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64/274)



〈 64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내 침실은 하루도 비어있었던 적이 없었다.
 생각엔  멀쩡한  같았는데, 겨울의 신부는 내 몸이  회복되었노라고 주장했고, 그런 탓에 나는 무리하지 않고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침실로 갔다.


대부분은 겨울의 신부가 있었고, 종종 세레나와 세네카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 혼자 자는 날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밤이 지나면 나는 세레나에게 검술을, 마리암에게 온갖 잔재주를 배웠다.


마리암의 잔재주는 쓸모있는 게 많았다. 무기를 떨어트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수싸움에 걸려들지 않으려 방어적으로 나서는 적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도끼를 어떻게 던지고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도끼로 무장을 해제시키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도끼술이 검술보다는 배우기 쉬웠다.


한 마디로 내 뚝배기에 세레나의 목검이 부딪힌 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으겍."
"아."

그녀가 한손으로 휘두른 한손검이 아래에서 올라오는가 싶더니 손목을 뒤집자 내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눈앞이 순간 뿌옇게 되고, 티비에서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 같은 게 머릿 속에 가득차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존나 아프다고.


나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세레나가 숨을 삼키고는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성씨! 괜찮으십니까? 많이 아프세요?"


세레나는 내 그런 모습에 우물쭈물 하면서 내 모습을 살피더니,  머리를 당겨서 품에 끌어안았다.
오, 은근히 풍만하네.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가슴에 안겨있자니 통증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괜찮은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정신을 놓으셔서 본능적으로 그만…."

 그런 본능을 갖고 있는 거야 씨발.
하지만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가슴팍에 안겨서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거든.
나중에 겨울의 신부한테도 해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세레나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니, 세레나가 실실 웃더니 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렇게 안긴 채로, 내가 멍때린 이유를 실토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세레나는 며칠 전에 나와 동침했던 이후로  더 나에게 서글서글했고, 나 역시 그녀에게 이야기 하기 편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다가도 안대를 두른 그 카리스마 있는 얼굴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랑 있을 때는 딴 생각하지 말아주시죠."

그리고는 잠시  얼굴을 물끄러미 보길래, 나는 내가 하던 생각을 뱉어냈다.

"요즘 메이가  침울해보여서 말입니다. 동향 사람이기도 하고, 좀 걱정도 되고 말이죠."
"아… 하긴, 제사장께서도 요즘 진도가 지지부진하고 의욕이 없으시다고 하셨죠. 저도 마법에 재능이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 보면메이씨가 정말 부럽습니다."

제사장, 살로메는 메이에게 마법을 가르쳤고, 그건 사막에서부터 이어져온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수척해지고, 침울한 모습인데다 성취도 예전같지 않다고 살로메가 나한테도 고해왔었다.

물론 그렇다고 팽한다던가  생각은 없었지만, 같은 현대 출신의 메이가 수척하다면 나 역시 걱정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력은 정말 적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뭔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불안한데, 내가 눈치 못채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세레나는 내 고민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몇 번 더 내 머리를 쓰다듬고서 이마에 짧게 입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면 한  쯤은 메이씨와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생긋 웃더니 내가 떨어트렸던 목검을 주워들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가서 한 번 말해보세요.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할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녀는 웃으며 물러났고, 나는 훈련용 공터를 가로지르는 메이에게다가갔다.


*


"저거 봐! 맛있겠다!"

메이는 내 손을  잡은 채로 거리를 걸어다녔다. 걸음에서 망설임이나 고민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지금이 진짜 즐거운 것처럼 굴었다.
무슨 소풍 나온 어린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씁, 그냥 기분이  좋은 거였나?
나는 이런 순진무구한 메이의 즐거움과는 정반대인 목적지를 떠올렸다.

"현성아, 저기 사람들이 너한테  흔들어."


어느새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메이는 이제 나를 부를 때는 야, 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나도 짱깨나 젖통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메이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게 손을 흔드는 사제복 차림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들은 만족해하며 지나갔다.

살기 각박한 세상이다 보니, 전투능력을 높게 쳐주는 여름의 교단은 빠르게 부풀었다.
나는 내게 인사를 건네오는 시민들이나 여름의 교단에 심취한 자경단원을 보면서 그걸 실감했다.
심지어 공터를 점거하고 주먹다짐을 교단의 이름 아래에서 행하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진짜 존나 이상한 종교네.
그들을 지나치며 대로를 가로지르자, 금방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 도착이네."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큼직한 나무잔 그림에 뭔가 알  없는 나뭇잎 같은 게 배경으로 그려져있는 간판을 지나치고는 큼직한 나무문을 밀어 열었다.


선술집, 나와 메이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한 선술집이었다.
메이는 내게서 도망칠 때까지만 하더라도앉아있었던 자리에 걸터앉았고, 나는  맞은 편에 앉고는 주문했다.


소세지  개와 에일이 나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여기서 나한테 도망쳤었잖아."
"그치! 나 진짜 무서웠어."
"내가?"
"응, 완전 화나서 나한테 달려드는데, 너무 무서웠어."

호오, 그랬나.
하기야, 당시의 나는 존나 빡쳐있긴 했다.
웬 핵쟁이 때문에 다크 판타지 속으로 떨어져서뒈질 뻔 하면서 겨우겨우 도시로 기어올라왔으니.


물론 얘 잘못이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따지기엔 너무 예전 일이었다.
나는 소세지를 집어먹고, 에일을 들이켰다. 메이는 술이 약한지 천천히 마셨다.

"마법은 잘 되어가?"
"음… 요즘은 조금…."


말  하지 않아도 결과를 알고 있지만, 나는 일부러 메이의 입에서 듣기 위해 턱을 괴고는 말을 기다렸다.


"잘 안되구 있어…."
"왜? 뭐 어려운 거라도 있어?"

메이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를 몇  봤다.
음,  방향으로는 실패인가.
나는 괜히 메이에게 몇  더 권유했고, 메이는 내 권유에 헤실대면서 받아마셨다. 금방 취기가 오르는지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근데 요즘 가슴이  더 커진 거 같다?"


메이는 다시 윗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개쩔었다.
나는 그 윗가슴에 일부러 시선을 던졌고, 메이는 얼굴이 붉은 채로 눈을 돌리기만 할 뿐 별 말을 하진 않았다.

흐음, 확실히 평소랑 다른데.
평소라면 나한테 주먹 휘둘러대면서 투닥댈 타이밍인데.

확실히 메이는 평소와 달랐다. 뭔가 고민이 있었고, 뭔가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도시에 돌아온 이후부터 저랬던  감안하면 병도 아니다. 뭔가 고민이 있는  분명했다.
결국 나는 직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그리 침울해 보이는 거야? 주석 죽은 것도 아닌데."

주석을 언급한  일부러 던진 어그로였고, 메이는 그 떡밥을 물진 않았지만 마음을 굳혔는지 망설이더니 나를 올려다봤다.
눈에는 은은하게 물기가 감돌았다. 촉촉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메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사실…."


덜컹!

아, 씨발. 중요한 타이밍인데.

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뒤로 돌았고,  눈에 한 명의 병사가 보였다. 입고 있는 갑주가 익숙한 판금제인 걸 보면, 기사단 측의 병사였다.
중장병이라고도  수 있을 이들은 기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성문 방어에 주력하기로 했었는데….


왜 여기에 있지?
내 의구심을 눈치챘는지 병사는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투구를 벗어 갈색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전하! 여기 계셨군요! 긴급히 전하를 성벽으로 부르라는 기사단장님의 호출입니다."

뭔데.
너희는 왕을 오라가라 하냐, 하고 싶었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전력은 나였다.
이미 몇 번 몰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화신 강림을 퍼부어 효율적인 방어를 해보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왠지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메이를 일별하고는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제가 필요한 정도의 일입니까?"

병사는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지평선에서 병력 한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전원 인간에, 정규군으로 의심되는 질 좋은 병력입니다! 심지어 공성병기도…!"

나는 병사의 입을 틀어막았고,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선술집 안에 있던 일련의 사람들이 나와 병사를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재임 기간에 좆같은 일 일어나면 진짜 반란각인데.
나는 빠른 수습이 필요함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이 선술집만 오면 해프닝이 터지는군요. 성으로 가서 갑주만 갖춰입고 가겠습니다."


병사는 이론을 대지 않았고 메이는 나를 따라 일어났다.
우리는 성에 들리자마자 필요한 무구와 장비를 갖춰 바로 외벽으로 향했다.


높다란 20m 높이의  위에서는 기사단장과 성주 세레나가 나란히 서있었고, 세레나는 나를 보자마자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 보시죠."

나는 세레나의 말에 따라 난간에 다가가 밖을 들여다보았고,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일련의 병력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최선두는 말에 올라탄 상태였고, 무기도 상태가 좋은데다 전신에 화려한 판금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병력 역시 무장 상태나 사기가 좋아보였고, 그런 자잘한 병력들은 하마한 상태로 기사들의 뒤를 메꾸고 있었다.


"…좆되네요."
"그렇죠."

메이가 내 말에 손을 꼭 잡아왔고, 나는 갑주가 완전히 망가져 로브를 두르고 있는 메이를 흘깃 보고는 다시 병력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가 알기로는 모든 국가는 파멸했다. 고대의 도시를 거점으로 택한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마법적으로 강화된 외벽은 앵간하면 뚫리지 않는다.
방어적인 성향의 세레나는 고대의 도시 방위에 집중하는 편이니, 뭐라도 날아오는 게 아닌 이상 별 일이 생기진 않는다.

그런데 그런 도시 바로 앞에, 공성병기를 대동한 정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이벤트가 게임에 있었던가?
아니, 분명히 없었다. 이 망할놈의 다크 판타지라서 생겨난 예외로 봐야했다.
내 확신과 동시에 병력이 갈라지더니, 그 인파 사이로  명의 여성이 걸어나왔다.

길게 기른 금색 머리칼은 등 뒤에서 찰랑대고, 간단한 흉갑에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손에는  눈에 보기에도 실전성이라고는 좆도 없어보이는 예식용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날은 그걸 들고 있는 주인의 눈동자처럼 보라색이었다.

올곧아보이는 얼굴과 은은히 느껴지는 카리스마, 그걸 보고 떠올린 생각을 병사 중 하나가 입에 담았다.

"여왕…."

한 눈에 보기에도 공주 내지는 여왕  되어보이는 인물이   앞에 서서 장검을 들어올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라색 검날로 나를 겨누면서 그 여자가 외쳤다.

"들으라, 왕을 참칭하는 자여! 짐은 레크노미어 왕가의 여왕, 샤론 레크노미어다! 그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안하겠다! 무릎 꿇고 짐에게 복종하라! 그대의 도시를 양도하라! 대가는 그대의 목숨과 작위다! 거부할 시…."


그녀의 뒤에 있던, 뭔 알 수 없는 공성병기가 기이이 하며 울었다. 그녀는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있었다.

"도시를 함락시키고, 왕가에 항명한 죄로 처형하겠다."


얘가 미친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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