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이방인
까앙!
내게 날아드는 발톱을 칼로 빗겨내고, 영원의 정신을 가동했다.
천천히 감속하는 세상 속에서 씹새의 발톱은 날카롭게 빛났고, 나는 그 궤적을 눈으로 쯫으면서 머리를 틀었다.
카가각!
옆구리, 정확히는 갑주를 스친 발톱이 땅에 틀어박히기 무섭게 나는 몸을 물리면서 외쳤다.
"메이!"
더 말할 필요는 없다. 메이라면 내 뜻을 잘 알아차릴테니까.
내 뒤에서 공기가 달아오르고, 화염이 타닥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일으킨 화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서 타들어가고 있다.
나는 메이의 화염구가 쏘아지기 전에 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다시 내게 쏘아지는 부리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칼을 단단히 쥔 채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그나마 최근에 들었던 폭음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수준으로 화염구가 터졌다.
폭발은 당연하게도 화염과 연막을 동반했고,나는 그 연막 속에서 몸을 숨긴 채로 그레이톰의 심판을 단단히 쥐었다. 허리를 틀고, 다리를 앞으로 내딛으면서 휘두른다.
챠아아아앙!
회색으로 빛나는 검날에서 쏘아지는 궤적은 내가 실제로 휘두른 궤적보다도 과장되어 있었다. 넓은 궤적으로 쏘아진 순수한 마력이 눈 앞의 날개 달린 개새를 쪼개놨고, 나는 후두둑 쏟아지는 내장을 피하려 다시 한 번 영원의 정신을 켰다.
투두둑
끼에에에―
"조용히 하세요!"
깡!
내가 허리춤에서 끌어내린 도끼가 머리를 쪼개놓고 나서야 개새는 침묵했고, 나는 부들부들 떠는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고는 먼지가 씌워진 갑주를 손으로 털어냈다.
"괜찮아?"
목소리에 진짜 걱정한다는 기색이 담겨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미묘한 안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상한 년이라니까. 벌써 몇번째 쓰는 전법인데.
"이거 화염 완전 내성이라 괜찮아."
"그래도 걱정은 되니까…."
메이가 말꼬리를 흐렸고, 나는 손을 메이의 후드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사정 없이 헝클였다.
"아아, 하지마아!"
키득키득 웃으면서 몸을 뒤로 빼낸 메이는, 자기 후드를 젖히면서 눈웃음 지었다.
나는 그런 메이한테 툭 뱉었다.
"나 못 믿냐?"
"아니, 완전 믿어! 주석만큼!"
"이야, 그정도냐?"
짱깨한테 주석만큼 신뢰한다는 소리를 듣다니.
나는 씩 웃으면서 죽어버린 괴물을 흘긋 보았다.
개의 머리를 달고 있는 독수리 엇비슷한 괴물은, 이미 부리라고는 할 수 없는 주둥이를 갖고 있었지만 그 감촉만큼은 확실히 부리였다.
단단하고 매끈하지만, 개의 주둥이처럼 털이 돋아나 있었다.
한 마디로 역겨웠다.
하지만 봄의 순례자 특유의 역겨운 검은 혈관이나고름 같은 액체는 전혀 없이, 이건 그냥 이 다크 판타지의 고유종인 야생동물 쯤으로 보였다.
아니면 괴물이던지.
나와 메이 주변에는 이런 괴물이 더 있었다. 이족 보행하는 악어도 있었고, 머리가 무슨 나무랑 비슷하게 생긴 이상한 괴물도 있었다.
이 모든 시체들의 공통점은 검은 혈관은 없이 더운 피를 줄줄이 흘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존나 신경 쓰였고.
"이 새끼 이제 나 안 노리나?"
"응? 뭐가?"
메이는 괴물의 털가죽에 피범벅이 된 방패날을 문질러 닦았고, 약간 날이 상해버린 적조를 시체에 푹 담궜다가 빼내 수리했다.
봄의 순례자가 다루는 수족들은 모든혈액이 봄의 순례자가 만든 물약으로 대체된다. 이 망할 놈의 다크 판타지에 오고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니 만약에라도 이 괴물들이 봄의 순례자가 다루는 놈들이라면 적조를 피에 담궈 수리하는 짓거리가 가능할리가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메이는 싱겁다며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고, 나는 그런 메이를 뒤로 하고 괴물을 걷어찼다.
사실 이 외출은 다른 목적이 훨씬 컸다.
봄의 순례자는 나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고, 나 역시 그걸 잘 알고 있다. 봄의 개새끼에게 있어서 나는 얼추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치워버려야 할 놈일테지.
하지만 봄의 순례자 입장에서 철저히 방비된 도시 안에 있는 나는 노리는 건 미친 짓이다.
안 그래도 나 하나만으로도 꽤 상대하기 빡센데, 도시의 도움이 있다면 상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외지에 있을 수록 노리기 쉽고 상대할만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내가 존나 세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아니면 적어도 전령이나 정찰용 수족이라도 보내서 내 행동을 감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숲에 나온지 하루가 지났음에도 흔적은 커녕 그런 낌새도 있지 않았다.
혹시 힘이라도 끌어모으고 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이번에 대전사까지 끌고 왔다가 줘털렸던 걸 감안하자면, 화신이라도 낭낭하게 준비하는 모양이지.
아무튼 간에, 나는 슬슬 지루한데다 실망까지 했다.
주된 실망의 원인인 봄의 순례자였고, 두번째는 괴물들이었다.
검술을 배워서 이제야 좀 검사 티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신나서 실전을 치루러 온 건데, 괴물이나 짐승새끼들이 죄다 좆밥이니 써는 맛이 있어야 말이지.
쯧.
내가 혀를 차자 메이가 다가와 까치발을 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실 웃으면서 나를 달래려고 하는 게 퍽 귀여웠다.
"수고했어!"
"…그래, 그래."
원래 목표인 아이템이나 찾으러 가야지.
나는 봄의 순례자에 대해서는 단념했다.
"가자."
"어디를?"
메이에게는 그냥 같이 사냥을 나가자고 했고, 경험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하드코어 게임이라서 사냥이 별로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님에도 메이는 별 말을 덧대지 않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 탓에 메이는 내가 뭔 목적으로 나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네 머리에 씌워줄 아이템 찾으러."
"아이템 얻으러 온 거였어? 그것도 내 거?"
메이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고, 나는 그런 메이의 후드를 손으로 잡아 머리에 꾹 눌러씌웠다.
"어허, 고인물한테 토 달지 마라."
"아, 으, 하지마!"
"흐즈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메이는 즐거운 모양인지 버둥거리면서 꺄륵댔고, 나는 그런 메이와 몇 번 더 놀아주다가 후드를 놓았다.
어차피 곱슬이라서 좀 흐트러진다고 티가 나는 머리카락도 아니었다.
"근데 여기에 아이템이 있었어? 난 숲이라서 우리가 길 잃은 줄 알았는데."
이 새끼 나 못 믿네. 아까는 주석만큼 믿는다면서.
나는 대답했다.
"물론 3인칭으로만 봤던 풍경인데다… 내가 마법사 템은 죄다 걸렀으니 약간 찾아가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맞아. 근데 길 잃어버린건 아니거든?"
"흐음…."
나는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던 메이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고, 메이는 한동안 나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아, 하는 탄성을 내더니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우리는 그렇게 숲을 가로질렀다.
종종 괴물이 나올 때마다 불에 태우거나 베거나 하면서.
"근데 마법은 어떤 기분이야?"
"응?"
"마법. 쓰면 어떤 느낌이냐고."
솔직히 권능은 느낌이랄 것도 전혀 없고 그나마 결과로 내가 권능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마법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아예 대가랄 것도 없고 난사해도 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있지 않나.
뭐 정신력을 대가로 소비한다던지, MP가 후달리면 탈진한다던지.
"으음… 머리가 복잡해져!"
그건 네 설명을 듣는 내 기분이고.
나는 메이에게 손짓했다.
"…자세하게."
메이는 팔을 휘적이면서 걷더니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애 돌보는 거 같은 기분이야."
"내가 돌봐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무슨 기분이야 그게."
"머릿 속에 애기가 있는데… 그 애가 바라는대로 달래주기도 하고, 간식도 주고, 칭얼대는 것도 받아주고, 반응도 잘 해줘야하는 느낌?"
그거… 머리가 복잡하다는 건가.
그러면 난사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서 메이를 돌아보니, 메이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재잘거렸다.
"근데 마법을 쓸 수록 그 애가 늘어나."
"존나 야하네."
"응?"
"아냐, 계속해."
애가 늘어난다는 어감이 존나 개쩔었지만, 메이는 언어적 차이인지 순수함의 차이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저기서 찡얼대고, 여기서는 간식 달라고 하고, 또 저만치에서는 울기 시작해서 달래줘야 하고, 그런 느낌이야."
얼추 듣자하니 수학 문제 같은 거겠거니 싶었다.
마법을 쓸 수록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늘어나고, 동시에 여러가지를 암산해야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근데 왜 하필 애를 예로 드는 거지.
수학이랑 친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다른 예시가 얼마든지 있지 않나?
가장 직관적인 예시로는 요리가 있었다. 뭐,동시에 세 개의 요리를 하는데 뭔가를 넣어놓은 오븐은 삑삑대고, 물을 끓여둔 냄비가 넘쳐서치지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만치에 놔둔 프라이팬 위에서 탄내가 나기 시작하는 느낌.
메이는 내 의문에 재밌는 예시라며 즐거워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보육원을 해서, 내가 맨날 가서 도와줘서 그런가봐!"
오호, 그거 그럴 듯한데.
나는 문득 메이의 천 흉갑 위의 두 산맥을 흘깃 보았다.
존나 컸다.
"그래, 넌 애 잘 돌보니까 괜찮겠네. 마법 좀 쓰는 거 정도야…."
"그치? 보육원 애들도 나 되게 좋아했어~"
그런 의미가 아니었지만, 꿈보단 해몽이지.
나는 메이가 풀어놓는 중국 보육원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 환경을 눈으로 훑었다.
슬슬 눈에 익은 지형이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 이 근처인데.
그렇게 한참을 물색한 끝에, 나는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있는 동굴을 찾아냈다.
겉면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처럼 거칠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부드러운 재질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독특한 은신처였다.
"와, 되게 신기하다."
메이는 그 부자연스러운 광경을 놀라워 했고, 나는 그 은신처로 다가갔다.
다가갈 수록 왠지 한약방 같은 냄새가 났다. 약간 텁텁하면서 콧속 점막을 자극하는, 왠지 모르게 묘하게 멀어지고 싶으면서 은근히 중독성 있는 냄새.
그 냄새를 무시하면서 들어서니 동굴은 왠지 칙칙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았는데, 그 중심에 위치한 물건 때문이었다.
미라의 바로 앞에 놓여져 있는 심플하면서 꽤 예쁜 서클렛.
중심부에 박혀있는 보석은 색색이 때마다 변했고, 그 보석을 두르고 있는 몸체는 은색으로 빛났다.
마력을 증폭해서 마법의 위력을 올려준다는 설정을 가진, 심플하지만 강력한 성능의 아이템.
예쁜 외양 탓에 많은 PvP 마법충들이 쓰고 나왔던 물건.
은둔자의 지혜라는 이름의 머리 장비였다.
나는 그걸 갖고 나와메이에게 보여줬다.
"와, 예쁘다."
역시 룩딸충.
나는 메이의 반응에 피식 웃고는 다가갔다. 메이는 내가 뭘 해주려는지 알았는지 바위에 걸터앉고는 후드를 벗었다. 곱슬거리는 밤색 머리칼이 숲을 지나온 바람에 흩날렸으나, 메이는 제 옆머리를 짚어 흩날리지 않게 하고는 꺄르륵 웃어댔다.
"씌워줄게. 머리 숙여."
"응!"
군말 없이 머리를 살짝 숙이는 메이에게 다가가, 서클렛을 조심스럽게 그 머리에 끼웠다.
은색 서클렛은 처음엔 좀 큰가, 싶었는데 메이의 머리에 씌우기 무섭게 그 머리에 가볍게 걸쳐질 수준으로 크기가 줄어들었다.
살짝 비쥬얼이 손오공의 긴고아 같을까 걱정했는데, 메이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어때? 괜찮아? 예뻐?"
메이는 제 머리에 씌워진 서클렛을 보라는 것처럼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고개를 휙휙 돌려댔는데, 그럴 때마다 밤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하지만 격한 움직임 때문인지, 아래에 매달린 두 개의 커다란 빨통도 그 움직임에 따라 출렁였다.
와, 씨발.
"훌륭하네."
"헤헤, 고마워! 예쁘다니까 좋다."
메이는그런 내 칭찬이 어디를 향한 칭찬인지도 모른 채, 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면서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