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왕의 귀환
허리가 시큰거린다.
그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간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왠지 티를 내고 싶진 않아서 뒤척이는 척 허리를 문질렀다.
"허리가 아프신가요?"
…깨어있었나?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겨울의처녀…가 아닌 겨울의 신부를 바라봤다.
"…아뇨, 안 아픈데요."
"그러시군요."
그녀는 조용히 웃더니 내 가슴팍에 손을 얹고 제 머리칼을 사락대며 내게 다가왔다.
쪽
그녀는 가볍게 내 입술에 입맞추고는 떨어졌다.
"어제는 정말 굉장했어요."
이런 클리셰적인 대사를 이 사람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나는 생경한 기분에 괜히 그녀의 머리칼을 손 안에서 흘렸다.
"취기 때문에 그러신 게 아니셨군요."
"네, 예전부터 당신께 안기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답니다. 상스러운가요?"
"전혀요. 오히려 좋은데요."
"다행이예요."
그 예전이 언제부터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얼추 짐작은 가니 괜히 그녀의 뺨을 문질러댔다.
그러고보니 내 분신이 오늘은 아침 체조를 하고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즐거워했다.
이 요오망한 년.
"이제는 진짜 겨울의 처녀가 아니시네요. 뭐라고 해야할까요?"
"겨울의 신부라고 해주시겠어요? 당신께서는 저를 겨울이라고만 부르시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깍지를 끼고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는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내 맨살을 간질였다.
"제 신부가 되고 싶으시군요."
"네."
"와, 조금도 안 망설이시네요."
주변에 여자도 많아졌으니 직구라 이건가.
하지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안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 모험의 끝까지는 함께해야 하기도 하고.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다 입맞추려 고개를 숙였고.
"일어나셨습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린 탓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전하의 의향대로 세부적인 계획서를 가지고 왔…는데."
들어오던 사람은 세레나였다.
세레나는 멀쩡한 팔에 한 웅큼의 서류철을 낀 채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서는 약간의 당황감과 패배감 같은 게 느껴졌다.
못 읽을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자신 말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
"…좋은 아침입니다."
"…."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신으로, 다른 여자와 같은 침대에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었으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는 뻔해서, 내 두피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세레나랑은 한 번 잤던 적도 있었으니, 그걸 감안하면….
하지만 세레나는 발광하며 달려든다던가 하진 않았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세레나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고,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울의 신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게 머리를 기댄 채 조용했다.
*
피가 묻은 시트를 하인에게 맡기고, 나는 겨울의 신부를 대동한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밤에 오지게 해댄 운동 덕에 내 몸은 기진맥진했고, 영양을 호소해댔다.
뭔가 좀 먹어둬야지.
식당은 금방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이는 식당의 문을 열어젖히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과 세레나, 세네카, 메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아침 시간대를 넘긴 모양이었다. 나는 메이 바로 옆에 앉았다.
"안녕."
"응, 잘 잤냐? 어제 좀 달리던데."
"응? 안 달렸는데."
"아니, 술을 오지게 퍼마셨다고."
메이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왠지 얼굴 표정이 싸하고, 눈빛은 미묘하며, 얼굴색은 칙칙했다.
이새끼 숙취라도 세게 받고 있나?
괜시리 측은해졌다.
심지어 평소라면 와구와구 쳐먹었어야 할 식사를, 깨작대며 조금씩 퍼먹고 있었다.
먹는 속도만 느린 게 아니라 먹는 양 역시 그랬다.
평소답지 않은데.
"속 안 좋냐? 평소 같지 않은데."
메이는 떨리는 눈으로 나와 겨울의 신부를 한 번씩보더니 애써 웃었다.
"…응, 조금 그런가봐."
메이는 몇 번 더 깨작거리더니 스푼을 내려놓았다.
평소답지 않은데.
"힘들면 말하고. 약이라도 가져오게."
"아냐, 괜찮아."
별로 안 괜찮아보였지만, 그에 대해서 굳이 얘기를 꺼내더라도 대답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럼 다른 얘기로 넘어가서… 일단 신 하나를 잡았지만, 나머지 신을 잡는 게 그리쉽지 않을 것 같거든."
"응."
"그래서 좀 더 아이템도 모으고, 너는 마법을 배우고, 나는 싸우는 기술을 좀 배워야할 거 같아."
"…응."
반응이 밍밍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메이는 깨작대던 음식을 밀어놓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로메씨한테 마법은 잘 배우고 있지? 여름의 도살자한테는 화염이 안 먹혔으니 네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진 못했지만, 이 뒤부터 나올 새끼들은 화염이 잘 먹힐 수 밖에 없는 놈들 뿐이니까 너도 활약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좋겠네."
"나는 세레나씨한테 검술을 배워야겠어. 폭군의 검으로 검술을 구사하긴어렵겠지만, 그레이톰의 심판은 원래 여기서 온 물건이었으니까 세레나씨가 가르쳐주는 검술이랑 잘 맞을 거 같거든."
"그치."
맞장구 외에는 뭔가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눈에 걱정이 오롯이 담겼는지 메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다시 웃었다. 묘하게 기운이 빠지는 미소였다.
"난 괜찮아. 그냥… 숙취! 숙취 때문에 좀 기운이 없는 거니까."
슬슬 숙취 때문이 아닌 것 같아보였지만, 메이는 애써 그렇게 변명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이브가 진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 나는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좀 들어가볼게.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줘."
메이는 그릇을 내버려두고 황급히 식당을 떴다.
나는 그런 메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메이가 남긴 식사를 확인했다.
거의 먹지 않았는지 스튜는 거의 건드린 흔적도 없었고, 빵은 아예통째로한덩이였다.
씁, 짱깨답지 않은데.
나는 겨울의 신부에게 의견을 구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놔두라는 뜻이었다.
뭐 이상한 병이라도걸린 건 아닌가 걱정인데. 이래뵈도 메이는 내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동료가 아닌가.
나는 걱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놔둬도 괜찮은 건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레나는 내게 다가와 그렇게 말을 받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세레나의 뒤에는 세네카가 직립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회색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품에 안은 서류철을 뒤적였다.
"어제 연회에서 요청하셨던 건에 대해서 정리를 좀 해와서요. 가능하다면 집무실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 그거구만.
괜히 아침에 보여줘버린 광경이 떠올라 검연쩍었다.
"겨울님, 그렇다고 하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겨울의 신부는 내게 고아하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인사를 받으며 세레나와 세네카를 따라갔다. 집무실까지는 금방이었다.
집무실은 일전에 한 번 들렀던 적이 있는 만큼 익숙했지만 전과는 달리 몇 개의 가구가 추가되고, 몇 개는 없어져 있었다.
"좀 달라졌군요."
"예, 아무래도 규모가 커지다보니 부득이하게 구성에 손을 댔습니다."
오호, 그렇구만.
물론 자세하게 둘러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 수 있는 변화는 아니었고, 정확히 뭐가 바뀐 건지 알아낼 턱도 없었으니 납득한 척 하고 세레나와 마주앉았다.
의자는 얼추 0.5 게이밍 의자 정도는 됐다.
"어제 요청했던 거라면… 왕국이군요."
좀 술에 꼴은 상태에서 한 말이라 기억을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생각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네카가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집무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두께가 심상치 않았다.
"예, 아직 여름의 교단 측과 상세한 조율을 하진 않아 초안에 불과합니다만… 그래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현재 이 도시를 수도로 왕국을 세웠을 때 생겨날 공석과 각기 교단 측에게 걸맞는 중책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이 자료를 확인하라는 강한 심리가 숨어있었고, 나는 기껏 준비한 걸 무시할 정도로 개새끼가 아니므로 망설임 없이 자료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로 내려놨다.
언어적 문제는 아니었다. 다 읽을 수 있었고, 한자로 적혀있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내용이 어려웠다는 거다.
정리가 잘되어있고, 뭔가 핵심 같은 것도 추려놓은 것 같긴 한데 편의점 POS기를 다루는 거나 발주를 하는 것과는 난이도 자체가 달랐다.
"…왜 그러십니까? 자료에 뭔가 불충분한 거라도…."
세레나는 불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나는 손을 내저을 수 밖에 없었다.
차마 내아가리로는 '이거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갯어여.'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충 이해한 척 하기로 했다.
"아뇨, 훌륭한 자료입니다.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핵심도 잘 정리되어 있고 결론도 잘 나있네요. 이대로 추진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세레나는 밝게 웃으며 내가 도로 건네는 자료를 받아들었고, 나는 어떤 중책이 교단의 어떤 사람한테 돌아갈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이해했다는 표정을 가장하기로 했다.
약 한 달동안 사이비 짓거리를해온 내게 있어서 그정도 연기는 개껌이었다.
"조금 일찍 끝났네요. 역시 주현성씨는 대단하십니다. 이 두꺼운 걸 그렇게 빨리 파악하시다니."
사실 거의 안 읽고 건너뛴 탓이었지만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그럼 다른 용건에 대해서도 말해도 될까요?"
다른 용건?
뭐가 더 있나 싶어서 세레나를 바라보니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종자분과 그런 사이시라는 건 얼추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당황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하고자 해서…."
"아, 사과라면 괜찮습니다. 저라도당황했을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 그게… 저는… 주현성님과의 관계가 그저 즐기고 끝나는 관계로 끝나길 바라지 않습니다."
세레나는 평소의 당당하고 허세가 섞인 성격이 아닌, 뭔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라 좀 신선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명확해서 내가 입을 떡 벌리니, 그녀는 깊은 한숨을 뱉어내고서 말을 이어갔다.
"저와 제 언니 세네카까지, 첩으로 받아주실 순 없겠습니까?"
…네?
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아가리를 닥쳤고, 세레나는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첩이라면, 그러니까, 그냥 섹프 정도나 몸 몇 번 섞는 게 아니라… 나랑 아예 대놓고….
물론 세레나야 나한테 호감을 가진 게 뻔하게 드러나긴 했다지만….
복잡한 마음에 그녀 뒤의 쌍둥이 자매에게 물었다.
"…세네카씨의 의향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첩이라던가 그런 문화가 중세에 가까운 이 다크 판타지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본인의 생각 정도는 물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그런 현대인적인 관점으로 접근했고, 세레나는 대답했다.
"…제 언니도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에이, 그럴리가.
나는 내 조금 뒤에 직립하고 있는 세네카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린 채 제 손목을 만지작 거리면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자매덮밥이라고?
그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합법적 자매덮밥이라고?
뭇 남자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 미녀 자매덮밥.
나는 그 광경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허리야, 이건 못 참겠다.
나는 허리에게사과했고, 내 허리는 내사과를 받아들여 열심히 일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