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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화 〉왕의 귀환 (59/274)



〈 59화 〉왕의 귀환

목을 빠져나온 부러진 검날이 섬뜩하게 빛난다.
핏빛으로 물든 검날을 빼내며, 목을 부여잡는 시체를 발로 걷어찬다. 넘어진 시체는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지 못해 동공이 서서히 풀리고, 결국에는 죽는다.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 제 동료를 보고, 내 앞에 선 놈들이 분노하며 달려든다.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


내 옆에 있던 동료가 무어라 외치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앞의 괴물에게 의식이 쏠린 탓이다.
하지만 동료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나를탓할 수가 없었다. 괴물이 곧장 이 방향을 향해 뛰어왔으므로.


길쭉한 팔다리는 앙상하게 말라붙고, 머리에는 웬 해골을 들러붙인 채로 사족보행을 하다시피 하는 그 괴물은, 양손에 어느새 빼앗은 부러진 장검과 휘어버린 철퇴를 들었다.
내 동료는 날아드는 철퇴를 막으려 방패를 들어올리지만, 괴물의 근력은 초월적이다. 동료는 방패를 꿰뚫은 메이스가 제 가슴팍을 으깨버리는 걸 보고서 몸을 쓰러트렸다.

왜 나는 싸우지 않지? 지금  힘이라면 이런 건 좆도 아닌데.
그래서 무기를 드는데, 내 손에 들린  그레이톰의 심판도, 폭군의 검도 아니다.
어린아이조차 다루기 쉽게끔 개량한 쇠뇌.  손에 들려있는 건 그게 전부였고, 내 허리춤에는부무장이랍시고 쥐어준 것인지 조막만한 나무몽둥이가 전부였다.

어? 이걸로 싸우라고?
죽어버린 동료의 무기라도 빌려야 한다. 거인의 힘이라도 킨다면 상대할만 할테니까.
나는 괴물에게달려드는 다른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사이에 방패를 들고 죽은 동료의 시체를 뒤졌다.
그렇게 찾아낸 장검, 왠지 내 손에는 커다란 장검이었다.

"―!"


내 동료들은 무어라 외치며 나에게 손짓하지만,  손짓은 오래 가지 못헀다. 그들은 괴물이 전력으로 휘두른 둔기에 맞아 쓰러진다.
씨발, 사람 죽는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나는 거인의 힘을 사용하려 내면으로 침잠하려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요하다. 내 내면은 공허하다. 권능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제서야 나는  손을 내려다볼수 있었다.


"―!"

내 손은 아주 작았다. 중학생도 되지 않았을 작은 손, 굳은살은 커녕 손가락마저 길지 못한 어린아이의 손.
나는 내 손에서 눈을 돌려 앞을 보았다.

뿌드드득!


귀마개를 쓴 것처럼 철저한 묵음 속에서 괴물이 동료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소리만이 생생했다.
그 괴물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나는 뒤늦게 내 시야 귀퉁이를 밝히는 문구를  수 있었다.

[현재 회차: 1회차]

나는 비명을 질렀다.

*

병사들, 우리가 화산에서 돌아오면 우리를 돌보기로 했던 병사들은 잔뜩 겁에질린 채로 우리를 맞이했다.
하늘을 찢고 떨어져 내리는 신의 화신과 몰려가는 무수한 봄의 순례자들.
 광경은 그야말로 선명한 좆됨이었고, 그들은 산양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숨을 죽이며 민가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령 한 명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본진 측에서도 화신의 모습을 보고는 전령을 보내왔다고 했다.
전령은 그대로 귀환해서 본진에 있는 교단의 핵심층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게 몇 시간 전이고,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꿨던 뒤숭숭한  때문에 잠은  이상 오지 않았다. 괜히 심기가 불편하기만 했다. 한숨을 내쉬고, 빈둥대다가 겨울의 처녀에게 물었다.  게 없다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뭐.
 시덥잖은 악몽인지는 모르겠는데, 괜히 착잡해져서 병을 입에 물고 목청으로 술을 넘겼다.


"수리할 수 있겠습니까?"
"예, 어렵지 않을 같네요."


겨울의 처녀는  말을 받으며 갑주를 조그만한 망치로 두드리거나, 뭔지 알  없는 약품을 뿌리거나 했다.
무슨 제작 U튜브라도 보는 것 같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했고,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이 좆같은 다크 판타지에 떨어진지 몇달은 가볍게 넘었을 시점에, 나는 겨우신 하나를 죽였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앞에 띄워지는 메세지와 들려오는 기계음은 선명하게 여름의 도살자를 내가 죽여버린 게 맞음을 시사했다.

그 메세지에서 눈을 돌리며 손에 쥔 차가운 에일을 목 너머로 넘겼다.
크, 씨발. 이거지.
우울감이 조금은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너도  아슬아슬 했잖나.'

여름의 도살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덕분에 나는 조금착잡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새끼한테 내가 어차피 이겼을 거라고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솔직히 그건 누가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녀석은 강했다. 화염을 능수능란하게 써서, 내게 화염이 먹히지 않더라도  번이고 눈속임이나 연막으로 사용했다.
무기술 역시 완벽했다. 지금까지의 적들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들 거인의 힘을 켜기만 하면 쉽게 찍어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공격을 완벽히 흘려내며 반격까지 해왔다.


만약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죽는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캉, 캉!

겨울의 처녀가 본격적으로 수리를 시작한 갑주가, 점점 원형을 되찾아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 싸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화염 완전 내성으로 화염을 봉인하고, 거인의  중복 발동으로 녀석을 압도하는 근력을 얻은데다 빙결석으로 약점 속성까지 갖췄다.
위험할 때 사용해서 회피할 수 있는 영원의 정신 권능도 있었다.
그  무엇 하나라도 빠졌다면 그 자리에 죽어있는 건 나였을 거다.
그렇게 권능과 강력한 아이템으로 둘둘 둘렀음에도 압도적인 승리가 아닌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뒀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머지 신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을테니까.
여름의 도살자가 속임수나 거슬리는 짓거리를 안 하는, 진짜 상남자라 다행이었던 거지 실상 녀석이 허튼 짓거리를 하려고 했다면  승산은 지금보다 적었을 거다.

4신은 그렇게 강력했다.

기기긱


찌그러진 관절부를 악력으로 잡아펴는 겨울의 처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에일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아이템을 모으고, 메이를 강하게 만들고, 나 역시 싸움의 기술을 어느 정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떠오르는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뉘인 몸을 일으키고는 비어버린 에일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벌컥

"현성아!"
"어, 왜."

메이는 평상복에 가까운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사단장님이랑 사람들이 왔어. 너를 찾고 있대."


뭣하러 마중까지 나왔대.
나는 부르지 않은 택시를 타러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메이가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왜?"
"그…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

메이는 우려를 얼굴에 가득담아 나를 바라봤다.
흠, 뭔가 잘못됐나.


표정을 보자니 뭔가 잘못된  같긴 했는데, 솔직히 별로 걱정은 안됐다.
그래서 나는 메이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허리춤에 그레이톰의 심판만 두르며 밖으로 나섰다.


비교적 괜찮던  안에서 푹푹 찌는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좆같았다.

눈을 찡그려 겨우 앞을 보니, 마리암, 산적 두목, 기사단장을 비롯한 중책은 죄다 나와있었다.
이 새끼들은 안 덥나? 다들 중무장이었다.


오아시스에서도  화신 강림이 보였다고 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대전사님! 멀쩡하셨군요!"


기사단장은 멀쩡한 내 행색을 보고는 놀라워 하면서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붙잡은 의수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칼날이 달려있었다.
뭔 암살자 게임에 나올 법한 비쥬얼이라 눈이 갔다.

게다가 그들의 표정에서는 공통적으로 수심과 우려가 담겨 있었는데, 단순히 내 건강을 걱정해서 우려하는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유일하게 마리암 정도만 순수한 우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그렇게 된 건가.
 화신 강림은 얼핏 보기에도 천벌에 가까운 무언가였을 거다.
여름의 대전사가 그 신을 보러 가겠다고 찾아간  타이밍에 내린 천벌.
이들이 우려하는 게 뭔지 잘 알 수 있었고, 여기서 아가리를 잘못 놀리거나 행동을 잘못하면 진짜 사이비의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해결책이 있었다.
나는 기사단장의 손을 놓고, 메이에게 물러나도록 수신호를 취한 다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내 전신에.


푸화아아아아아악!

 눈앞은 일렁이는 화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교단의 사람들은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웅성대기만 할 뿐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사이비 짓을 준비했다.

"내가 여름이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내가 직접 성전을 이끌기 위해, 나의 대전사의 몸에 강림했다! 나의 대전사의 육을 빌려 너희에게 내 뜻을 전한다!"


화염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리고, 보이는 건 좆도 없었지만 얼추  풀리는 거라고 짐작했다.

"내가 그이고, 그가 곧 여름이니! 그를 위해 무기를 갈아라! 너희를 위해 단련을 멈추지 마라! 투쟁을 위해 불꽃을 가슴에 품어라! 성전은 곧이다!"


화염이 걷히자, 나와 마주서있는 교단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에 스치는 감정은….


"대전사! 대전사! 대전사!"

환희였다.


*


세레나 그레이톰은 부하가 건네는 망원경을 받아들어 앞을 바라봤다.
다가오는 인파는 뭔지 잘 모르겠는  것에 올라탄 채, 질서정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약진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최선두에 있는 전사는 위압적인 외양이었다.
후드를 두른 투구에 검붉은색의 묵직한 갑주.
한눈에보기에도 '나 셉니다.' 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오고 있었지?"
"그게… 1시간이 채 안됐습니다. 지금 다가오는 방향의 지평선에서 나타났습니다."

지평선이라.
세레나는 혼잣말을 흘리며 어떤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홧홧해지고는 했던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억누를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그가 떠났던 방향에서 몰려오는 인파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었다.

좋지 않다.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생각을 털어냈다.

"준비는 아직인가."
"거의 다 됐습니다, 성주님."

그녀의 말을 받은  그녀와 같은 생김새의 여자였다. 회색의 단발을 가지고 있는, 장궁을 손에 쥔 여자.
자경단의 우두머리이자 성주의 언니인 세네카 그레이톰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성벽 아래에서 보병들이 질서정연하게 성벽으로 올라왔고, 궁수들은 각기 망루나 성벽에 기대어 활 시위에 화살을 걸치고 있었다.

화살 끝에 달린 붉은 결정이 섬뜩하게 빛났다.

세네카는 세레나에게 고개를 한 번 돌려 안색을 살피고는 활을 들어올렸다.


기기긱


화살이 걸려진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세네카는 익숙하게 다가오는 군세를 바라봤다.
도시를 습격했던 사람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지금껏 도시를 빼앗고자 하는 귀족이나 왕가는 많았고, 세계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강도 귀족들이 그래왔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레나와 세네카는 도시의 단단한 성벽과 병력의 힘으로 그들을 물리쳐왔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가 화살을 쏘아냈다.


슈우우욱


날아가는 소리는 곧 멎었다.
화살이 그들의 최선두에서 다가오던 이의 바로 앞에 틀어박혔다.
훌륭한 경고 사격이었다.

화살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뭔 거대한 파충류에 타고 있던 전사는 내려서서는 천천히 성벽을 향해 다가왔다.


그 전사는 허리춤과 등에 커다란 칼을 걸치고 있었다.
왠지 기시감이 드는 행색이었다.

"정지! 여긴 성주 세레나 그레이톰과  일가가 다스리는 도시다! 귀측의 용건과 목적을 밝혀라! 경우에 따라서는 사격하겠다!"

세네카의 고함을 들은 병사들이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수십에 달하는 활이 한 전사에게 겨눠졌다.


그때 그 전사가 칼을 뽑아들었다.
뽑혀져나오는 칼날은 회색으로 빛났다.


"사격 준… 어?"

손을 크게 들어올리며 명령을 내리려던 세네카는 그대로 멈췄다.
무척이나 익숙한 검이었다.
드래곤을 베고 쫓아낸어떤 왕의 검과 닮아있었다.
심지어 그 왕을 옹립한지 얼마 안됐음을 감안하면 헷갈릴수가 없었다.


'설마 그분이  전사한테…?'

허무맹랑하다.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전사를 해치울 수 있는 자라니.
그래서 고민하는 세네카에게, 주현성은 쐐기를 박았다.

후드를 벗고,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웠다.
대부분의 자경단원과 세레나, 세네카에게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세네카는 황급하게외쳤고, 병사들은 기겁하면서도 활을 끌어내렸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바로 뒤에 있을 성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주님, 전하께서 돌아오셨…."


세네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한참간이나 훑었고, 그녀 바로 옆에 있던 하사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선수쳐 대답했다.


"성주님께서는 전하를 보시자마자 문을 열라고 명령하시곤 성벽에서 내려가셨습니다."


세네카는 그 말에 고개를 떨궈 성벽 아래를 보았고, 어느덧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과 그 성문에서 뛰쳐나와 주현성에게 안겨드는 제 철없는 동생을 볼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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