.
피부에 돋아난 검은 혈관과 제일 선두에 선 기괴한 괴물의 형상을 볼 때….
"봄의 개새끼군."
"음? 아니, 봄의 순례자다."
그녀는 정정하더니, 내게 다가왔다.
"아무튼, 봄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몸을 노려왔다. 자신의 유일한 약점이 불이니 불에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는 나의 몸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는 거겠지."
"그 야망이 뭔데 씹덕아."
"나도 모른다. 봄은 우리 중 가장 교활한 자여서, 실제로 말했더라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니."
그렇군.
대충 봐도 음침한 개새끼긴 하다.
"봄의 순례자는 자신의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어 네게 찾아왔고, 너는마침 절체절명의 위기지. 나와 싸우는 것으로 심신이 모두 소모되었으니."
"뭐, 그렇긴 하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저렇게 많으면 화염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난 번처럼 원거리 공격 위주로 대응해오면 금세 벌집이 되어버릴테니.
뭔가 범위 공격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메이가 갖고 있는지 물어봐야하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여름의 병신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가져간 권능은 지금 상황에 딱 걸맞는 권능이니."
화신 강림이?
이름만 들어보면 딱 소환계 같은데.
"자세한 건 직접 사용해보면 알 거다. 어차피 나도 너를 이 잠재의식에 붙들어두는 건 더는 무리다."
그녀는 왠지 애틋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고맙다. 나의 대전사여."
뭐가 고맙냐고 묻기도 전에 세상이 천천히 무너져갔다.
하늘과 땅이 유리처럼 깨져 흘러내렸고, 여름의 도살자는 그렇게 떨어져가는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고 있었다.
*
"…씨발."
머리야.
나는 입안의 신물을 겨우 삼켜냈다.
"현성아! 괜찮아?! 언니! 현성이 일어났어요!"
메이는 깨어난 나를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고, 나는 눈을 돌려 겨울의 처녀를 보았다. 겨울의 처녀는손에 든 병을 떨어트리고는 내게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좆된 탓인지 그 부드럽고 큰 실크 코팅 가슴의 감촉은 느끼지 못했다.
운이 없군.
"저는 괜찮으니 놔주셔도 됩니다. 진짜로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걱정받는 거 좀 좋은데?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껴안고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봄의 개새끼가 이끌고 온 병력은 착실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조만간 여기에 들이닥치겠지.
나는 겨울의 처녀가 쓰고 있는 베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눈가를 훑어 닦아주고는 그녀의 팔을 풀었다.
"움직이시면 안돼요. 아직 몸이…."
나는 그녀가 말을 더 꺼내기 전에 베일 속에 있는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손님이 있어서요."
그녀는 조용해지더니, 흠칫했다.
"이 수는…."
"존나 많죠."
메이는 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탓인지 우왕좌왕했고, 나는 그런 메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탈력감은 개쩔었고, 거인의 힘 중복의 부작용인지 여름의 도살자가 쓰던 도끼조차 집어들 수 없을만큼 근력이감퇴되어 있었다.
아, 어쩔 수 없지.
권능 쓰면 될 거랬으니까, 이번만 믿어봐야지.
나는 투기장 밖으로 몸을 천천히 옮겼다.
메이와 겨울의 처녀가 그런 나를뒤따랐지만, 부축하기만 할 뿐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좀 더 말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안 말리냐."
"항상 네가 뭘 하면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믿어보자 하구…."
아, 기특한 녀석.
나는 메이의 말에 웃어주고는 투기장 정문에 몸을 기댔다.
"히익."
"오."
메이는 경악했고, 나는 좀 놀라웠다.
진짜, 끝도 안 보이는 행렬이었다.
수도 수지만, 종종 섞여있는 괴물은 딱 보기에도 존나 세보였다. 팔이 네 개인데 그 굵기가 내 흉통보다 컸다.
"어, 어떻게 할 거야? 역시 도망?"
메이는 안절부절하며 내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내면으로 잠수했다.
그리고 나는 여름의 도살자를 죽이고 들었던 기계음을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되뇌였다.
이 몸, 강림.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
바로 옆에 있던 메이의 달뜬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끔찍한 적막이.
뭐지 씨발?
익숙한 느낌이 들어 문득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나는 들었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저 멀리, 하늘을 넘어 저 아득히 먼 곳에서 토해져 나오는 산양의 울음소리를.
그리고 그 소리는 나만 들은 게 아니었다.
메이는 그 포효에 몸을숙였고, 겨울의 처녀는 숨을 죽였다.
뭔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쪽을 향해 밀려오던 봄의 순례자들이 멈춰서고는 메이처럼 몸을 바닥에 뉘였다. 엎드려 자비를 바라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도대체 뭐가 오는 거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틀었고, 그러자 내가 바라보던 하늘이 갈라졌다.
하늘을 쪼개고, 그 틈으로 무언가 떨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발굽은 타오르고 있었고, 그 어떤 생물의 다리보다도 굵고 강맹할 그 다리는 타오르는 털과 이글거리는 근육으로 이뤄져 있었다.
곧게 뻗은 다리는 엄청난 열을 뿜어내며 지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양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그 울부짖음에, 봄의 순례자의 통제를 받아야할 괴물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마치 맹수에게 쫓기는 것처럼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이런 씹―"
쿠우우우우웅
그 발굽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장소는 정확히 그 군세의 중심이었다.
그 자리에 종말이 피어났다.
콰 과 가 가 가 가 가 가 가 가 아 아 아 아 아 앙!!!
내 귀를 박살낼 것만 같은 폭음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열이 군세의 중심에서 휘몰아쳤다.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눈 앞에 손전등이라도 비추는 것처럼 눈부셨다.
나는 건틀릿이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눈앞을 가렸다.
직접 사용해보면 알 거라는 게 이거였나?
폭음은 끝도 없는 것처럼 이어졌고, 나는 결국 눈은 포기하고 귀를 가렸다.
몸을 숙였지만 여전히 눈은 박살날 것처럼 부셨다.
그 폭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졌다.
콰 아 아 아 아 아 아….
"씨발… 내 눈…."
폭음이 걷히고 나서야, 나는 눈을 조심스럽게 뜨며 눈가를 문질렀다.
흐릿한 눈 앞에 뭔 알 수 없는 불덩이들만 있었고, 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씨발."
점점 또렷해지는 시력이 비춰주는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분명 지평선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을 봄의 순례자의 군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군세들이 서있던 자리에는 잿물조차 아닌 약간의 그을음만이 남아있었다.
그 그을음이 무슨 도로처럼 내 앞에서부터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좆되네."
나는 뒤늦게 여름의 도살자가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 권능의 위력은 네가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강대할 거다.'
나는 괴물이었던 그을음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리고 실감했다.
화신 강림은 군단조차 침몰시킬 수 있는 위력의 권능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