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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70/274)



〈 70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레크노미어 왕국에는 그다지 유희거리가 많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제국에게서 영웅이었던 시조가 독립하고,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지켜오기위해 싸워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왕가에서도 얼마 안되게 허가된 유희가 있으니, 그건 괴물끼리의 싸움을 주선하는 투기장이었다.
인간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는, 체급이 큰 괴물들끼리의 혈투.


피와 살이 튀고, 뼈가 부러지고 가죽을 문대면서 괴물들은 싸웠다.
샤론은 그 풍경을 보면서 미묘한 고양감을 느꼈었다.

그녀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 비슷한 감상을 품었다. 품에 안은 투창집을단단히 붙들고, 화려하게 펼쳐지는 불꽃과 강철의 춤사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가가각!


기술은 없었다. 순수한 힘싸움에 가까웠다.
저쪽에서는 압도적인 질량과 말의 기동력으로 승부를 봤고, 주현성은 압도적인 근력과 그나마 좀 있는 기술, 속성적 우위를 승부수로 내세웠다.
그래서 이 고착된 싸움은, 괴물이나 맹수 따위의 싸움을 연상하게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일반인이 따라잡을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캉!

"씨발…!"


주현성이 씹어뱉은 욕설에 여왕이 어깨를 움츠렸고, 봄의 대전사가 딛은 땅이 움푹 패이더니 빠르게 직선으로 뛰어올랐다.

카드득


뛰어오른 말이 앞다리를 내세우며 떨어지자, 주현성이  다리를 붙잡아 땅에 메치고는 발로 걷어찼다.


쾅!


걷어차인 인마가 한데 섞여바닥을 구르고는 다시 직립해 마주본다.
샤론은 괜히 침을 삼키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여왕은 주현성이 어떤 존재인지,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


씨발, 화가 안 나네.
거인의 힘 중복 발동이라면 저딴 새끼는 3초면 뒈지는 건데, 안타깝게도 지금 나에게는 의사 발동한 거인의 힘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있다면, 봄의 순례자는 싸우는 법에 대해서는 좆도 모르는  같아보였다는 거다.
전략 게임 AI를 액션 게임에 가져다놓은 느낌에 가까웠다.
기술적인 싸움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지 놈은 그저 정직하게 묵직한 거검을 휘둘러댔고, 그에 대응하기는 정말 쉬웠다.
심지어 나에게는 힘과 근래에 마리암과 세레나를 통해 배운 자잘한 기술들이 있었다.


 칼의 질량과 말의 기동력을 무시한다면좀 싸울만 했다.
심지어 싸움의 균형은 점차 기울고 있었다. 이쪽에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저놈은 나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무리를 하면서 자신의 대전사를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고 있었다.

챠아악, 챠아악!

타오르는 장검에 긁어낸 도끼가 거세게 타올랐고, 타오른 화염은 도끼날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물리 데미지가 없이, 화염 데미지만 존재하는 무기. 여름의 도살자의 애병, '낙인'.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화염을 두른 그레이톰의 심판은 먹히지 않지만, 녀석은 내가 들고 있는 도끼를 철저히 경계하며 억지로 몸을 놀려 피해댔었다.


한 마디로, 이거에 닿으면 저 새끼가 존나게 곤란해진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나는 알아낸 약점을 무시하고 정정당당히 싸울 정도로 속 좋은 놈이 아니었다.


약점이 있으면 집요하게 그것만 조진다.
친데 또 치고, 아픈데에 소금도 뿌린다.
남자와 싸울 때는 고간만 노린다.
그게 나, 주현성이다.


챠아아악!

"두려운가?"


내가 다시 한 번 도끼를 긁어내자, 도끼에 화염이 드글거렸다.
봄의 씹새끼는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고, 이미 상체와 하나된 듯 보이는 말의 형상이 발을 굴렀다.

이걸 안 받아주네.
나는 아쉬워 하면서도 자세를 낮췄고, 마리암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도끼를 손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내가 숨을 들이키는 순간, 놈이 달려들었다.

카아앙!


녀석이 재빠르게 뻗은 말의 다리를 그레이톰의 심판으로 쳐내고, 아리는 손목을 억지로 움직여 휘두른다.

카가가각

봄의 씹새끼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두르고 있는 갑각으로 검격을 흘려냈다. 궤도가 꺾인 그레이톰의 심판이 빠르게 지면에 가까워졌고, 나는 그레이톰의 심판에서 손을 놓았다.


콰직!

그레이톰의 심판을 떨구기 무섭게 나를 향해 뻗어지는 말의 다리.
나는 그 다리를 옆구리에 끼워 잡고는, 도끼로 말의 무릎 위를 찍었다.

화르르르륵

말은 울부짖지 않았다. 그 등장만큼이나 조용하게 말은 타올랐다. 봄의 씹새끼는 당황하면서 억지로 몸을빼냈다.

"어딜 가, 이 씹새끼야!"

하지만 나는 놈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크게 왼팔을 젖히고는 들고 있던 도끼를 바로 내던졌다.

서걱


놈이 공중에 떠올라 도망치려는 순간, 내 도끼가 녀석의 다리를 갈라버렸다. 갈라진 틈에서는 검은 혈관이 타오르며 꿈틀거렸고, 일전에 내가 마셨었던 물약이 쏟아져 내렸다.
비쥬얼 극혐이네.

놈이 바닥에 몸을 떨구고, 꿈틀거렸다.
싸움은 끝이 났지만, 봄의 씹새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전신을뒤덮고 있는 갑각을 꿈틀거렸다.
분명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았다.

이럴 때 가까이가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여왕 전하, 투창을."
"…아, 응."

여왕은 투창을 내밀어왔다. 나는 그 통짜 금속을 받아들면서 권능을 사용했다.
화염이 넘실거리면서 내 손목을 간질였다.

투쾅!


쏘아진 투창이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봄의 대전사를 꿰뚫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염이 갑각 내부를 태워먹으며 넘실거렸다.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대전사의 유해가 스러지고, 그 자리에는 박차만이 남았다.

"좆밥새끼."

나는 그 잔해로 다가갔다. 이미 완전히 타버렸으니 이제서야 나한테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집어든 박차는 뭔지 모를 문자 같은  빼곡했는데, 구글 번역기가 뇌에 탑재된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보면 언어가 아닐 가능성도 농후해보였다.
뭐,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이거 어떻게 씁니까?"


분명 발에다 걸치는 형태인 거 같긴 한데… 이걸 어떻게 달지?
몇  기웃거리던 나는 대충이라도 끼워보기로 하고는 가죽 끈 같은 걸 내 판금 장화 위로 둘렀다.
색이 미묘하게 안 맞긴 한데, 이정도면 감지덕지다.

나는 박차를  장화를 기웃거리던 걸 멈추고는 여왕을 돌아봤다.


"어떻게 쓰냐니까?"
"아, 그, 땅에 박차를 강하게 튕기는 거면될 거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나는 봄의 대전사가 타고 있던 그런 말을 떠올리면서,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 박차의 불똥이 거세게 튀어올랐다.
그 불똥은 삽시간에 커졌다. 마치 태양을 뜯어내는 것처럼 화염이 바닥을 핥아대며 점차 모양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땅을 핥아대는 화염은 발굽과 다리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욕심 많은 불꽃은 갈기와 머리로.
원래 그랬다는 듯, 나는 그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정확히는 그 말이 내 밑에서 생겨난 거지만.
전신이 거대한 화염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나에게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몽실몽실한 촉감만이 있었다. 기묘했다.

화염에 질량이 있었나?
내가 문과라 알 수가 있어야지.

"세상에…."


하지만 여왕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는지 연신 놀라워 하기만 하고 있었고, 흩어져 있던 중장병들 역시 나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하기야,불타오르는 말에  좆간지 나는 기사가 있다면 나라도 넋 놓고 보겠다.

"이거 어떻게 움직입니까?"
"…사용자의 정신에 따라 움직인다던데… 대전사의 수족처럼. 적어도 짐이 듣기로는…."
"좋습니다. 여기서 딱 기다리세요. 봄  더 줘패고 오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을 끌어내리며 말의 불타오르는 갈기를 쓸었다.
내 명령에 따라 말은 바닥을 박찼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주현성은 성벽을 수직으로 내달렸다.
방어에 힘쓰느라 활시위를 당겼던 궁수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치솟는 한 화염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타오르는 화염은 지옥의 업화처럼 넘실거렸다. 그 화염의 첨단에 자리한 두 눈동자는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일렁이며 타올랐다.
분명히 의지나 자아가 없을 화염일텐데도 말에게서는 흉포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 위에는 기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등에 짊어진 큼직한 검을 꺼내들었다.
꺼내든 검에서화염이 치솟았으나 성벽 한 켠에 우뚝 선 타오르는 인마,  위협적인 모습을 보고도 병사들은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멋대로 저 기사가 어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며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올렸다. 양손을 모으며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히히히히힝!


그러자 말이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치켜올렸고, 기사가 타오르는 거검을 높이 들었다.

신화적인 광경에 병사들은 물론 교단의 중책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한창 화염을 쏘아내던 메이는 놀랐는지 크게 뜬 눈으로 그 궤적을 쫓았다.
더 이상의 응전은 소용이 없었다.
여기에 신이 있었으니.


투웅!


말이 발을 구르기 무섭게, 사람들은 일순 그 움직임을 놓쳤다.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인마가 밤하늘에 멋진 궤적을 새기며 날아올랐다.
그렇게 쏘아진 신형은 적진을 향해 떨어졌다.


  아 아


멀찍이서 들려온 소음과 그 성스러운 화염.
신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을 광경과 함께 살육이 시작됐다.
병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여름이시여…."


휘둘러진 거검이 다가오는 병력들을 쪼개고, 불태웠다.
타오르는 말이 발을 뻗을 때마다 진형이 무너졌고, 원거리 공격을 쏘아내는 적의 마법사와 궁수, 사냥꾼들은 번번히 허공만을 갈랐다.
하지만 당해주기만  생각은 아니었는지 공성병기 하나가 움직였다.
마침내 그 투사체가 주현성에게 쇄도했다. 몇 마음 약한 신도들은 무심결에 눈을 감았으나.

까아아아앙!

정확히 노리고 휘둘러진 거검이 그 투사체를 튕겨내 공성병기를 때려부쉈다.
뒤늦게 성벽 위로 올라온 여왕은 그걸 보면서 복잡하게도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은 무척이나 안전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여유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주현성을 배신할 생각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부풀린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당연한 몇 가지 사실을 주현성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당장에 같은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그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왕이 여럿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암투와 전쟁, 모략이 벌여지기 마련이다. 주현성의 세계에서 무수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듯, 샤론이 배워온 이 세계의 역사 역시 그러했다.
아무렴 인접한 왕국, 영지 간에서도 그런 일이 빈번한데, 한 영지에 불과한 고대의 도시에 왕이 둘이나 있다는  샤론에게 있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왕이라고 참칭한 벌을 주어 마땅할텐데, 여왕 자리를 유지해도 된다고 하는데다, 그것을 떳떳히 드러내도 상관 없다니?

조언해야할 이들조차 주현성의 그런 결단에 반대 한 번 하지 않으니, 그녀는 마치 바보들의 세계에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몹쓸 망상까지 했었다.
어쨌든, 주현성의 그런 멍청한 결정은 그녀에게 몹시 좋았다. 샤론 레크노미어 진 타니아는 주현성의 멍청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결단에 조소를 지으면서 계략을 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간 준비했던 모든 계획을 머릿 속에서 파기했다.

정치, 모략, 암투.
이건 인간에게나 먹히는 일이다. 상호간 힘의 균형이 크지 않고, 상호간 종족적 차이가 크지 않을 때에나 먹히는 법이다.
개미가 인간을 상대로 뭘 꾸미든 무의미하듯, 그녀는 성벽 너머에서 신화를 재현하고 있는 대전사를 보면서 어떤 모략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니, 계산했다.
동시에 왜 그의 신하들이, 그녀의 왕위를 인정한다는 아둔한 판단에 반대 한 번 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10명의 사람  바보만 10명일 수는 없는 법임에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서 나오는 묵인이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녀가 수작질을 부려 도시 전체를 그의 적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전부 죽을 거야.'

 대전사가 힘으로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모든 시민이 죽을 때까지 살육을 이어나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야 샤론은 드디어 주현성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구릿빛 피부의 여자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간단했다.

저 대전사가 아무런 탈이 없기를.
그리고 자신을 해치지 않기를.
자신의 멍청한 계획을 눈치챘을, 저 신화적 존재가 자신을 자비롭게 용서해주기를.
이미 그랬을 신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지 않기를.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기도가 통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의 순례자가 이끌고 온 시체들의 군세는무너졌다.
불타오르는 잿더미만이  참상을 지나칠 무렵, 여왕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그 태양은 주현성이 내리는 자비처럼 무척이나 따스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대전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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