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한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빌어먹을 놈.'
봄의 순례자는 탄식했다. 탄식하면서 분노했다.
그건 패배에서 기원하는 종류의 분노였다.자기자신에 대한 책망에 가까웠다.
더 잘할 수있었다던가, 더 나은 방법이 있었다던가.
봄의 순례자는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차라리 저 놈이 너무 강해서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한참 나았으므로, 봄의 순례자는 그렇게 자신의 결점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는 잡았다. 오늘 녀석과의 전투, 지금까지 녀석과 싸워오면서 느낀 감흥이나 분석한 것.
그것들을 조화하면서 봄의 순례자는 주현성을 쓰러트릴 수 있는 비책을 떠올렸다.
그게 먹힐지는 알 수 없었고, 사실 봄의 순례자는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실행하는 것 외에 길은 없었다.
영원의 구도자인 자신이어째서 이런 꼴이되었는지에 대한 자책은 차마하지 않았다. 너무 비참했으므로.
그는 그 준비를 서두르며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자신의 수족을 부감했다. 그리고 그들을 차례차례 연결을 끊어 신성을 확보했다. 멸망하는 세계 각지에서 퍼져있던 수족들이 차례대로 의문사하며 자리에 쓰러졌다.
순례자는 그러면서 제 앞에 도달한 이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어둑한 숲의 그림자 위로 구름이 드리웠다.
칙칙한 색의 구름에서는 번개가 감돌았고, 그녀의 주변에서는 짙은 유황의 냄새가 풍겼다.
살아있는 재앙,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는 신.
사람들은 그녀를 재앙의 어머니, 가을의 마녀라고 불렀다.
가을의 마녀는 길게 늘어진 갈색에 가까운 제 옷자락을 흐트러트리며 그림자에서 걸어나왔다.
그런 여자는 머리 위로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귀를 가리지 못했다.
길쭉한 귀는 털로 덮여있고, 그녀의 머리칼처럼 나뭇결 같은 색이었다.
흔히들 여우나 늑대 등 개과의 생물이 달고 있는 뾰족한 귀였다.
그런 그녀의 옷자락이 흐트러질 때마다 풍성한 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꼬리가 흩날릴 때마다 유황과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 죽음의 냄새가 가장 짙은 건, 그녀가 안고 있는 길쭉하고 다소 화려한 창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창을 안고 있었는데, 봄의 순례자는 그렇게 무기를 애지중지하는 모습과 가녀린 미망인 같은 외양과는 달리 가을의 마녀가 무척이나 막강한 창수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봄의 순례자는 의도적으로 창에 눈을 두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쩐지 처연한 표정으로가을의 마녀는 입을 열었다.
"모르겠구나, 너는 어찌할 생각이느냐?"
봄의 순례자는 제 정신이 기거하는 육신을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을의 마녀도 봄의 순례자도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신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신성은 지금은 죽어버린 어떤 존재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거기에 여러 신성을 한데 묶어 섞어낸 듯한, 기이하면서도 무척 강력한 신성이었다.
그 죽어버린 존재는 여름의 도살자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해방자라고 불리는 게 분명했다.
봄의순례자는 그 신성이 자못 두려웠다.
준비해온 계획, 병력, 모략.
모든 게 산산히 부숴져 잿더미가 되는 가운데, 그는혹시나 자신 역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놈을 죽이기 위해 준비할 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준비가 끝나는대로 놈을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갈망하던 것을 손에 넣게 될 거다."
확신에 찬 목소리. 이미 몇 번이고 패배한 존재가 품을만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자신했건만 쉬이 패배해버렸으니 더더욱 그럴테지만, 가을의 마녀는 비웃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처연한 표정과 그러한 태도로 긍정했다.
"너라면 그리할 수 있겠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대가도 받아갔으니 신성에는 여유가 있을텐데."
가을의 마녀는 그 말에 침묵했다. 생각을 한다는 느낌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침묵.
퇴폐적인 느낌을 줄줄이 풍기는 그 미색을 띈 얼굴로,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왕국에 있는 나의 자손들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렸고, 그에 자연이 공포에 떨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그러쥔 가을의 마녀가 낮게 웃었다.
나뭇잎이 바싹 마르고, 곧 완전히 바스라졌다. 가을의 마녀의 신성을 견디지 못한 자연이 그저 죽어버렸을 뿐이었지만, 봄의 순례자는 그 자연스러운 권능의 행사에 눈쌀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저정도의 권능은, 세상이 멸망에 접어들 수록 강해지는 겨울의 폭군이나 할 수 있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 도시에 있던 나의 아들은 시련을 이겨냈구나. 그것도 아주 휼륭하게. 나는 어미된 자로서 그게 몹시 기쁘고 기대가 되는구나."
그래서 봄의순례자는 그 말을 들으며 이 여자, 4신 중 하나이자 그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아주 많은 신성을 확보하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가을의 마녀,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자식이라고 여기는 정신 나간 어미.
차라리 그것 뿐만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했다.
그녀가 재앙의 어머니라고 불리우고, 많은 추종자가 있음에도 신성을 티끌만큼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자신을 추종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자식에게 재앙과 시련을 내리고 고난을 뿌려 그 삶을 황폐화 시킨다.
여물은 곡식을 수확하듯 그렇게 삶을 수확하고 나면 그녀는 신성을 쌓아올릴 수 있다.
그녀의 총애는 이겨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종류의 것이었으니.
정신 나간 여자였다. 나머지 셋이나 되는 신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의 방식에 공감하지 못했다.
봄의 순례자 역시 그러했다.
"정신 나간 년. 그놈이 너까지 죽일 거다. 네 아들이니 뭐니 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어미 된 자로서 자손에게 시련을 내리고 상벌을 하는 건 당연한 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봄의 순례자여."
봄의 순례자는 더 이상 말을 할 가치를 찾지 못했다.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다.
"너의 정신 나간 취미에는 관심 없다. 원하던 것도 쥐어줬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다."
가을의 마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익은 벼와 같은 금색으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
"좆밥새끼."
불타오르는 말이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나는 그 말에서 내려 상반신 조금만 남아있는 시체에게 다가갔다.
시체는 검은 혈관으로 덮여있었고, 그에 걸맞게 오지게 단단했다.
심지어 불타오르는 순간 몸을 사출시켜 화염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
하지만 더 이상 싸울 수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 새끼는 더듬더듬,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충분히 즐거워하는 게 좋을 거다, 해방자여. 다음에는 이렇게 되지 않을테니."
"이미 네번이나 털린 좆밥새끼라 안 들리는데? 이정도로 털렸으면 내가 네 담당일진인 걸 인지할 때 아니냐?"
봄의 병신새끼는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웃었다.
이 병신이 뭔 꿍꿍이를 꾸미든 간에, 내가 정면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걸릴 건 없었다.
"오만하군. 힘에 취해서 힘을 휘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필멸자는 숱하도록 봤다. 네놈이 그 중 하나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와, 필멸자래. 존나 신딱 냄새가 나네."
"…신딱이 뭐지?"
"신성 딱딱이. 신성 딱딱거리면서 늙은 냄새 존나 풍긴다고."
봄의 순례자의 표정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애초에 표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 근데 내가 이겼는데 너도 뭐 줘야하지 않겠냐?"
"…내가 왜 그래야하지?"
그러게.
그냥 던진 거였는데, 이유는 딱히 찾지 못했다.
"그럼 바로스킵 들어가고."
내가 판금장화를 녀석의 얼굴에 올려놓자, 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든지 한 가지만 대답해주마. 네놈이니만큼 어이 없는 질문으로 허비할 수도 있겠지."
오, 생각보다 순순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까닭을 알 수는 없었다. 다음이 어쩌니 했던 거 보면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제 질문을 섬세하게 골라야 했다. 이전에 물어본 것과 겹치는 거, 이 새끼가 모를만한 걸 물어보면 안된다.
내 숙고가 기니 봄의 순례자는 나에게 눈초리를 보냈고, 나는 괜히 발에 힘을 줘서 놈의 코를 부러뜨렸다.
"가을의 마녀, 네가 보냈냐?"
생각해보면존나 이상했다.
왕국에 갑자기 마녀가 나타나서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도 꽤 수상한데, 거기서 갑자기 봄의 순례자가 나타나 여기로 가라고 했다니.
물론 단순히 그 병력들을 이용해 나를 타격하는 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음험한 새끼들은 보이는 것 이상의 노림수가 있는 법이었다.
"…예리하군. 멍청한 놈인줄 알았―"
콰직!
씨발놈이 말을 막하네.
나는 발을 치우고서 곧장 주먹을 내리찍었다. 내 단단한 주먹이 녀석의 인중을 타격했고, 녀석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오호, 미처 고통을 경감 못 하면 너도 아파하는구만? 지식이 늘었다."
봄의 순례자는 짜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보냈다."
"그리고?"
"뭐?"
"왜 보냈는지, 뭘 대가로 줬는지 그런 건 안말해주냐."
"내가 왜 그래야―"
콰득!
과육 부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부숴졌다.
안타깝게도 몸에 스며드는 신성은 없었다. 뭔가 새로운 권능이나 영원의 정신 강화 같은 게 필요했건만.
지금 영원의 정신이 존나 계륵인 것도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있나.
득템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었고, 잿더미나 부숴진 시체 등을 밟으면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은 내가 그 앞에 서자마자 지체 없이 열렸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성벽 위,안뜰, 시민들의 주거지 등지에서 사람들이 무수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 하는 그런 게 없더라도 약간 움찔할 정도로 많은 시선이었다.
뭔데 씨발.
내가 의아해하면서 폭군의 검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교단의 중책들이 다가와 내 앞에서 무릎 꿇었다.
"…엉?"
그 일련의 행동은 전염병처럼 퍼졌다. 나는 성벽 위에서 들리는 소리와 눈 앞의 사람들의 행동으로 모두가 나를 향해 기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게 사이비 교주가 보는 경치란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 나 자신이 했던 행동을 그제서야 객관화 할 수 있었다.
불타오르는 말에 탄 존나 멋있는 중장기사가, 망토와 화염으로 타오르는 검을 휘두르며 적을 일소하는 풍경.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까지.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태양을 보았고,도시의 끄트머리에 비스듬히 걸쳐있는 태양을 보면서 박차를 바닥에 굴렀다.
히히히히히힝!
삽시간에 불어난 불똥은 화염이 되었고, 화염은 업화가 되어 나를 지탱했다.
나는 어느새 화염으로 된 말 위에 있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나 침을 삼키는 소리,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소리 정도만이 들렸다.
와, 좆되네.
전이라면 대전사를 복창하며 무기를 두드려댔을 산적 출신 병사들도 조용히 나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내 안의 어그로꾼이 뭔가 멋있는 동작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는 괜히 투구 속에서 고개를 돌려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때 바로 뭔가를 외치거나 말을 하는 건 역으로 간지가 덜날 것 같았다.
무기질적인 느낌을 뿌리는 갑주에다 투구까지 쓰고 있으니, 이건.
척
간지나는 포즈를 취해주는 게 정답이었다.
내가 폭군의 검을 높이 들어올리자 그렇게 치켜들은 검에서 화염이 치솟아 검날을 휘감았다.
치솟은 화염이 일렁였고, 병사들부터 교단의 중책, 심지어는 여왕과 근위대마저도 나에게 선망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우리의 승리다!!!"
우오아아아아아아아!!!
내 외침에 뒤이어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았고,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503, 당신이 옳았어.
이거 좆되게 기분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