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여왕이 시작한 설명은 꽤 듣기 좋았다. 여왕 본인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꽤 핵심적인 내용을 품고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레크노미어 왕가는 단단한 외벽과 깊은 해자를 갖춘 훌륭한 요새도시에 자리하고 있었고, 고대의 도시 수준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도시 설비 탓에 처음 폭풍우가 불어닥쳤을 때만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변을 눈치채기 시작한 건 그 폭풍우에 섞인 우박이 떨어져내리고, 벼락이 내리꽂히던 때부터였다.
갑자기 폭풍우에 불이 섞여 내리기 시작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화산이 융기해 쏟아졌다.
성난 벌레떼가 날아들어 사람들을 갉아먹었고, 차오르는 물길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제서야 수도의 영적 수호를 책임지던 사제는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가을의 마녀가, 재앙의 지배자가 왔다!'
그리고 그 예언을 헤아리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왔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재앙은 쉴새 없이 불어닥쳐 인간을 도륙했고, 그 피륙이 흩날리는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건단단한 요새에 숨어들었던 왕가와 그 밑의 기사단, 근위대, 병사들 정도였다.
일부 시민 역시 살아남긴 했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여왕은 얘기했다.
그때 봄의 순례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왕손은 죽었을 거라고.
그리고 나 역시 그 이야기에는 동의했다.
권능의 데미지로만 친다면 가을의 마녀는 4신 중 최고니까.
압도적인 수준으로 재앙을 퍼붓는 권능을 사용하는 가을의 마녀는, 내 몇 안되는 PvE 경험 속에서도 상당한 충격으로 남아있는 보스였다.
벼락과 불이 내리고, 바닥에는 도트딜을 깔고, 나아간다 싶으면 강력한 범위 공격으로 제압하려고 드는 방식. 거기에 뛰어난 근접 능력까지.
살아나왔다는 점에서는 가을의 마녀에게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의 실력이라, 나는 이어지는 여왕의 말을 경청했다.
여왕이 말하길, 봄의 순례자는 죽었던 사제의 몸을 빌려 이렇게 떠벌였다고 했다.
'저 멀리에 인간의 왕을 위한 신천지가 있다! 그곳을 점거한 이는 야만인이나 아주 강력한 존재이고, 그를 쓰러트리고 인간의 새 왕국을 세우는 자는 천년왕국을 다스릴 인간의 첫번째 왕이 되리라!'
가히 내 수준에 필적하는 사이비였다.
아무튼 그 얘기를 들은 왕손들은 자신을 따르는 귀족과 병사들, 기사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고, 그렇게 온갖 시련을 만나며 뿔뿔이 흩어진 끝에 샤론이 제일 먼저 여기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게 여왕이 내놓은 이야기였다.
세레나는 그에 한마디를 덧댔다.
"…그리고 다른 왕손들은 더욱 많은 병력을 이끌고 있겠군요. 당신과는 달리 유력 귀족의 지원도 받을테니 말이죠."
국가는 무너지고 사회는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재산은 힘이 된다.
유력 귀족놈들의 지원을 받은 왕손들은 저 여왕새끼가가져온 공성추 발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테고, 마법사도 많을 것이다.
귀찮게 됐네.
"그, 그렇다."
세레나는 자신에게 반말하는 여왕에게 별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러지 않았다.
대신이랄 건 없지만, 나는 여왕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 네 원래 계획은 뭐였는데."
내 목소리에 여왕이 화들짝 놀라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 계획은 원대했고, 미사여구가 쓸데없이 많았다.
얼추 내가 윽박지른 후에야, 여왕은 더듬더듬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 계획을 정리하자면.
"무혈 입성해서 이 도시의 방어 능력으로 농성하고 싶었고, 만약 무혈 입성이 아닌 다소의 사상자가 나오더라도 여기서 차출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지?"
"네, 넷."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여왕은 푹 떨궜던 고개를 휴대폰 진동처럼 떨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여왕은 내 주먹을 보더니 눈물을 떨궜다.
"죄, 죄송합니다."
여왕은 목이 메이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뭔데 씨발.
"아니,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 니다…."
여왕은 훌쩍훌쩍 거리더니 결국은 제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오열했고, 어느새 일어난 여왕의 측근은 나를 보고는 '큭, 죽여라.'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죄송한 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냐고 씨발.
그걸 보면서 나는 거인의 힘이 켜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중 존나 마렵네 씨발년들.
세레나가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거인의 힘 인중 강타를 했을 거다.
나는 훌쩍대는 여왕을 삿대질하며 세레나에게 말했다.
"이 새끼 이거 잘 씻기고 잘 먹여서 말할만한 상태로 만들어주시고요."
그 다음은 측근.
"이 새끼는 나대면 내가 직접 사지를 뽑아버리겠다고 전하세요. 아니지, 여왕 사지를 뽑아버린다고 하세요. 가로막고 날 줘패고 뭐해도 보는 앞에서 천천히 여왕 비명 들려주면서 뽑는 거 구경만 하게 해준다고 하세요."
전할 필요는 없었는지 여왕의 측근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고는 여왕을 제 품에 감싸안았다. 여왕은 여전히 오열하고 있었다.
*
사실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은 한다.
생각만 했다.
실제로 화가 난 건 화가 나는 거고, 이 세계에 오고서 그렇게 화낼 일이 많지 않았지만 난 본질적으로는 분노조절장애다. 그걸로 공익도 받은 일류 분조장이다.
그래서 나는 메이가 화살을 맞은 걸 보자마자 화가 치솟는 걸 억누를 수 없었고, 그 탓에 날뛰었다.
메이의 병실 앞에서 들어가는 걸 망설인 건 그런 이유였다.
이거 좀 어색한 거 아닌가 몰라, 싶으면서도 메이가 다친 모습을 보면 살짝 마음이 흔들릴까봐 걱정하는 것도 있었다.
그 후에 내가 빡쳐서 여왕을 혹시라도 죽여버릴까봐.
여왕은 이용 가치가 아직까지는 있었다. 가을의 마녀와봄의 순례자가 꾸미는 계획을 알아낼 수단은 여왕의 증언 뿐이었으니.
그래서나는 문고리를 움켜쥐고는 한숨을 뱉었다.
"후우."
안 들어가면 뭐 어쩔 거야.
나는 결국 문을 열어젖혔고, 메이의 침상 앞에서 뭔 처음 보는 절구 같은 걸로 약초를 달여서 메이의 어깨에 바르고 있는 겨울의 신부를 보았다.
"좀 어떻습니까?"
"아, 오셨군요. 당신께서 염려하실만한 일은 없었어요."
겨울의 신부는 평소처럼 베일을 쓴 채로 메이의 어깨에 붕대를 둘렀다. 메이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고, 모포로 제 몸을 가리고 어깨만 내놓고 있었다.
아깝군.
내 생각과는 별개로 메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밝게 웃었다.
"현성아!"
"어, 괜찮냐? 안 아파?"
겨울의 신부는 처치를 끝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고, 나는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걸터얹았다. 몸을 기울이니 톡쏘는 약초 냄새가 비강을 문질러댔다.
"방패 안 쓰고 뭐했냐. 그럴 때 쓰라고 준 방패인데."
침대에 기대어있는 방패는 흠집 하나 없이 깔끔했다.
리넬의 투지에 투사체 반사 효과가 있는 걸 떠올리면, 이 녀석이 다친 건 진짜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 덕에 내가 빡쳤고, 그 덕에일이 잘 풀렸다지만.
"그치만… 방패 펼치면 네가 방패에맞을 거 같아서…."
메이는 모포 속에서 손을 꾸물대면서 움직이더니 모포로 제 턱을 덮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가슴골 안 보고 있었는데.
"네 몸 먼저 신경 써야지. 내가 그런 공격 한 두 번 받아보는 것도 아니고, 지렁이랑 싸운 거 기억 안 나냐? 여름의 도살자가 화신으로 찍어눌러서 깔린 건 또 어떻고."
"그래두 아픈 건 아픈 거야. 난 네가 아픈 거 싫어."
메이는 내게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의견을 고수했다.
웬일이래. 주관은 거의 없었던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메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 더 얹었다.
"야, 내가 여름의 도살자 도끼 피하던 거 보면 모르냐. 그냥 피할 수 있었어."
메이는 그제서야 모포를 조금 끌어내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뭔 소동물 같았다.
"아, 맞다."
어휴, 멍청한 년.
메이가 헤헤 웃더니 모포 속에서 꾸물대던 손을 빼내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래두, 난 네가 다치는 게 싫어."
멍청하지만 귀여웠다. 그 뉴비 핵쟁이가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래서 괜히 녀석의 곱슬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아아, 하지마아~"
꺄륵대는 녀석을 몇 번더 괴롭혀주고서 나는 손을 떼냈고, 메이는 한결 풀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여왕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왕손들은 아직 많댔고, 걔네는 대부분이 도시로 올 것이다.
그런다면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니, 단 한 개 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을 굳히고 싶었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건 아니었다.
슬슬 NPC들이 NPC로 안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인격체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난 NPC를 죽일 수 없었다. 살인을 저지르기엔 나는 너무 정상이었다.
씨발, 아무리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지만 저런 걸 그냥 죽일만큼 내 마음은 차갑지 않았다.
차라리 존나 차가운 싸이코패스였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제부터는 안 죽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봄의 순례자가 섞여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한 명이라도 안으로 들일 수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이 도시는 좆된다. 내가 고민하니, 메이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쥐었다.
"당신께 손님이 찾아왔어요. 들여도 될까요?"
그때 겨울의 신부가 문밖에서 말을 꺼냈고, 나는 메이의 이마를 몇 번 쓸어주고는 대답했다.
"예, 안으로 들이세요."
문이 벌컥 열렸다. 삐걱이는 나무문 너머로, 익숙하지만 차림새가 익숙치 않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식용 장검도 빼앗겼는지 허리춤은 허전했지만, 아까보다는 눈빛이 멀쩡했다.
여왕이었다.
나는 메이의 표정이 굳는 걸 보고는 나 역시 표정을 굳혔다.
"뭐냐."
여왕은 여전히 내게 겁먹어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덜했다. 아까는 거의 공황장애라고 할 수 있을 상태더만, 그나마 지금은 겁먹은 정상인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무력은 분명 한 군대에 필적하지만, 이제부터 다가올 위협에 완전히 대응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군대의 시대는 갔다고 했지만… 여전히 수는 폭력입니다."
협박인가.
나는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허리춤에 메어둔 도끼에 손을 가져가니, 여왕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비척비척 물러났다.
"다, 당신 말대로 괴물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왕손 중에도 괴물을 기르는 이가 있습니다."
호오.
물리적으로 진짜 괴물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는데, 몬스터를 통제할 수 있는 거라면 좀 흥미가 돋았다.
나는 도끼에서 손을 떼고는 턱짓했다.
"그분은 1왕자입니다. 봄의 순례자를 받아들이고 개종해 순례자를 자처하는 이죠."
1왕자가 순례자라.
진짜 봄의 순례자의 수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근데 그 얘기를 해서 뭐 어쩌자는 거지.
내 의구심을 느꼈는지 여왕은 눈가를 문질러 닦고는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제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떨리는 목소리, 눈물이 맺힌 눈가로 나를 바라보길래, 나는 몸을 일으켜서 다가갔다. 내가 한 발 딛을 때마다 여왕은 뒤로 물러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왕은 벽을 등에 대고서 움츠러 들었다.
내가 소리라도 치면 바로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그러면 아까의 지겨운 심문이 다시 반복될 뿐이었다. 내가 위협하지 않으니 여왕은 눈물을 한 줄기 떨구고는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서 말했다.
"저희를 받아들여주세요. 저희에겐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 말에 의구심 섞인 표정을 일부러 지어보였고, 여왕은 입을 꾹 닫은 채로 나를 마주봤다.
"싫은데."
결국 여왕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