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2화 〉이방인 (72/274)



〈 72화 〉이방인

아, 게임하고 싶다.
비오듯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훑어내면서 내가 했던 생각은 궤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게임이 아니면 뭐, 만화를 읽고 싶다던가.

하지만  바람은 그다지 부질 없었는데, 내가 있는 장소는 만화는 커녕 그림이라고는 극히 드문 다크 판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즐길 거리라면 도박인데, 도박은 좀 그렇지.

나는 단단한 흙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었다.
내 주변에는 근위대  기사단들이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사용하는 설비가 있었고, 나는 그 설비를 사용해 나름 운동을 해냈다.
씨발, 한창 운동하던 급식 시절보다도 지금이 더 빡셌다.
다크 판타지라 그런지 단련 방식은 지나치게 원시적이었고, 꼭 이래야하는 걸까 싶은 운동도 상당량 있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나는 꽤 단단해진 내 복근이나 슬슬 형상이 뚜렷해지는 내 팔근육을 문질러봤다.
만족감이 치솟았다.

물론 거인의 힘으로 육체를 빠르게 재생하지 않았다면 효과가 이렇게 빨리 나오진 않았겠지만.
또 킬까 싶어 권능을 쓰려는 찰나, 뭔가 뒷목에 닿았다.

"아."
"오늘 단련은  하셨나요?"

언제 왔대.
겨울의 신부는 어느새 다가와, 내 목에 차가운 강철 주전자 같은 걸 대고 있었다.
마침 딱 몸이 달아올라있던 참이라 그 차가운 감촉은 기분 좋게 다가왔고, 나는 그 감촉을 한동안 즐기다가 받아들어 들이켰다.

지친 몸에 스며드는 포도주가 맛있었다.

"크, 이거 어디서 구해왔습니까? 여기서는 맥주 밖에 없다고 하던데."

겨울의 신부는 베일을 쓰지 않은 채, 웃으면서  옆에 꿇어앉았다.


"여왕 전하께서 주셨어요."
"아하."

물론 나한테 머리채도 잡히고 오줌도 지리고 했다지만, 샤론은 일단은 왕가 출신이다.
이 판타지 세상이 다크 판타지가 되기 전만 하더라도 미래가 창창했을테고, 나름대로 그런 고급 사치품이라면 썩어나게 갖고 있었겠지.
이것 역시 그렇게 가져온 물품 중 하나일 거다.
왜 이걸 겨울의 신부한테 선뜻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울님도 좀 드실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수고한 당신께서 드셔주시는 걸로도 기뻐요."


음, 이거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다고 하셨다는 그런 맥락인가.
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나는 존나 수고했고, 목도 탔다.
이 주전자 전체를 비우진 못하겠지만, 나는 꼴꼴거리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 너머로 와인을 넘겼다.

"크, 녹네요. 녹아."


취기가 올라올 정도로 도수가 높진 않았지만, 과음은 좋지 못하다.그것도 운동을 마친 후라면.
나는 아직 반 넘게 차있는 주전자를 내려놓으니, 으슬으슬한 한기가 덥혀진 몸을 스쳤다.

조용히  옆에  붙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겨울의 신부를 흘긋 보았고, 무료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가했다.
뜬금 없는 운동을 하는데에는 그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
봄의 순례자를 조져버린 이후로 고대의 도시에 이렇다할 일이 없었다.

위기가 없는 것도 그랬지만, 내가 무언가를 추진해 도시에 '문화 혁명'을 하기에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편협하고 적었다.
그럼 유희거리로 눈을 돌려서 뭔가 즐겨보자, 싶자면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도박도 흥미가 없어, 승마는 애초에 새로 얻은 박차 때문에 의미가 없고.
게임이나 만화라도 읽고 싶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렇게 남은 것 중 가장 할만한 유희거리는 운동이었다.


게다가, 누가 알까.
이걸로 협응력이 오르면 거인의 힘의 효율도 좋아질지.
나름의 장점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근위대와 기사단의 자문을 구해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름의 단련을 시작한지 한달에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도 부르는 사람이나 이상한 소리나 그런  없나요."
"예."


겨울의 신부는 고아하게 앉은 채로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여기에 머물러있는 것도 그렇고.
왜 이리 오늘따라 앵기지?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내 허벅지에 손을 얹었고,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간질간질한 온기가, 겨울의 신부의 신체 중 가장 따뜻한 부위가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짙은 애정이 느껴졌다.

"가끔 그런 날이 있지 않나요? 평소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지거나,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예, 뭐 가끔 있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고 싶다던가, SNS에다가 뻘글을 싸재끼고 싶다던가.
그런 종류의 충동.
종종 새벽감성인 그것은, 저녁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발휘되기엔  그랬다.
아직 점심 조금 넘긴 시간 밖에 안되는데.
그래서 나는 그녀의 목을 거쳐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말을 이어가라며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겨울의신부의 차가운 손이 내 허벅다리를 거쳐 내 허리를 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지척에 서로의 얼굴을 둔 채로 말했다.

"오늘은 당신께 제 소임을 다하고 싶은 날이예요."
"평소에도 그러지 않았던가요?"
"요즘엔 당신께 응석을 부리거나… 사랑을 받기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겨울의 신부는 나와 몸을 한 번 섞은 뒤부터는 내게 애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고, 그 빈도만큼이나 응석을 부리거나 부탁해오는 일도 늘었다.
거리가 줄어들어서기쁘다고 생각했는데.
내 고민을 읽었는지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문질렀다.


"오늘은 제가 당신의 시중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광대를 엄지로 문지르고, 뺨에 얹은 손으로 내 열을식혀줬다.

그래서 나는 운동을 계속했다.
나 혼자서 못할 것 같은 운동은 겨울의 신부가 도와줬고, 종종 목이 타거나 땀이 흐를 때면 그녀가 직접 돌봐줬다.
솔직히 존나 편했다.
배가 슬슬 주릴 무렵에, 겨울의 신부는 내 복근을 손으로 더듬었다.


"몸 좀 다부져진  같지 않아요?"


애초에 배가 나와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내 복근은 거의 전문 헬스 트레이너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겨울의 신부는 내 복근을 손바닥으로 누르거나,  차가운 검지로 결을 훑거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께서 처음 저와 만났을 때에도 몸은 꽤 좋으셨지만… 지금은 어엿한 전사의 몸이네요."

겨울의 신부는 홀린듯이 내 복근을 만졌고, 나는 그렇게 만지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깍지 껴 잡은 손은 차가웠고, 그녀는 손을 잡히자 애타는 표정을 지었다.
뭘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식사나 하러 갈까요? 배가  고프네요."
"아, 죄송합니다. 당신께 드릴 음식을 가져온다는 게 까맣게 잊고 말았어요."
"괜찮아요. 오늘은 외식합시다."

겨울의 신부는 망설이는지 내 눈치를 보면서… 아니, 본다는 말은 틀린가.
아무튼 그녀는 내 심기를 읽으려 우물쭈물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밤이 찾아오고 있는 도시는 생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오가거나, 평화롭게 식사, 도박 따위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순례자 격퇴 첫날에는 그렇게 경계심과 긴강감이 맴돌았던 시장은 평화와 여유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범죄율이 극단적으로 낮은 것도 한 몫 했다.

애초에 새로이 들어온 세력은 돈과 재산이 많았고, 약탈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경단이 실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범죄가 아예 근절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평화로웠다. 빌어먹게 평화로워서, 이게 다크 판타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나는 불현듯 봄의 순례자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경고를 충실히 따르자면, 이 평화가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나부터가 이 도시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었으니.

슬슬 행동할 때임에도, 뭘 해야할지 갈피가잡히지 않았다.

봄의 순례자는 두문불출, 진심으로 숨어버린다면 내가 그 새끼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 이 새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거 외에는.
가을의 마녀는 지금 조지기엔 시기상조다. 단순 공격력과 공격 범위가 정신 나간 썅년을 잡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내가 더 이상 무언가를 얻는다고 해도 도움이 될 가능성은 낮으니… 메이가 쓸 마법 서적이라도 구해볼까.
그거라도 얻어야겠거니 싶어 내일이라도 메이랑 모험을 떠날 계획을 짜는데, 내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멈추고 곧 무언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내 손에 깍지 잡은 손은 부드럽고, 차가웠다.
 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움이었지만 그것도 솔직히 괜찮았다.
근데  이러는 거래.

"왜 그러세요?"
"저랑 있을 때는 저를 먼저 생각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으로 내 손등을 문질러댔고, 나는  근질근질한 감촉에 웃었다.
이런 적극성 나쁘지 않네.


나는 그런 그녀를 이끌고 선술집을 찾았고, 이미 두 번이나 중간에 일어난 경험이 있었던  선술집은 지난 번에 내가 미쳐 하지 못한 식사를 지금 다시 대접할 생각인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화롭네요."

문득 겨울의 신부는 그렇게 말했다.
뭐, 맞지.
위협이랄 것도 없었고, 괴물들은 성벽은 커녕 성문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자경단원들과 병사들 선에서 정리가 됐고,  탓에 시민들은 완전히 늘어진 채로 좆같은 아포칼립스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종교라던가, 국가라던가. 그런 게 전부 씹창난 상태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넘치니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기이한 평화는 내게 기묘한 기시감을 전해줬다. 마치 이 광경을 본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말도 안되는 소리지. 겨울의 신부랑 데이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런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뒤늦게 그녀의 말을 들을  있었다.


"당신께서는  이 도시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으신 건가요?"


…또?
말실수를 해도 저렇게 하네.
나는 그녀가 멋쩍어하지 않도록 대답했다.


"뭐…그렇죠.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당장은 그렇습니다."

문득 그녀가 예전, 사막에들어서기 전에 했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했었던 말들도. 나는 그녀에게 여름의 도살자를 도살해보겠다고 했고, 그리할  있었다.
어쩌면 그녀와의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가 나름의 메인 퀘스트 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피식 웃었다.

퀘스트는 무슨.  게임에는 레벨도 없는데. 잡생각을 밀어내며 종업원이 내어온 무슨 잡곡이 들어있는 죽을 퍼먹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시겠군요."


과연, 겨울의 신부는 눈치가 빨랐다.
 궁극적 목표에 정착은 없었다. 탈출만이 있었을 뿐이지.
언젠가는 도시를 떠나서, 마지막 신을 죽인 뒤에 이 게임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고, 그녀는 식사를 휘저었다.

"그 날이 오면, 저도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세요."


NPC답지 않은 말이었다.
한 편으로는 그녀다운 말이기도 했다. 앞을 보지 못하니 다른 감각이 기이하게도 발달해버린 초인적인 괴력의 종자.
섬기는 것 외에는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그녀는 내게 자신을 함께 데려갈 것을 조용히 부탁해왔다.
혼자서는 앞을  수 없었고, 나아갈 수도 없는 여자의 말이라 나는 더 오래 고민했다.

"…물론이죠."

결국 나는 애써 웃었다.
눌러두고 있던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난봉꾼처럼 이리저리 여자를 만나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었지만, 나는 이방인이었다.

세계 단위로 이방인인 탓에 나는 결국은 떠나야만 했다. 메이도 그랬다.
그녀가 말하는 '함께'까지 그녀를 데려갈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직전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이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는 느긋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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