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66/274)



〈 66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다리가 저리던 건 금방 사그라들었다.
거인의 힘에 깃들어있는 재생력은 내 다리에 새겨진 자그마한 부상조차도 깔끔하게 앗아갔고, 나는 중복 발동한 거인의 힘의 초월적인 근력을 느끼면서 근육을 비틀었다.
팽팽한 철근 같은 걸로 근육이 이뤄져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뜨거운 한숨을 뱉어내면서 여왕에게 다가섰다.
이 썅년은 지가 화살 쏘라고 한 건 언제냐는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기긱

성문을 향해 조준하고 있던 공성병기가 움직이더니 나를 겨눠왔고, 나는 그 공성병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우선 저것부터 해치워야 한다. 후퇴는 언제든 가능하지만 공성병기가 멀쩡하다면 곧장 성문에 쏴재낄테니.
주먹을 쥐고는 바로 옆에 있던 참나무를 손등으로 후려쳤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주먹으로 두들긴 부분이 움푹 패인 참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쓰러졌다.
나는 그 나무를 집어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갑주 위로 부딪힌 참나무가 우수수  잎을 떨어트렸다.

"나무를…."
"괴물…!"


병사들의 놀라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저중에는 천벌이라는 말을 강하게 실감하고 있을 놈들도 섞여있을테지.
20m가 좀 넘는 참나무의 무게를 느끼면서, 어깨를 크게 당기고, 다리를 틀며, 팔을 앞으로 휘둘러 나무를 쏘아냈다.

콰지지직!


투창처럼 쏘아진 참나무가 공성병기 중간에 내리꽂히고, 그 공성병기에 올라타있던 병사가 뛰어내렸다. 공성병기 중심부를정확히 꿰뚫은 참나무는 기기긱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 부숴진 공성병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나는 그런 공성병기에서 눈을 돌려여왕에게 다가갔다.

"전하께 접근하지 마라, 무례한 놈!"


클리셰적인 대사네.
나는 내게 달려드는 중장병을 보았다.
내가 부러트렸던 장대망치를 쓰던  새끼는, 이제는 메이스를 뽑아들고 나와 맞서고 있었다.
나는 그에 맞서 그레이톰의 심판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려 휘둘렀다. 짧게, 그야말로 팔힘만 사용해서.

까앙!

"크윽."


중장병의 메이스가 내가 휘두른 검날을 걷어내고, 땅에 쳐박혔다.
 칼에 담긴 거력은 일개 인간이 받아낼  있는 위력이 아니다. 심지어 여름의 도살자도 이 거인의 힘 2중첩에는 버티지 못했다. 그런데 일개 중장병이 받아낼 수 있을리가.
그나마 기술이 좋은 건지 메이스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지만, 그것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땅에 쳐박힌 중장병은 잇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오호."

하지만 기술 자체는 상당했다. 내가 휘두르는 궤적을 읽어내고 겨우 칼날이 몸에 닿지 않게 걷어내거나 튕겨냈고, 그때마다 바닥에 엎어지거나 땅에 쳐박히거나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달려들었다.
사실 하려거든 언제든 달려들어 걷어차 대가리를 박살내버릴 수도 있겠지만, 중장병이 구사하는 기술에는 눈을 잡아끄는 화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기술의 끝에는 가장 화려한 공격이 있었다.

캉, 카앙!

내가 내지른 검을 메이스 아래로 흘려내고, 회전하는가 싶더니 내 머리를 팔꿈치로 후려치고 메이스로 두들겼다.
나는 대비하지 못하고 2연격을 그대로 머리에 받았다. 애초에 저 기술을 알고 있었더라고 흘려낸 시점에서 팔꿈치를 피하지 못했을테고, 그러면 메이스를 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울렸다.


콰악!


"크윽…!"


하지만 나를 쓰러트리기엔 충분치 않은 위력이었다. 나는 울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비어버린손으로 중장병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목을 붙잡힌 부들부들 떨면서 내 손가락을 억지로 벌리려고 했지만, 여름의 도살자조차 어쩌지 못한 초월적인 근력을 상대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이 끼어들지도 못했고, 그녀는 숨이 찬 건지 막히는 건지 컥컥대면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콰아아아아앙!


"으악!"
"받아, 으윽!"
"내 다리!"

나는 붙잡고 있던 중장병 새끼를 그대로 병사들에게 내던졌다.
멀뚱하게 서있던 병사들은 던져진 덩어리와 함께 뒤엉켜 쓰러졌고, 삽시간에 진형이 붕괴됐다. 나를 향해 창을 뻗은 채 벌벌 떨고 있던 병사들조차  광경을 보고는 비척대면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랑하던 중장병들은 쓰러졌고, 병사들은 겁을 먹거나 날아온  상관의 갑주에 다리가 부숴져 일어나지 못했다. 몇명은 의식이 없는지 조용히 바닥에 제 몸을 뉘인 채였다.
공성병기는 참나무에 꿰뚫려 삐걱댔다.

"무, 무슨…."


여왕은 상황파악을 완벽히 해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손에  예식용 장검을 휘두를생각도 못한 채로 떨어트렸다.
나는 등에 짊어진 거검을 꺼내들었다.


"아, 아으… 오, 오지마…."

폭군의 검이 들어올려지자 숲에 낮게 깔린 먼지가치솟았고, 나는 그 먼지를 맞으면서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에, 아, 안돼, 왜, 어째서… 아윽… 보, 보지 마…."

여왕의 머리칼처럼 선명한 빛깔로 그녀가 주저앉은 바닥과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이 젖어들었다.
허, 이 미친년 보게.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고, 여왕은 위와 아래로 동시에 울면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건 칼을 쓸 가치도 없었다.

"아, 아윽…!"

나는 폭군의 검을 도로 등에 걸쳐놓고는 여왕의 머리채를 잡았다.
잘 익은 벼처럼 선명한 빛깔을 품은 금발이 한움큼 내 건틀릿에 붙들렸고, 그녀는 그 손을 떨치기 위해  손을 붙잡았으나 질질 짜기만 할 뿐 완력 하나 쓰지 못했다.
사실 힘을 쓰더라도 거인의 힘을 켠 내 근력에 비할 바는 아니라서,  머리칼이 뜯겨나가는 결과를 낳을 뿐 풀려날 수는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목을 붙든 채로 질질 짜고 있지만.
나는 무릎을 굽혀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커다란 자색의 눈동자는 선명한 공포를 드러냈다.

"잘 들어. 냄새나는 썅년아."


여왕은 질린 표정으로 울면서 나를 올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군대로 뭐든지 찍어누르는 시대는 갔어. 지금부터는 괴물의 시대다."


여왕은벌벌 떨면서 눈물 콧물을  쏟아냈고, 실금은 멈춘듯 보였으나 하얀색이베이스인 하의에는 선명하게 흔적이 남았다.
씹, 더럽게.
선명하게 짜증난 표정으로 내려다보니, 여왕의 눈물이 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대가리 끄덕여."

여왕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머리채를 던지듯 놓았다. 여왕은 제 오줌이 갈겨진 바닥을 피해 엎어졌다.
나는 아까 던져버린 중장병에게 다가갔다. 나름 버티고,  싸우던  보면 여왕의 최측근으로 보였다.

병사들이 혹시나 저항이라도 할까 싶어 도끼를 꺼내드니, 병사들은 겁에 질려 물러서기만 할 뿐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몇 병사들은 제 지휘관이든 중장병에게서 멀어지려 애쓰고 있었다.
사기고 충성심이고 그런 인간적인 감성을 발휘하기엔 내가 저지른 일들이 너무나 압도적인 탓으로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덤비면  목을  채로 저며서 뽑아버릴 거다. 알아듣겠으면 무기 떨구고 바닥에 엎드리고 있어."

내가 중얼거리자 무수한 병장기가 바닥에 떨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서야 만족하며 기절한 중장병을 집어들었다. 중장병은 여자였다. 꽤 떡대가 있는 여자. 나보다 키가 살짝 작은 수준인.
나는 그런 여자의 갑주를 손아귀 힘으로 뜯어 내던졌고, 병사들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무렵에 작업을 끝내고 어깨 위에 그 여자를 걸쳐멨다.


"흑, 으윽…."

이 새끼 즙짜네.
여왕은 세상 서러운 것처럼 울고 있었는데, 메이가 질질  때와는 다르게 묘하게 빡쳤다. 차라리 메이가 질질 짜면 가슴이라도 아프지.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여왕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윽."
"야, 썅년. 네 씹어먹을 병사새끼들한테 전해."
"네, 네."
"허튼짓거리 하는 순간."
"네."
"내가 내려와서 그 목덜미를  채로 뽑아버리겠다고."
"네."
"말하라고, 멍청한 년아."

여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목을 붙잡힌 상태로 더듬더듬, 내가 읊었던 문장을 그대로 뱉었다.
병사들의 표정은 푸르죽죽했다.

"살려, 살려주세요."
"하는  봐서."


나는 그런 여왕을 옆구리에 끼우고는, 혼란스러워 하는 잡병새끼들을 뒤로 한 채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

세레나는 나에게 말을 건네지못했고, 기사단장 역시  상관을 봐서 착잡한 마음인 듯 했지만 구태여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존나 빡쳐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기야, 저들도 내가 이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나도 몰랐으니.
 망할 놈의 다크 판타지에 떨어지고서 나는 무수한 괴물을 쳐죽였고, 신을 하나 죽이고, 다른 하나를 존나게 패버렸다.
4신이나 일부 강력한 괴물들을 제외한다면 내 적수는 없었다.


심지어 나를 신앙하는 사이비들조차 파랗게 질려있어서, 나는 괜히 사이비스러운 말을 몇 마디 뱉고는 여왕과 중장병을 적당히 내려놓았다.
겁에 질린 여왕은 기사단장을 보고는 아는 척 하려고 했으나, 내 단단히 쥔 주먹과 선명한 살의를 보고는 아가리를 닥쳤다.
심지어 내가 내려다볼 때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고통을 주면서 뽑고 싶은데… 그 전에 물을 게 있거든? 대답을 성실히 잘하면 살려준다."


물론 난 그런 표정을 보고 멈출만큼마음 약한 새끼가 아니다.
여왕은  손가락을 품에 감췄다.

"그, 그래. 물어보거라. 짐이 대답해주…."


짜악!


거인의 힘이 풀린 탓에 근력은 아까 싸울 때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성인 남성이다.
거인의 힘을 얻기 전에도 늪지의 요람은 내가 쓰러트렸다.
그런만큼 내 근력은 충분했고, 내 싸대기는 여왕에게 어느정도의 물리적 피해와 강렬한 정신적 피해를 가했다.

내게 뺨을 맞은 여왕은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눈물을 떨어트렸다.

"존댓말."
"…."
"대답 안 하네."
"네, 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고, 기사단장은  상관이 줘터지는 모습을 보고는 심란한  싶었지만 내게 따지고 들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말을 시작했다.


"왜 왔냐."
"그, 그게… 살아갈 곳이 필요해서…."
"아, 필요하면 그냥 사람 쳐죽이고 빼앗아가도 된다? 그럼 나도 지금  목 뽑아버려도 되냐? 안될 거 없어보이는데."
"자, 잘, 잘못했… 어요…."


눈물을 떨구며 몸을 움츠리는 여왕.
기이하게도 그걸 보면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즙 짜는 것처럼 보여서 화가 들끓었다.
최대한 참으려고 했지만, 내 분노만은 솔직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못 줘패겠네. 운이 없군.
나는 투구를 벗어 여왕의 앞에 내려놓고, 얼굴을 드러낸 채로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쳤다. 머리채도 잡고.

"왜. 왔냐고."


여왕의 눈동자에 의혹이나 놀라움이 일순 담기는가 싶더니, 내게 머리채를 잡혀 머리가 들어올려진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나는 손을 들어올렸고, 여왕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봄, 봄의 순례자가 여기로 가라고 조언을 해줘서…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게…."


봄의 순례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채를 놓았고, 여왕은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헐떡였다.
봄의 순례자가 한 짓거리라면  씹새끼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개짓거리는 아닐테고.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었다.


"듣기로는 느그 왕국이 씹창이 났다는데, 뭐에 씹창났는지부터 차근차근. 전부, 자세하게 설명해라."

여왕은 울면서 천천히, 알아듣기 힘들게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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