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왕의 귀환
세레나가 안내해주는 고대의 도시는 이전과 큰 차이가 났다.
흉하게 무너졌던 주거지나 녹아내렸던 성문은 어느새 조잡하게나마 수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죽어나갔던 병력도 어떻게 재충원을 해낸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경호 겸… 감시라고 해야할 것을 받으며 세레나를 따라갔다.
그녀는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내게 안겼던 일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귀엽긴.
"오랜만에 뵈니 기뻐서 그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뺨을 긁적이고는 내가 데려온 사람들을 봤다.
뭔 생각하는지 대충 알 것 같긴 했다.
대부분이 도적이라고 하면 딱 적당할 외모였고, 그나마 구색은 갖춰져있는 기사단도 있긴 하지만 아예 인간종이 아닌 아인 역시 섞여있는 독특한 구성.
나는 돌아봤다가 살로메와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존나 혀를 날름댔거든.
그러자 세레나는 내가 데려온 병력에 대해 물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이들을 이끌고 온 건 자의인지, 타의인지.
그리고 이들이 위험한 이들이 아닌 건 맞는지.
내 대답은 간단했다.
"뭐… 그렇게 위험한 이들은 아닙니다. 저를 섬기는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세레나의 표정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가 빠르게 돌아왔다.
나라도 안 믿긴 하겠다.
어느 이국의 야만인 새끼가 자기를 섬기는 종교인 단체를 끌고 왔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보겠지, 그냥 '아, 그러시구나!' 하고 넘어가진 않을테고.
하지만 그녀는 그 의구심을 입에 담지 않았고,그저 그러려니 하는 듯 보였다. 아니면 뭔가 계획이 있던지.
나는 그들의 면면 하나하나를 지목하며 어떤 사람인지, 교단에서 어떤 위치인지 세레나에게알려주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그 정보들을 기억하고는 그들에게 회색의 주인에게서 빼앗은 유적지, 칼날의 유적을 점거해도 좋다고 말했다.
기사단장을 비롯한 중책들은 그 말에 겨우 경계를 풀고서 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리품, 물자 등을 실은 도마뱀이 도시 한 켠으로 향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세레나를 돌아봤다.
"근데 거기에 저런 도마뱀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 주현성님이 없으신동안 나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그걸 저들에게 넘기는 게 그다지 반갑진 않지만… 주현성님이 바라신다면 어쩔 수 없죠."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언뜻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멀어지는 교단새끼들은 그걸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사이비들이 유적지를 향해 제 짐을 가지고 떠나자, 세레나는 본격적으로 나를 데리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솔직히 좀불안했다. 민중에서 비수 든 씹새가 튀어나와서 날 찌르려고 드는 게 아닐까 하고.
나를 왕으로 옹립했고 그걸 시민들에게 발표했던 일은 나도 함께해서알고 있었지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갑자기 생긴 왕은 존나 불길한 어감으로 밖에 통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떫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위궤양 오겠네."
세네카는 그런 나의 말고삐를 잡아끌며 숨죽여 웃었고, 세레나는 그런 나의 옆에서 말을 탄 채로 빙긋 웃었다.
우리가 가로지르는 도시의 길목의 양옆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나에게 선망에 찬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의 이미지가 좋다는 걸로 봐야겠지.
그게 수백 수천명 규모가 되니 왠지 속이 쓰릴 뿐.
"저 부족 전사들을 데려온 것도 컸을 겁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 대사막은 정복이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니까요. 사람 하나 살 수 없는 불모지에서 온 강맹한 전사들이, 왕의 앞에 자의적으로 무릎 꿇어 동행했으니…."
얼추 개쩌는 일이겠거니 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런 시선이 기분나쁜 건 아니다. 전사들을 데려온 건 그냥 내 욕심이랑 목표 때문이었지만, 그게 이렇게 좋은 결과로 다가오니 얼떨떨하긴 해도 기분은 확실히 좋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전사들이 뭔가 사고를 쳤을 때 내 이름값도 곤두박질 치리라는 거였다.
역사적으로도 이방인 전사들이 깽판치면 그걸 데려온 왕의 이미지가 좆되기 마련이니.
도적단이나 아예 아인 부족도 있는 이상, 엄격한 규율이 필요해보였다.
그런 규율이랑 내가 친하지 않으니, 주변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일단 짱깨라서 규율은 커녕 맹목적 복종 밖에 모르는 메이는 제외하고.
나는 머릿 속으로 이런저런 규칙을 세워보거나 하면서 얌전히 성주의 저택에 들어섰다.
*
"으… 더 못 마셔…."
덜컹
메이의 머리가 탁자에 내려앉고, 나는 그런 메이를 곁눈질로 보면서 술을 들이켰다.
내장이 홧홧해지는 느낌이 들어 고기 몇 점을 집어 입에 밀어넣고는 한창 내 무용담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산적 두목을 바라봤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고기에는 소위 불맛이라고 할만한 훈제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거 맛있네. 나중에 포장해달라고 해야지.
"그래서 말이지! 대전사공께서 앞으로 나서며 말하셨지. '저 놈은 이단이다! 토벌해라!' 대전사께서 그렇게 말하며 불타오르는 칼을…."
그 무용담은 이제 절정에 이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들으면서 기분이 묘했다.
남의 시선으로 듣는 나의 개쩔었던 순간들은 왠지 낯간지러우면서 기분 좋았고, 산적놈이 내뱉는 추임새나 말투는 왠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돋궜다.
이 새끼 후빨 좀 잘하네. 나중에연설시켜야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즐기시고 계신가요?"
겨울의 처녀는 그런 내 옆에 바짝 붙어앉아, 드물게 베일을 벗은 채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 위를 은은하게 감도는 홍조가 귀여웠다.
나는 그런 겨울의 처녀를 보고는, 씩 웃으면서 잔을 들어올렸다. 교단의 사람들은 내 그 사소한 행동에도 건배를 하고, 즐거워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겨울의 처녀는 그 소리들에 놀란듯 흠칫했다가 헤실거렸다.
"예, 덕분에요."
"그렇다니 다행이예요. 저도 당신이 있어 즐겁습니다."
그녀의 감은 눈이 살짝 떨린 듯 보였다. 나름의 눈웃음인가. 나는 몇 점을 더 집어 입에 밀어넣었고, 왁자지껄하게 술을 들이키거나 고기를 들이키거나 하는 이들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에 꼴아버린 메이를 세네카가 방에 데려다놨을 쯔음에 문득 마리암이 나에게 물었다.
"귀공, 대전사공.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녀는 술이 꽤 강한지, 얼굴에 미약한 홍조만을 띄고 있었다.
그래도 술기운이 아예 없어보이진 않았지만.
"예, 물어보세요."
나 역시 술은 강한 편이었지만, 슬슬 머리가 어지럽고 졸음이 은근히 몰려오는 게 슬슬 한계인 듯 싶어 술잔을 내려놨다. 내가 잔 내려놓는 소리에 좌중이나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이제 뭘 할 생각이야?"
뭘 하냐니.
나는 내 앞의 그릇에 놓여있는 고기를 뒤적거렸다.
괜히 뒤적이던 고기를 입에 털어넣고는 대답했다.
"일단은 좀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재정비도 하고 그럴 생각이었죠."
"아니, 그런 거 말고. 귀공이 앞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묻는 거야. 성전을 해야한다면서."
아,그랬지.
혹시 의심하나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지만, 표정에서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럼… 좀 더 뭔가 본격적인 질문인 걸까.
뭔가 그럴 듯한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술을 연거푸 아가리에 때려박았던 탓에 딱히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아, 몰라.
대충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쏟아부었다.
"나도 강해져야 하고, 여러분들도 강해져야죠."
마리암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술잔을 들이켰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삐걱하는 나무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다들 나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아직 봄의 순례자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놈의병력을 깎아내고 소탕하긴 했지만, 녀석의 본질은 순례자. 우리가 마지막 한 놈까지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지 않는 한 놈은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살아있는 이상 봄의 순례자는 이 도시를 노릴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세레나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여러분들께 바라는 건하나입니다. 이 도시에 머물면서… 단련을 하고 저를 위한 병사가 되어주십시오."
"그럼 귀공은?"
"저는 당신들의 왕이 되어드리죠."
머리가 좀 핑 돌지 않았더라면 좀 더 멋지고 그럴 듯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솔직히 졸리기도 하고.
나는 술잔 가득 따라지는 에일을 목구멍 너머로넘겼다.
내 말을 받은 건 마리암이 아니었다. 그간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만 있었던 기사단장이었다.
"왕국을 떠난지 10여년. 저와 제 기사단은 그간 섬길 왕을 찾아다녔던 모양입니다. 저, 퍼시벌 스트롱홀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걸보면서 눈을 돌렸다.
산적 두목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크게 웃었고, 마리암은 씩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하기야, 나라도 이렇게 잘생긴 메시아가 있다면 왕으로 섬기겠다고 하겠다.
"저희 부족 역시 저희를 지켜줄 강대한 왕국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사님께서 왕이 되어주신다면 저희 부족은 이견 없이 따르겠습니다."
나를 보며 혀를 날름거리는 살로메에게 애써 고개를 끄덕여주니, 세레나가 문득 말했다.
"직위나 상세한 방향에 대해서는 세부 조정이 필요하겠군요. 내일 아침 찾아뵐테니, 그때 얘기를 나눕시다."
사이비 친구들 중에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고, 돌아온 세네카는 뭔지 모르겠다는 무구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든 되는 법이었다.
나는 나를 왕으로 섬기겠다는 이들과 잔을 나누며 연회를 즐겼다.
*
새로 증축된 성주의 저택은 이제는 성이라고 불러야 할 규모가 되어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내가 머물 으리으리한 방까지 지어놨다고 했으니 나로서는 존나게 기쁜 일이었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넓직하고 딱 보기에도 푹신푹신해 보이는 침대를 보고는 뛸 듯이 기뻤다.
실제로 좀 뛰기도 했고.
나는 한창 침대 위에서 폴짝대다가 침대에 도로 누웠다.
푹신푹신한 양모의 감촉이 침대 아래에서 느껴졌다.
현대 사회의 매트리스 정도는 절대 아니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에 오고서 노숙에 가까운 생활만해왔다는 걸 감안하면….
최상위권이 아닐까?
"계속 이렇게 잘풀리면 좋으련만…."
여름의 도살자를 죽이고, 봄의 순례자 인중도 때려주고, 몇 번이고 날아가고….
그런 생활에서 그나마 벗어나 푹 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치였다.
내가 손에 넣은 푹신한 행복 위에서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똑, 똑
뭐야, 누군데.
알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나를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을리는 없었으니 나는 부담 없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새로 달은 나무문이 삐걱대며 열렸고, 그 너머에는 베일을 벗은 겨울의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 있었다.
와, 존나 예쁘네.
"겨울님이시군요. 어쩐일이십니까? 뭔가 상의할 거라도…."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가슴팍을 그 야무진 손으로 밀어 나를 도로 눕혔다.
응?
왠지 분위기가 묘하게 야시시했다.
"바라는 게 있어요."
"바라는 거요?"
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와중에, 그녀는 내 옆에 비스듬히 몸을 뉘이며 내 다른 손을 꼭 잡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손이 내 손가락을 끌더니, 겨울의 처녀가 입고 있는 실크 드레스 위에 얹혔다.
어, 이거 설마.
내가 짐작한 게 맞나 싶어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제 입술을 깨물더니 내게 달큰한 숨소리를 흘렸다.
"안될까요?"
그리고 그 차가운 손이 내 옷을 파고들길래, 나는.
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