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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이방인 (74/274)



〈 74화 〉이방인

우리는 야영을 택했다. 한밤 중의 숲을 가로지르는 게 위험 부담이 상당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메이가 마법을 너무 사용한 끝에 피곤하다고 토로한 것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가져왔던 뭔지 잘 모르겠는 소세지를 덥혔다.
삽시간에 익어버린 소세지를 그릇에 덜어내고는 메이에게 내밀었다.

"아직도 머리 아프냐?"
"응… 조금."


우리는 은둔자의 지혜를 얻고 바로 야영 준비를 한 게 아니었다. 사실 당시에는 해가  때까지 긴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야영 준비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다만 메이의 적극적인 성능 확인 욕구로 인해 난 그녀를 데리고 무리하게 사냥을 하고 다녔고, 그랬던 탓에 메이는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아이가 다섯  있는 상태'가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뭘 생각할 여유조차 없댄다.
 어감이 존나게 야한 걸 제외한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먹는 건 제외인지 메이는 그릇을 받아들고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소세지를 씹었다.


"그런 상태가 되면 회복하는데는 얼마나 걸리냐?"


메이는 한창 입으로 음식을 밀어넣다가  말에 대답하려 멈췄다. 입을 움직여 겨우 안에 들어있던 걸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는 생각해보는지 침묵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메이는 다시 소세지를 입에 베어물면서 대답했다.


"하루 정도 자면 괜찮아져."
"하루라."


저 하루라는 개념이 약간 모호했다.
잠을 자지 않으면 회복이 안되는 건지, 아니면 24시간 쿨타임인지, 아니면 매일 아침몇시를 기준으로 회복되는지.
당장에 내 필살기라고 할 수 있을 화신강림은 24시간 쿨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편리하게 쿨타임을 알려주는 게임과는 다르게 이 세계에서는 편리한 UI가 없었다.
근데 저건 쿨타임이 아니라 마력 고갈 같은 현상 같았으니…. 얼추 알아봐야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나는 내 몫의 식량을 으적거렸다.


"나중에 좀 조사해보자."
"뭐를?"
"상세한 조건 같은 거."

메이는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같았지만, 이런 건  중요했다.
당장에 신들만 하더라도 원래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지 않고 짱 박혀있어야 하는데, 가을의 마녀는 왕국을 부수러 출두했고 봄의 순례자는 영토에 속박되지 않았다.
겨울의 폭군은 게임과 똑같이 쳐박혀 있는 듯 했지만.


게임과 달라진 것이 너무도 많으니 단순하게 생각하며 행동하거나 마구잡이로 마법을 부린다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그게 위기가  수도 있었고.
PVP에서도 그랬다.
쿨타임이 있는 권능이나 공격 한 번을 그르치면 좆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고, 나는 그런 경험에 의존해서 이 다크 판타지를 더듬어 살아남고 있었다.
막말로, 내 그런 점을 공부해서 공격해오는 새끼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 나라면 앵간하면 안 죽겠지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 대처가 미비해서 팔을 잃거나 눈을 잃거나 하는 거였으니.

"음, 네가 하는 말이니까."

메이는 이제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의문점이 있더라도 굳이 소리내어 묻는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메이는 제 몫의 식사를 빠르게 비웠고, 나는 메이보다는 살짝 느리게 식사를 끝마쳤다. 비어버린 그릇을 겹쳐 쌓아두니 메이는 가죽 부대에 들어있는 물을 들이키고는 모닥불을 지그시 보았다.

"있잖아."

일렁이는 불꽃을 지그시 바라보던 짱깨는 무릎을 당겨안고는 나에게 말을건넸다. 그 자세는 유독 메이의 태도가 왠지 불안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여긴 진짜 게임이 맞는 걸까?"
"…음."


메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솔직히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컷씬에서의 자동 행동 등을 보자면 게임의 법칙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막상 보면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넘치고 게임에서는 존재했던  없기도 했다.

메이는 내가 대답하지 못하니 조용해졌다. 제 무릎에 뺨을 대고는 길게 늘어진 곱슬머리를 차양처럼 제 얼굴에 드리웠다.
그림자가 진 얼굴은 표정이 보이지않았다.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일까.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하면 돌려보내준다는데,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정리했다. 망설이는 건 아니었다.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메이의 질문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얘는 진심으로 궁금한지, 드리웠던 머리칼을 걷어내며 나를 마주봤다. 모닥불 너머로 녀석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사람들.
짧은 말이었지만 나는그 안에 섞인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메이는 세레나, 세네카, 마리암, 기사단장 등의 조력자들을 NPC가 아닌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NPC가 떠오르는 인물들이지만, 메이에게 있어서는 생소한 사람들이다. 저들이 게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어떤 결말들을 갖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메이는 내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답해줄 수가 없었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대답을 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글쎄, 우린 다시  수 있겠지."
"어떻게?"
"바보냐, 친구 추가 있잖아. 네 아이디는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 맞다."

메이는 풀린 표정으로 웃었고, 그 웃는 얼굴을 모닥불의불빛이 핥아댔다. 흔들리는 음영이 메이에게 우수에 찬 분위기를 쥐어줬다.
우리는다시 침묵했다.  대화가 없다기 보단,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메이가 당겨안은 무릎을 팔로 감싸고 나에게 눈을 보냈다.


"있잖아."
"왜."
"밖에… 애인 있어?"


좀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없어."

정확히는 최근에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게임, 일, 게임만 하다보니 인간관계는 협소해졌다. 이 망할 놈의 게임 속에 들어오고 나서 얻은 인간관계가 근 5년 간의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넓다고 느낄 정도였다.


메이는  입가를 무릎에 묻어 웅얼거렸다.

"여기서는?"


…눈치 은근히 있네.
하지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대놓고 말하기엔  그랬다. 메이와 친해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얘랑 나는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는 질문을 바꿨다.

"겨울 언니랑은 어떤 사이야?"

마찬가지로 대답할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조용해졌고, 메이는 내 침묵을 읽어내려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리고 눈동자는 곧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메이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떨궜다.


"그렇구나."

메이의 목소리가 잠겼다. 칙칙한 밤에 어울리는, 잠겨드는 목소리로 메이는 한숨을 뱉었다.
메이는 불을 쬐면서 조용했고, 나는 그런 메이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얘는 짱깨다. 나랑 아무런 사이가 아니고.
근데 얘가 뭐라고 내가 대답하지 못한 걸까.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나는 묵묵히 불을 쬐면서 침묵했고, 우리의 침묵은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됐다.


*


도시로 귀환하는 아침, 메이는 평소처럼 활달했다.
어제의 질문이랑  우울함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도 평소처럼 메이를 대했고, 메이는 웃고, 떠들고, 인중을 가리고, 신나하면서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도시까지 갈 수 있었는데, 아마 이틀간 숲에서 놓은 깽판 덕에 괴물들도 누가  숲의 최강인지를 인지認知한 같았다.
도시까지는 금방이었다. 드래곤한테 뚫렸던 성문은 이제 거의 완벽한 퀄리티로 복원되어 있었고, 그 탓에 열리는 건 느리지만 웅장했다.
나는 나에게 경례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고. 병사들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도시는 왠지 어수선했다.
그게 도시 안으로들어서자마자 내가 느낀 감흥이었다.
왠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어디로 향하고 있었고, 병사들도 썩 긴장한 기색으로 사람들을 제지하거나 하고 있었다.


설마 또 습격인가?
또 습격이면 진부한데 싶어서 내 옆에 있는 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사냥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면갑이 없는 깔끔한 투구를 쓰고 있던 병사는 부쩍 긴장한 모습으로 내 말을 듣고는 한참이나 말을 버벅였다.

"그게… 서쪽 지평선에 괴물이 많아서 정찰대가 나갔다 왔습니다."


지평선에?
처음 듣는 이야기라 의아해하고 있으려니까 그 병사는 나를 안내했다.
인파가몰려있고 병사들이 분주하게 뭔가를 작업 중인 듯 보였는데, 그 인파를 가르면서 나는 점점 강한 혈향을 맡을 수 있었다.
뭔 일이래.

내 의구심은  해결되었다.
병사가 안내를 마치고 떠나자, 마리암이 내게 다가왔다.
마리암의  뒤에는 괴물 하나가 있었다.


뭔가 익룡처럼 생겼지만, 부리가 없었다.
차라리 부리 없이 뭔가 다른  달려있었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괴물의 머리는 영장류의 머리와 엇비슷했다.
공기 저항을 좆되게 받을 것 같은 비쥬얼과는 다르게 날개에 달린 피막은 무척이나 넓었다.

"귀공, 사냥은 끝난 거야?"
"예, 그럭저럭 수확도 있었고요."


메이는 제 머리의 서클렛을 가리켰다. 마리암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메이의 새 아이템에 관심을 두긴 했지만 그 관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 중요한 안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귀공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서쪽 지평선에서 대량의 비행이 가능한 괴물들이 출몰했거든."
"습격 받은 겁니까?"
"아니, 습격은 커녕 이 놈들은 우리 쪽을 피했어. 가까이 오지도 않았지."
"흐음."

 내가 없는 사이에 빈집 털이를 노린 봄의 순례자인가 했는데 괴물에게는 자세히 보니 봄의 순례자 특유의 흔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놈이 조종한 시체를 멀쩡하게 해치울 수 있을리도 없었고.

"봄의 흔적도 전혀 없군요."
"그렇지. 귀공이 오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어서 여기서 놔두고 있었는데… 대전사공이 그렇게 말했다면 확실하겠지."

보리스, 이거 치워놔라!
마리암이 제 부하에게 그렇게 외치자 용병들은  명의 인부를 데리고 와 시체를 끌고 갔다.
시체는 빨간 피를 줄줄 흘리며 사라졌다.

"그럼… 뭐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그게 문제야. 단서가 있는데 약간 확신을 못하겠거든."
"뭐길래요?"

마리암은 대답 대신 자신의 벨트에 걸려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굉장히 독특한 양식의 도끼였다.
화려하지도 조잡하지도 않은 딱 평타는 치는 수준의 도끼였는데, 겉에는 뭔가 처음 보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템은 아닌  같았다.

"이건?"
"그 자리에 팔 한짝이랑 남아있던 도끼야."

팔 한짝이라.
이 다크 판타지에서 있던 생존자의 물건 같은데, 별로 흥미는 동하지 않았다.
근데  단서길래?
내 의아한 표정을 보고 마리암은 더 의아해했다.

"귀공이 야만인 출신이길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쪽도 이래저래 언어가 나뉘나 봐? 이건 야만부족의 양식이야."

아, 그래?
나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마리암은 만족한듯 도끼를 도로 벨트에 걸었다.

"확신을 못하신다고 하시는 걸 보면… 거기에 생존자는 없었나 보군요."
"그래. 팔 한짝만 있었고, 괴물들 배를  갈라봤지만 인간의 형상은 없었어."


그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숙련된 용병 출신인 그녀가 흔적을 놓쳤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내게 의견을 구해왔고, 나는 턱을 짚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뭘 어쩔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일이 맞겠거니 싶었다.

"저희는 저희가 해야할 일을 합시다. 여왕 전하를 불러주세요. 비행형 괴물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도 마련합시다."

마리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향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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