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여왕은 내가 한 말에 결국 무너져 엉엉 울었고, 나는 오열하는 여왕을 보면서 불편하면서도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아가리에 주먹이라도 꽂고 싶었지만.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아, 씨발.
나는 내 팔뚝을 타고 흐르는 거력을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여왕은 훌쩍이면서도 성실하게 물러났지만… 그렇게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무심결에 주먹이라도 내지르면 대참사 아닌가.
내가 저 가녀린 아가리에 주먹이라도 꽂았다가는 머리가 풍선처럼 터져나갈 거다.
아무리 빡친다지만그런 짓을 할 정도로 내가 뒤가 없는 새끼…는 맞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거다.
마음 같아서는 벌써 팼겠는데, 패면 뒈진다는 사실이 내 주먹을 멈춰세웠다.
결국 나는 여왕에게 윽박 질렀고, 내 고함은 메이와 여왕 모두를 겁먹게 했지만 원하는 걸 끌어낼 수는 있었다.
여왕은 훌쩍이면서도 내 얘기를 들었고, 나는 그녀에게서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얘기를 했다.
"모, 몸으로… 해달라는 건가요?"
"…더러워서 싫어."
오줌 지린 여자한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여왕은 그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또 펑펑 울었다.
이거 여왕 맞아 씨발?
그냥 동네 찐따 빡대가리 같은데?
심지어 내 등뒤에서 누워있던 메이도 당황했는지 눈을 굴리면서 나에게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내가 얼척 없어하자 여왕은 울면서도 꾸역꾸역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리스트에서 골라낸끝에 나는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왕가의 비보이자, 귀족의 지원이나 강대한 병력이 없는 여왕이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이유.
유일한 왕가의 여성 후계자라 그녀가 수여받은 갑주는, 결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오랜만에 아는 물건이 나와서 반갑기도 했다. 저건 시작 성별이 여성이 아니면 입을 수 없어서 꽤 악명 높았으니까.
마침 갑주가 없어서 어깨에 화살을 맞았던 짱깨도 있었으므로, 나는 그 갑주를 주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무슨 삥이라도 뜯는 기분이었지만. 이 새끼가 하려고 했던 짓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정도로 봐주는 거라고 봐야했다.
여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결국 조금 더 망설이는가 싶더니 수긍했다.
그래서 메이는 처치를 마치고 갑주를 둘렀다.
갑주는 솔직히 방어력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지만, 나와 여왕은 잘 알고 있었다. 저게 사실은 기가 막히게 방어력이 높다는 걸.
"저 천은 고대의 괴물을 죽이고 그 괴물의 둥지를 이루고 있던 실로 만든 천입니다. 그리 많지 않아 중요한 부위에만 두를 수 있었지만, 나머지 부위도 순도 높은 강철을 사용해 극도로 튼튼하고 가볍습니다."
여왕은 이제 울지 않았다.
설명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설명충에 충실한 건지, 저 유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건지. 어쨌든 간에 여왕이 울지 않으니 내가 무심결에 줘패서 죽여버릴 가능성은 내려갔다.
여왕은 메이의 큼직한 가슴을 보면서 말했다.
"저분의 가슴이 아무리 크더라도, 저 천에 감싸진 이상 싸울 때 흔들려서 방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강철보다 더 튼튼한 천이니까요."
심지어 설명에 심취해서 나한테 겁먹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거로 나무랄 수는 없었다. 왜냐면.
"어때? 어때?"
메이가 빙글 돌자, 하반신을 감싼 천이 무슨 화려한 드레스 같은 느낌으로 흩날렸고, 어깨나 대퇴부 등지에 둘러져있는 판금이 소리 없이 덜컥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저 큼직한 가슴이 천에 감싸지니 상상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억눌린 가슴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라인이라고 해야할까.
메이가 존나 야하고 귀여웠다. 그게 내가 여왕한테 뭐라고 하지 않는 이유였다.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귀엽네."
"헤헤, 고마워!"
메이는 어깨의 부상도 잊고 웃었고, 여왕은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해가 갔다. 저런 가슴 크기의 짱깨가, 원래 자신이 가졌던 갑주를 입고 어마어마한 사이즈 차이를 보여준다면 좀 침울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면 그냥 삥 뜯겨서 그러는 거던가.
살았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씨발년.
아무튼, 저 갑주의 기능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기동력도 높고 방어력도 좋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착용자의 마법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안 그래도 마법을 사용하는 메이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물건이다.
여성 착용 제한이 있긴 하지만 메이는 여성이라 상관 없었고, 수많은 룩딸러 새끼들을 열광하게 했던 갑옷이다 보니 예쁜 걸 좋아하는 메이는 상당히 만족한 듯 보였다.
나도눈호강할 수 있으니만족이고.
여왕은 한창 내 반응과 메이의 반응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럼…."
"그래, 받아주도록할게. 근데 명심해라."
"네, 네."
"이 도시의 지배자는 나야. 정치질 하다가 걸리면 대가리 부숴버린다."
여왕은 침을 꿀꺽 삼켰고, 메이는 한창 갑주를 두른 자신의 모습을 기웃거리면서 즐거워했다.
내가 여왕한테 한 섬뜩한 협박은 신경 쓰지 않는지 오히려 활달한 모습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메이는 저 갑주를 입고 싸우는 자신을 상상해봤는지, 주먹을움켜쥐며 그렇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런 메이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며칠이 지나도록 도시 앞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도, 괴물도.
*
큼직한 원형 테이블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도시의 안전이나 운영을 책임지는 핵심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야 물론뭔가 하는 게 없고 메이 역시 그랬지만, 우리 역시 이 평의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나는 왕이고, 메이는 일단 내 종자 비슷한 무언가였으니까.
만약 안된다고 했어도 내가 억지로 데리고 왔을테고.
어쨌든 간에, 그 평의회의 일원인 세레나는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좌중이 바라보고 있는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샤론 전하께서는 뭐 짚이시는 거 없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여왕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었지만, 이 평의회에서는 그 왕위조차 명목 상의 직책이었다. 그녀의 실제 위치는 정치 및 현 상황에 대한 자문 정도였다.
본래라면 한 국가 아래에 전하가 둘이나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내가 불쌍하니 여왕이란 이름은 남겨주자고 하니 사람들은 별 문제 없다는 듯 가볍게 동의했다.
애초에 왕이니 정통성이니 그딴 걸 따질 수 있는 멀쩡한 세계가 아니니까.
샤론은 나를 흘긋 보고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눈동자에 희미하게 스치는 공포가 느껴졌다.
"레크노미아 왕국을 떠날 때 짐 외에도 생존해있던 왕손은 모두 12명이었다. 그 중 병력이 많아 기동이 늦을 1왕자를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왕손들은 지금 쯤은 도착했어야 하는데… 짐의 휘하에 있는 장궁병들은 지평선까지 텅 비어있다고 하더군."
그녀는 내 허가 하에 '왕답게 말하는 걸' 허락받았고, 그녀는 그 허락에 따라 자유롭고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어색하고 두려운 모양이었지만.
그녀 뒤에 직립한 근위대장은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보면서도 말을 넘겨받았다.
"퍼시벌 경과 함께 군마를 이끌고 조사를 해본 결과 숲은 깨끗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동행한 정찰병들이 보장했으니,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기이하게도 조사 과정에서 괴물과의 접촉이나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숲은 생명 하나 없이 깔끔합니다."
퍼시벌 경이라고 불린 기사단장은 근위대장의 지목을 받고서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나는 그 회의를 보면서 슬슬 감이 오고 있었지만, 이들이 뭔가 얘기를 더 꺼내놓을 수 있으므로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괜히 넘겨짚었다가 줘터지는 일이 PVP에서 워낙많았어야지.
"눈과 귀가 좋은 내 부하들도 숲에서 소음 하나 듣지 못했어. 이쯤 되면 명백히 이상현상이라고 봐야겠지."
마리암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은 침묵했다.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누구의 개짓거리인지는 명확했고, 나는 그걸 대비해서준비해온 게 있었다. 나는 테이블을 두드려 내게 이목을 모았다.
좌중의 기대 어린 시선을 보면서 나는 씩웃었다.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 일의 누구의 소행인―"
댕― 댕― 댕―
아, 씨발.
멋있는 대사를 치려고 했는데 방해를 받아 내 심기가 뒤틀렸고, 사람들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그게 나 때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한참이나 더 울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큼직한 평의회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다들 무장하십시오. 놈이 이길 확신을 가지고 온 모양이니."
나는 메이에게 턱짓하고는 밖으로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성벽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 앞에는 수천에 달하는 괴물과 인간이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정찰병과 장궁병의 눈을 속여가며 여기까지 접근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실존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그 병력을 내려다보면서 핵심적인 전력을 찾아다녔다.
최선두에 병력을 이끌고 있는, 화려한 갑주를 두른 기괴한 형상이 열 하나.
그리고 그런 뒤로 우후죽순으로 자라나있는 수십에 달하는 공성병기들.
그 제일 앞에는, 어쩐지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 서있었다.
가장 덜 뒤틀렸으나, 내 내면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올듯한 감각이 저 새끼를 향해있었다.
얼굴 전체를 뒤덮은 검은 갑각은 어쩐지 갑주의 쇳덩이처럼 보였고, 전신에 두른 황금빛 갑주랑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요상한 색배합에서 가장 어울리는 걸 뽑으라면, 팔에서 뻗어나와 거대하게 굳혀진 검의 형상이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저 새끼가 대전사라는 걸 알았고, 놈 역시 나를 눈치챘다. 우리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동요하는 병사들을 쭉 훑어보다가 메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이, 투창."
"응."
메이는 군말 없이 낑낑대며 등에 멘 창집에서 창을 뽑아들었고, 내게 그걸 건네주었다.
그 창은 통짜 금속이었다.
창대에서부터 창날까지, 모두 통짜 강철로 된 1m를 조금 넘어가는 투창이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그리고 그 창을 받아들어 내면에서 두 가지 명령을 부르짖었다.
거센 화염이 창날에서 피어올랐고, 곧 창 전체가 화염으로 타오르며 이글거렸다.
내 심장에서부터 팔뚝까지, 나조차도 견딜 수 없을만큼 강력한 거력이 맥에 맞춰서 흘러갔다.
그 두 가지가 창과 내 팔뚝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나는 팔을 크게 젖히고 그 창을 쏘아냈다.
콰직!
내 딛은 발 밑에서 돌이 비명을 질렀고, 내 손에서 쏘아진 창이 파공성을 내며 날았다.
하늘에서떨어지는 혜성처럼, 그 투창은 화염을 두르며 나아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렇게 날아간 투창은 정확히, 공성병기에 내리꽂혔다.
투창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그걸 던진 나도 믿지 못할 정도로.
와, 그간 연습한 게 이렇게 빛을 보네.
투창은 불티를 남기며 꽂히더니, 그대로 공성병기를 때려부수며 주변에 화염으로 타오르는 파편을 쏟아냈다.
군세의 일부가 그 파편에 얻어맞고는, 불타 없어졌다.
놈은불에 약하다. 놈의군세 역시 그렇다.
그리고 놈은 공성병기가 없어지면 나를 쓰러트릴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내게는 수십개의 투창과 함께.
산양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곧 내 귓전에 기계음이 들려오고 하늘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화신 강림이 발동됩니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나는 그 산양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만 준비한 게 아니다, 이 씨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