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65/274)



〈 65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느그 부모님이 잘 모르는 사람 도시 뺏는 게 상도라고 가르치든? 어디 날로 쳐먹으려고 해 씹새끼가."


그리고 나는 미친년한테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저만치에 있는 여왕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꾸준히 아가리를 털었다. 물론 다크 판타지 새끼들은 모욕이 잘 안 먹히는 것 같았지만.

"레크레이션 왕가니 뭐니 하는 것도 씨발 그런 도둑질 심보로 살아왔냐? 아주 대단하신 왕가 납셨어."


화신 강림만 써도 잿더미가 될 새끼들이 어딜 날로 먹으려고 지랄이야.
 말이 그치자 적막이 찾아왔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단장의 표정은 당황이 감돌았고, 세레나는 별 표정이 아니었으며, 메이는 좀 침울한 표정이었다.
뭔데 씨발.

"이, 이 무례한 녀석! 뚫린 입이라고 레크노미어 왕가를 욕보였느냐!"

오?
나는 성벽 아래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떨궜고, 레크레이션 여왕이니 뭐니 하는 여자가 노발대발하며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고 하는 모욕을 들을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타격은 전혀 없는 모욕들 뿐이었다.

외모는 쿨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의외로 도발이  먹혀들었다. 오히려 너무 잘 먹혀서  놀랄 정도였다.
다크 판타지 주민들은 모욕이 잘  먹히는 거 아니었나?

나는 슬슬 내 사지를 끊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나는 그 말을 뱉어내면서 화를 내고 있는 여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쿨한 외모에 진짜 판타지 주민이라는 게 체감되는 보라색 눈동자, 그에 잘 어울리는 선명한 금발.
현실이었다면 모델로도 활동할 수 있을 법한 고귀한 외모였지만, 왠지 모를 어리숙함이 있었다.


편의점 점장으로 활동해온 나는  수 있었다.
저건 사회 초년생이라고.
이제 딱 20살 정도일까.

"…전하."
"예?"

찬찬히 그 외모를 뜯어보고 있자니 기사단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기사단장을 마주봤고, 기사단장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존나 착잡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주름과 화상 자국으로 쭈글쭈글한 얼굴이 한층 구겨져 있었다.


"지금이 적당한 때인지는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모욕하신 레크노미아 왕가는 제가 기사단을 데리고 성지로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희 기사단이 섬기던 왕가였습니다."


아, 진짜?
그 말인 즉슨 여름의 도살자를 신앙하는 왕국이라는 건데, 한 편으로는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왕국은 무너졌고, 그래서 화염 비늘족이 왕국령이 아닌 성지에 살게 되었으니.

"그럼 어떻게 하는  좋겠습니까?"


기사단장은 난간에 서서 병력과 공성병기를 찬찬히 둘러봤다.
난 봐도 뭐가 뭔지 몰랐지만, 군사의 전문가인 기사단장이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하필이면 저게…."
"왜 그러시죠?"
"공성추입니다. 성문을 돌파하는데 특화된 공성추죠."

저게 공성추인줄은 몰랐지만, 전문가의 말은 믿을 수 있다.
 보기에도 투석기 엇비슷하게 생겼지만 공성추라니까 공성추겠지.

"저걸 쏘면 지금의 급조한 성문으로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금세 뚫려버리겠죠."
"그정도입니까?"

원리가 도대체 뭐길래 나름 튼튼하게 만들어진 급조 성문을 뚫을 수 있는 거지? 공성추를 쏘는 건  뭐고?
기사단장은 설명해주지 않았고, 대신 난간에서 벗어나 세레나와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성문이라면 막아냈을 겁니다. 하다 못해 지금 제작 중인 새 성문만 달아놨어도…."
"그렇다면 뚫린다는 걸 전제로 두고 움직여야겠군요.차라리 성문 뒤에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농성함이 어떻습니까?"
"저들의 공성병기가 정확히 어떤 기능인지는 사용해본 적이 없어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일회성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바리케이트라면 성문보다 돌파하기 쉬운 장애물에 불과하죠. 심지어 저들은 기병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곧바로 진형이 붕괴될 겁니다."


오, 뭔가 내가 잘 모르겠는 이야기가 나누어지고 있었다.
PVP적인 이야기라면 내가 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아니니 나는 그저 멍하니서서 한창 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모욕하고 있는 여왕을 물끄러미 보았다.

문득 머릿 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쟤네들은 화염 비늘족도 여름의 피조물이라면서 보호하려고 했던 광신도적인 국가다. 그렇다면 대전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화염 부여라면… 분명 먹힌다.


나는 한창 과열되고 있는 토론의 중심에 끼어들었다.

"현성씨?"
"전하…?"
"떠오른 게 있습니다. 제가 해결해보죠."

그들의 나에 대한 신뢰는 깊은지 그들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허리춤에서 그레이톰의 심판을 꺼내들었다.


화르르륵!


피어오르는 화염이  손목을 간질였고, 나는 그 기분을 느끼면서 성벽 아래에서도 보이게끔 장검을 흔들었다.
좋아, 언제나처럼 아가리를 털어야지.
나는 한창 내 할아버지와 그 아버지 대를 욕하기 시작하는 여왕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여름의 전사들아! 영원의 투사들아! 여기는 여름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자 신천지다! 이 도시를 넘기라는 너희의불손하기 짝이 없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너희가 무기를 내려놓고 들어서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나, 여름의 대전사는 너희에게 천벌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영원토록 지옥불에서 타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투항하라!"

 마디로 화신 강림을 쳐맞고 싶은 게 아니면 투항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말에 뒤따르는 항복은 없었다. 단지 적막이 찾아왔다. 공성 병기의 투박한 쇳소리만이 성벽 위까지 들려왔다.
뭔가 이상한데.


지금껏 내 사이비적인 연설을 들었던 산적들은 내 명연설에 감동하면서 방패에 무기를 두드리거나 하면서 나를 추앙했는데, 여왕이 이끄는 군대에서는 동요는 커녕 움직임 하나 없었다.

"…왜 전혀 반응이 없―"


슈우우우욱


"우왁!"


그때 성벽을 향해 수십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왔다. 난 반짝이는 걸 보고는 반사적으로 엎드려 화살을 피했고, 대부분의 화살들은 빗나가거나 기사단장, 세레나의 칼에 거둬져 튕겨졌다.

"이런 씨발… 노빠꾸로 쏴재끼네."


사이비가 안 먹힌다는 점에서 좀 의아하긴 했지만, 어쩔  없었다. 이러면 성벽 방어를 해야한다. 나는 메이에게 마법을 써달라고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쓰러져있는 메이를 볼  있었다.
메이의 어깨에는 뭔가 돋아있었다.


"윽…."

고통을 참으며 악문 입술에서는 피가 새어나왔고, 박힌 화살은 어깨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원래 사용하던 갑주였으면 상처는 커녕 머리가 울린다고 찡찡댔겠지만, 지금 메이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펑퍼짐한 천 위로 돋아난 장대를 보면서 나는 기사단장에게 말을 던졌다.


"메이를 겨울님께 데려다주세요."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메이를 더 이상 두고보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그 박동 사이로 무언가 내 몸에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 기분에 거스르지 않았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내가 딛고 선 성벽이 비명을 질렀다.




*

"사상자는 거의 없겠군요."


근위대장은 제 여왕, 샤론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왕은 왕국이 몰락하고서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안전한 땅을 찾아다녔다.


여름의 성지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닌 척박한 대지였고, 가을의 땅은 재앙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어닥치는 험지였다. 겨울의 땅은 거들떠 볼 가치도 없었다. 시간마저 얼어붙는 그 고원에는 생명이 살지 못했다.


그래서 찾아낸 곳은 각 신의 영역을 접하고 있는 이 도시였다.
무수한 국가에서 탐을 내지만 탄탄한 방어와 타국의 견제 탓에 중립을 유지했던 도시형 유물.


그 방어는 왕국을 재건하고 나서도 수도로서 톡톡히 그 역할을 다해줄테고,  도시에 있는 온갖 고대의 설비들은 삶의 질을 몇 단계나 끌어올려줄 것이다.


그래서 여왕은  위에 서있는 존재가 어찌하든, 무너뜨리고 빼앗을 속셈이었다.
지금의 견제 사격 역시 그런 목적이었다. 성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을 수목선에서 쏘아낸, 철저하게 단련된 장궁병들의 솜씨였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성주라면 이제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들을 안에 들일테지.
여왕은 이후의 일을 생각하며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생각에 잠겼고, 그 탓에  첫번째 움직임을 잡아낼  있었다. 비스듬하게 올린 시선에 무언가 있었다.

"어."


그녀만이 그 모습을 본 건 아니었다.
전신에 갑주를 두르고, 위협적인 모양새의 투구에 후드를 두르고 섬뜩한 붉은색 망토를 두른 중장기사.
그런 기사가 성벽 뒤로 몸을 감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무슨…?"


성벽의 높이는 20m가 넘는다. 어떤 생물이라고 하더라도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살은 잘 익은 과일처럼 터질테고, 뼈는 산산히 부숴져 가시처럼 피부 위로 돋아나 죽는다. 분명 그래야만 한다.

슈우우우우


콰아아아앙!


그래서 그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중장 기사가 20m가 넘는 높이에서 뛰어내려, 그들의 바로 앞이라고 할 수 있을 지척에 내리꽂힌 시점에서도.

살이 터지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다만 그 괴인은 흉흉한 기색을 흘리며 다가섰다.
그 걸음마다 발밑의 흙이, 돌이 비명을 질렀다.

분명 크기는 좀 키가 큰 인간일 뿐인데, 거인이 다가서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여왕은 반사적으로 침을 삼키고는 숨을 들이켰다. 느껴본  있는 감정이었다.
가을의 마녀가 도시를 초토화 시킬 때,  적 없는 무수한 재앙을 도시에 퍼부을 때 느꼈던 감정과 유사했다.

그건 압도적인 존재를 보고 느끼는 미지의 공포였다.
여왕이 숨을 들이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두 명의 중장병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탄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튀어나와 여왕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에 괴인이 잠시 멈춰섰다.

각각 잘 제련된 장대망치와 장창을 꼬나쥔 그들은, 바람처럼 나아가며 말 위에서 그 장병기를 휘둘러왔다.
저 기사를 침묵시키기 위해서.
횡으로 크게 휘둘러지는 망치의 옆으로, 빠르게 장창이 뻗어져왔다.


카드드드득!


그랬어야만 한다.
이들은 둘이서 거대 괴물도 퇴치한 전적이 있는 훌륭한 전사다.
이들이 두른 갑주와 체중은 결코 가볍지 않고, 이들이 타고 있는  역시 그렇다.


하지만 성벽에서 뛰어내린 기사는 그 창과 장대망치를 옆구리에 끼우고는 말의 돌진력을 완전히 상쇄했다.
말들은 제 전진이 막힌 것에 투레질을 하며 불만스러워 했다.

'저 크기로 말의 돌진력을 상회한다고…?'


근위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망치를 붙잡아 버틸 수 있는 인간이라니들어본 적도 없다.
기기긱,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콰아아아앙!

그녀의 부관이 공중을 날더니 바로 옆에 있던 숲속으로 내던져졌다. 부관이 타고 있던 말은 고꾸라져 땅에 머리를 쳐박았다.
부관은 모르겠으나, 말은 죽었을 것이다.

으득!

망치는 부러졌다. 금속으로 되어있는 장대가 나뭇가지처럼 휘더니 끊어졌다. 그 철조각이 이리저리 튀어 근위대장의 갑주를 긁어놓았다.

히히히힝!


말은 쇳조각에 맞아 고통스러운지 날뛰었고, 그제서야 그 괴인은 언어를 씹어뱉었다.

"존나 시끄럽네."


으직!


주먹질이었다.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내리찍어진 주먹에 말의 머리가 곤죽이 되었다.
으깨진 머리가 아래로 쳐박히자 목이 없어진 말이 조용히 고꾸라졌고, 근위대장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허리춤의 메이스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저런 근력이라면 승부 자체가 성립할리가 없었다.
근위대장은 제 상관이자 섬겨야할 주군인 여왕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여왕은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방광이 조여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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