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이미 몇 번 보아 익숙한 병사들도, 익숙치 않아 겁에 질려 납작 엎드린근위대들도,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주현성을 겁에 질린 여왕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공격이 이 한 남자에 의해 발생했으며, 한 편으로는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압력과 공포였다.
그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초식동물의 일종일 산양의 울음소리를 억지로 키워놓은 것이 아닌, 거대한 성대에서 나오는 막대한 성량이 지천을 뒤흔들었다.
봄의 순례자이자 봄의 대전사를 조작하고 있던 흉수는 고개를 치켜올려 그걸 보았다.
저 공격에 당하는 건 이번이 두번째였다.
지난 번처럼 통제를 잃고 도망치는 괴물이나 송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전부 완전히 인격을 죽여놓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게 별로 희망찬 상황을 만들어주진 않았다.
구름이 걷힌다. 달에 걸칠듯 높이 솟아오른 구름을 가르며 무언가 떨어져내린다.
밤의 어둠을 걷어내듯, 지극히 밝게 타오르고 있는 그것은 명확한 징벌을 의미했다.
'끝까지 내 방해를 해야겠다는 건가, 여름.'
봄의 순례자는 황급히병력을 흩어냈다.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는 게 아닌, 최대한의효율을 따지는 움직임.
퍼져나가는 검은 군세는 종말을 피하려 억지로 몸을 놀렸다.
작은 것들은 땅을 훑어내 몸을 흙 속으로 몸을 숨겼고, 거대한 것들은 아직 살아있는 병기들을 최대한 떠밀어 폭발 반경에서 빼냈다.
심상치 않은 신성의 유동을 느끼자마자 한 행위였음에도, 봄의 순례자는 직감했다.
지금 이 공격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일소될 것임을.
'빌어먹을 놈.'
봄의 순례자는 최대한 자신의 대전사를 빼내고, 수족으로 만든 왕손들을 폭심지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쿵
언뜻 덧없어보이는 충돌음이 들리고, 그 중심에 미처 피하지 못했던 거대한 괴물이 찌그러졌다.
콰과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폭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시 안에서 제 집에 몸을 숨기고 있는 시민들은 갑자기 해가 떠오른 것으로 착각해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고, 울려퍼지는 산양의 공포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태양이 땅에 내리꽂히는 것만 같은 폭발을 보았다.
그들이 그들의 새로운 신이자 왕을 경배하는 동안, 봄의 순례자는 정신을 혹사했다.
마침내 화염이 걷히고, 수천에 달하던 병력이 몇백에 달하는 수준으로 줄어있었다.
도시의 바로 앞에 있던 나무들은 불이 번져나갈 것도 없이 전소했다.
휘말린 시체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영혼조차 타버렸다.
하지만 아직 병력은 남아있었다. 공성병기도 있다.
비장의 수로 준비해온 것들도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그는 군세를 추스렸고, 추스린 군세를 다시 움직였다. 괴물들이 성문을, 성벽을 향해 돌격했다.
"발사!"
높은 성벽 위에서 누가 말을 뱉어냈고, 동시에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괴물이 빠르게 손을 뻗어 화살들을 잡아챘으나, 방어는 의미가 없었다.
쾅! 콰광! 콰가가강!
화살이 닿는 곳마다 자비없이 폭발이 터져나왔고, 병력들은 폭발에 휘말려 불탔다.
어쩔 수 없다. 비행이 가능한 수하, 제 3왕자라는 놈을 조작해 성벽 위를 향해 날렸다. 궁수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성벽에 다가가기 전에 전멸이다.
투쾅!
하지만 그게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순간, 무언가 날아와 그 왕손을 쪼개버렸다.
그건 창이었다. 전체가 금속으로 이뤄진, 화염을두른 쇳조각.
가격당한 왕손은 연결을 끊을 것도 없이 불타 사라졌고, 봄의 순례자는 제 신성에 가해지는 타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여름의 대전사놈. 전부 준비해온 건가.'
봄의 순례자가, 정확히는 대전사가 고개를 들어올렸고, 투구를 벗고 있던 주현성과 눈을 마주쳤다.
주현성은 웃었다. 봄의 순례자의 길고 긴 순례에서도 본 적 없는, 모욕적인 표정이었다.
봄의 순례자는 결국 수를 아끼지 않기로 했고, 그의 발 밑에서 혈관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무언가 솟아났다.
*
화신 강림으로 몇명이나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쪽이랑 체급이 얼추 맞아보였다.
공성하는 쪽은 수성하는 측의 몇 배랬더라, 암튼 병력이 많아야 한다고 했었으니 이미 놈의 계획은 거의 실패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전히 괴물들은 바위 같은 걸 궁수들을 향해 던졌고, 공성병기들은 내 투창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빠지려했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왕손들, 딱 봐도 봄의 순례자가 특제한 것 같은 생김새의 괴물새끼들은 이쪽을 향해 그르렁 거리면서 살기를 뿜어댔다.
한 새끼가 날아왔던 걸 보면, 다른 새끼들도 그럴 가능성을 상정하는 게 좋았다.
그런 놈들 중 하나라도 이 안으로 들어오면 맞서싸울 수 있는 건…나 아니면 메이 정도였다.
"어, 응?"
메이는 내가 어깨를 붙들고 투창집을 끌어내리니 당황한 듯 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끌어내리기 쉽도록 팔을 들어올려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손에 들어온 투창집을 왼손에 쥐고, 메이에게 적진을 가리켰다.
"마법 아끼지 말고, 좀 뭉쳐있으면 갈겨서 못 오게 해. 저기 이상한 새끼들이 네 사거리까지 들어오면 그걸 우선하고."
"아, 응!"
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뻗었다. 판금으로 둘러진 손 위로 천천히 불이 구 형태로 떠올랐고, 나는 그걸 보면서 미묘한 향수를 느꼈다.
한창 게임할 때에도 많이 보았었던, 평범한 화염구 주문이었다. PvP와 PvE 양측에서 모두 쓸만한 주문.
하, 게임 마렵네.
나는 착잡한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심각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금발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짐을 말하는 건가?"
그럼 여기에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새끼가 너랑 나 말고 더 있냐, 이 빡대가리야.
까지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는 투창집을 샤론한테 쥐어줬다.
샤론은 내가 건네는 투창집을 받아들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자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더니 여러 복잡한표정을 드러냈다. 주된 감정은 당황인 듯 보였지만.
그래서 나는 샤론이 공황발작이 도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여왕 전하는 전력 외인데다 손도 비는 것 같고, 지휘도 안 하는 것 같으니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도움을 어떻게… 대전사도 알다시피 짐은 전투능력이 없다."
여왕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주변을 훑어봤고, 근위대장을 찾아냈지만 근위대장은 바빠보였다.
"그, 이런 걸 쓰려거든 짐보다는 테레사 근위대장을…."
"아, 직접 쓰라는 게 아닙니다. 탄창이 되어달라는 거죠."
"탄…창?"
"몰라도 됩니다. 그냥 제가 신호할 때마다 투창을 한발씩 건네주시면 됩니다. 아무리 좆밥이시라지만 그정도는 하실 수 있죠?"
여왕이 혼란스러워 했지만 내가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으니 여왕은 우물쭈물했다.
아니, 나 말고는 다 카리스마 있게 대하면서 왜 나한테만 이런데?
그보다 근위대장 이름이 테레사였나?
본의치 않게 알아낸 이름이었지만 금방 머릿 속에서 밀어냈다.
샤론이 내 말을 들으려고 하는 기색이 없길래, 억지로 여왕이 반응할만한 말을 떠올려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오줌 마려운 것처럼."
"오줌 얘기는 제발…."
여왕은 굴욕적인 기억을 떠올렸는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정작 중요한 게 나오지 않았네, 대전사."
"뭐가요?"
저정도면 다 있지 않나?
왕손도 있고, 공성병기도 있고, 사전에 회의할 때 얘기가 나왔던 것들은 다 있는 건데.
내 의구심을 읽은 여왕은 몇 번 말을 고르더니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었다.
"대전사! 저기를 봐라!"
내가 뻗어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 위치에는 처음 보는 게 있었다.
화신 강림을 쓸 때만 하더라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건 말이었다.
그냥 말이라면 별 생각을 안 했을 거다.
근데 그건… 딱 봐도 기이하지만 기묘하게 간지났다. 마치 뿌리로만 이뤄진 듯 한 외양에 걸맞게 그 말의 전신은 맥동했고, 그 위에는 봄의 대전사가 올라타 있었다.
"…저게 무슨―"
내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 군마는 포화 속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화살을 큼직한 검으로 튕겨내면서, 그 검은 몸체에 화염이 틀어박힘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화염이 적중할 수록 빨라지는 것처럼, 점차 그 검은 인마는 검은 화살이 되어 전장을 가로질렀다.
다가옴에 따라 점점 속도와 소리가 거세지더니 그대로 튀어올랐다.
"이런 씨발."
뭘 노리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녀석이 튀어오르는 순간 급하게 투창을 던졌다.
메이 역시 그 녀석을 봤는지 튀어오르는 경로를 향해 몇 개의 빠른 화염을 쏘아냈다.
회색 빛살과 화염이 거세게 날았다.
하지만.
카아아앙!
쇳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투창은 튕겨나 성벽 한 켠을 깎아내면서 날아갔고, 나는 녀석이 말과 함께 공중제비를 돌면서 성벽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다. 화염은 닿지도 못했다.
차라리 성벽 위에 올라갔으면 다행일텐데, 녀석은 그렇게 뒤집은 몸을 눕혀 성벽 너머로 사라졌다.
"씨발, 메이!"
녀석은 안뜰에 정확히 착지했다. 성문이 뚫릴 때를 대비하여 중무장한 병사들이 모여있는 안뜰에.
그와 동시에 성벽 밖에서 공격을 하던 군세에 왕손들이 추가됐다. 네 발로 걷거나, 기괴한 촉수를 길게 늘어뜨린 괴물들이 성벽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응!"
"맡긴다! 방어하고 있어!"
메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나는 여왕에게 다가가 그 허리를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에, 엑?"
"꽉 잡으시고 아가리 닫으세요. 혀 깨물고 뒈지려는 거 아니면."
여왕은 질문 대신 제 입을 꾹 닫았고, 나는 그런 여왕을 들고 뛰어내렸다.
슈우우우우
쿠우웅!
으, 씨발 다리야.
나는 다리가 저리는 와중에도 여왕을 내려놓고, 여왕의 품에 쥐어진 투창집에서 투창 한 자루를 꺼내 던졌다.
카아아아아앙!
존나 단단하네.
녀석의 피부를 꿰뚫었어야 할 투창은 맥 없이 튕겨났고, 나는 혀를 차면서 녀석한테 습격받은 병사를 보았다.
끔찍하게 찢겨져 나간 허리에서는 검은 혈관이 돋아나고 있었다. 두르고 있는 판금이 종잇장처럼 찢어진 병사는 즉사했다.
그리고 그 허리를 반으로 갈라버린 거검이 나를 향했다.
검을 나에게 겨누고, 검은 혈관으로 이뤄진 말에 올라탄 채로 나를 바라보는 검은색 기사.
좆간지였다.
"이 씨발놈… 이 구역 간지왕은 나란 말이다."
나는 그게 배알이 꼴렸다.
저런 좆간지나는 말을 타고 있다니.
"저, 저건… 우리 왕가의 비보다!"
여왕은 나에게 뜻밖의 말을 전했고, 나는 왼쪽 허리춤에 메어둔 도끼와 장검을 차례로 꺼내면서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뭔 물건인데요."
"사용자의 정신력을 소모해 완벽한 전투마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물이다. 저기 저 박차! 저게 그 비보다, 대전사!"
그건 또 몰랐네.
그말대로 전신이 검은색으로 뒤덮인 기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박차가 그 발에 달려있었다.
아마 멀쩡한 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 사용하는 놈이 음험한 개새끼라서 저런 외양이 된 것 같아보였다.
"제 1왕자께서 가지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왕 전하, 1왕자인지 하는 새끼랑은 좀 사이가 좋았습니까?"
나는 나에게 검을 겨누고 말의 다리를 놀려 나에게 향하는 놈을 보면서 목을 좌우로 움직여 풀었다.
"어? 아니 짐이랑은 별로…."
마침 이 다크 판타지에는 유교도 없었지.
나는 안도하면서 도끼의 날로 오른손에 든 검날을 쓸었다.
챠아아아악!
화르륵
화염끼리 뒤엉키면서 볼만한 불똥을 줄기줄기 흘렸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저건 제 겁니다."
아이템 딱 대.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고, 난 바로 바닥을 박차며 봄의 대전사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