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이방인 (75/274)



〈 75화 〉이방인

마리암과 여왕, 그리고 세레나를 비롯한 중책들간의 회의로 인해 우리는 성벽 곳곳에 소형 공성병기를 설치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이과에 기술자였다면 여기서 연사되는 공성쇠뇌 같은  개발했겠지만, 나한테는 그정도 능력이 없었다.

우리의 기술 혁명은 여왕과 근위대가 가져온 공성병기를 적당히 개조해 설치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마저도  입김이 들어가있진 않았고.
그렇게 성벽 위에는 공성병기가 자리했고, 병사들은 교육을 받은 후에 그 병기를 운용했다. 업무 사이클에도 변동이 있었다.
낮에 움직이는 괴물들, 그것도 비행형 괴물들을 요격하는 업무.
안 그래도 힘들던 3교대에서 일이 늘어나니 병사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그렇게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만이 있더라도 어떻게 드러낼까. 이미 좆된 세상이다. 안전한 성벽에서 살게 해준다는데 그런 불만을 대놓고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평화롭게, 내 개인 소유로 화염 비늘족이 지어준 저택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식단이었지만…  식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씨발."

내가  식단에 불만이 있다는 게 그 문제였다.
물론 맛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익숙해지고 있는 건지 밍밍한 스튜에다가 삶은 계란, 딱딱한 빵 같은  먹는 것도 꽤 참아줄만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그거였다.

"…김치찌개 먹고 싶다."

이것보다는 먹고싶은 게 있다는 거.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잘 끓여서 고기의 지방이 빈틈 없이 국물에 녹아든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부드러운 고기에 국물이 잘 배어든 두부, 감칠맛이 넘치는 김치에  만들어진 쌀밥을 비우고 싶었다.

잘 익은 김치를 쭉 찢어서 고슬고슬하게 잘 지은 밥이랑 같이 먹고.
국물을 부어서 밥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먹고.
국물에 지방이 연해져서 야들야들한 돼지고기를 뜨끈뜨근한 밥에다 얹어서 입에 넣고 호호 불어가면서 삼키고, 물 한  들이키고 싶었지만.

여기는 다크 판타지였다.


김치도, 밥도 없었다.
돼지는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주재료들이 없었으니 어설픈 마이너 카피도 할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메이는 입 안에 가득 들어있는 음식을 씹어삼키고는 물었다.
메이의 식단은 나와 같은 간단한 중세풍 음식들이었다.


"김치찌개가 뭔데?"

중국인인 메이는 김치는 커녕 김치찌개에 대해서도 들어본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들어본 적 있지만 떠올리진 못하던가.
어쨌든, 들어온 질문에도 나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뇌에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단언할  있었다.
나는 지금껏 겪어본 적 없을 정도로 향수병을 앓고 있었다고.
지금 괜히 김치찌개를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한다면 분명히 앓아누울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국뽕이나 향수병이 심한 새끼였던가?
고심해보면 분명 그정도는 아니었다. 애국과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오히려 국까에 가깝지 않던가. 대부분의 젊은 내 또래새끼들이 그러하듯, 사는 게 각박하니 국뽕을 혐오하는 새끼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한국의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건 분명….

이 좆같은 다크 판타지에 짓눌린 시간들이 원인이었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만큼 집이 생각나는 거다.
물론 여기의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나를 신이자 왕 쯔음으로 떠받들고 있었고, 나도 그걸 꽤 좋아했으니.
매일 침대에서 깨어날 때마다 다른 여자가  침대에, 땀과 육욕에 젖은  누워있는 것도 무릇 남자라면 꿈꾸는 주지육림에 걸맞았다.

하지만 여전히 김치찌개는 없었다.
나는 대답을 채근하는 메이에게 대충 대답했다.

"…있어, 맛있는 거."
"여기 음식이야?"

메이는 꾹  수저를 움직여 입에 음식을 퍼넣었고, 나는 그런 메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얘는 참 좋겠다, 속도 편하게 그냥 아무거나  먹으니까.


"아니, 있어. 그런 게."


메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의아해하더니 다시 음식에 집중했고, 나는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마다했다. 내가 마다한 음식은 메이의 앞에 놓여졌다.

"헤헤, 잘 먹을게."

그걸 뭘로 받아들인 건지 메이는 좋다고 음식을 퍼먹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씁쓸하기만 했다.
처음  세계에 왔을 때 좆같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반년을 한참 넘었고, 정확히 세진 않았으나 1년에 가깝다는 사실은 나에게 좆같음과 더불어 막막한 절망감마저 선사했다.

그런데 향수병까지….


물론 하루 빨리 돌아가야만 할만큼 원래 세상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존나 불길했다.
언제 뒈질지모르는 세계, 점점 얼어붙어 가는 세상과 다발하는 괴물들까지.
내가 신을 다 죽이지 않는다면 그런 현상은 점차 심해지기만 하지 덜해지진 않을 거다.


"에휴, 씨발."

메이는 내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봤으나, 나는 그런 메이에게 손을 몇  내젓고는 일어났다.

"전하,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그때 문이 열렸고, 누군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나를 맞이하는 건 겨울의 신부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분명히 샤론의 휘하에 있는 하인이라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얼굴만 겨우 기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나랑 직접적 연관이라고는 전혀, 좆도 없는 사람.


그 하인은 내게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말했다.

"샤론님께서 부르십니다."
"뭔 용건인지는 못 들으셨습니까?"

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딱딱하긴, 씹새끼.

결국 여왕한테 가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식사를 한창 하고 있는 메이에게 손을흔들어주고는 식당을 나섰다.

별 일 아니면 여왕의 인중을 때리리라는생각을 품고서.



*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내  앞에 있는 게 환상이거나,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이상에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거 실화입니까?"
"응? 그림은 없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설명을 포기했고, 샤론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샤론은 오히려 경건한 자세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무슨 신을 대하는 태도 같았다.

"이게 그… 야만인의 가방에서 나왔다고요?"


한 웅큼의 짐짝에는 무기나 음식 같은 게 있었고, 종종 뭔지 용도를  수 없는 물건이나 딱 봐도 일기겠거니 하는 것도 있었지만 내 눈을 잡아끄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가리키는 건, 다른 이들이 염장채소라고 추측한 무언가였는데 이건 무척이나 그리운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건 김치였다.
국물이 없고 배추 엇비슷한 무언가로 만들어진 김치.

좀 국물이 없다는 점에서 아쉽긴 하지만,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다행이었다.
내가 그 김치에 다가가 냄새를 맡자, 고향에대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아, 이 냄새.
푹 익은 신김치의 냄새와 비슷했다.
나는 입 안 가득한 침을 삼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 어딨습니까?"
"치료를 받고 있다. 그… 팔 한쪽이 없는데다 출혈이 많아서…."

죽어간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야만인이 죽기 전에 들어둬야 할 게 있었다.
난 샤론에게 안내를 명령했고, 드물게 나의 단호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나를 안내했다.
왕족의 안내로 도착한 장소는 허름했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 있을 것은 나한테는 금은보화나 다름 없었다.


문을 열자 떫은 회복약의 냄새가 풍겼다.

"…전하께선 여긴 어쩐 일로…."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병자들이나 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0.1겨울의 신부 수준의 연금술사가나에게 당황한 표정을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용건은 그 연금술사 너머에 있었으니.


그래서 나는 팔을 잃고 끙끙 앓고 있는 야만인에게 다가갔다.
야만인은 전형적인 전사처럼 보였다.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굵었고, 키 역시도 나보다 한참은 컸다.

 야만인이 눈을 끔뻑이더니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 시선을 마주봤다.

"■■■…?"
"뭐?"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씨발,  구글 번역기 고장났나? 나는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번역기를 점검했다.
내 당황을 읽었는지 야만인은 더더욱 당황했고, 나는  야만인을 보면서 어떻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언어가 안 통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싶은데, 야만인이 다시 말했다. 수심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젠장, 말도 안 통하면 결국엔…."


어?
이젠 또 번역이 되네?
나는 눈을 크게 떴고, 야만인은  그런 모습을 의구심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어, 다시 말해줄래?"
"뭣? 말할 줄 알았나?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한 건가? 생긴 건 동포인데…."

녀석의 눈에 잠시 의심이 스쳐지나갔으나, 구태여 나에게  의심을 캐묻진 않았다.
것보다 나는 지금의 이상 현상이 뭔지 정확히 규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는 메이의 첫 마디였던 차오니마가 느금마가 아닌 중국어로 들렸었던 일이 떠올랐다.
뭔가 존나 이상하다 싶었는데. 짐작이 좀 갔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만인은 눈을 닫았다.

녀석은 팔이 잘려나간 어깻죽지를 부여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몸에 칭칭 두른 붕대에 피가 살짝 새어나왔다.


"이런 곳에 동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정말 동포가 맞나?"


합당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딴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용건은 해결해야지.


"…보고도 모르겠나? 게다가 아니면 어떻고 맞으면  어떤가? 자네가 내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인데."

내 말이 정곡이었는지 그 야만인은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을 뱉어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한숨을 뱉었다.
씨발, 당황하긴 했는데 어떻게 용건은 꺼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알고 있나 보군."
"이런 세상에서 도움이 필요치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턱밑까지 차오른 조바심을 가까스로 억누르고는 말했다.


"그러니 말해보게.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먼 도시까지 온 건가?"


야만인은 내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좀 망설이는가 싶더니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허심탄회한 얘기는 사실 꽤 지루하기까지 했고, 나는 핵심이 금방 나오지 않아 거인의 힘이 마려웠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꽤 흥미로운 구석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쌀과 유사한 종류의 곡물을 재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용이라고 했나?"
"그래, 용이었지. 내 삶에서 수 없이 많은 괴물을 보았지만 그런 놈은 처음이었다네. 비늘은 옅은 모래색으로 타오르고, 두 눈동자에는 포악함과 욕망 밖에 없었지. 두려운 괴물이었어."


…원래라면 여름의 영토에서 나와야할 용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사막에 서식하고 있어야 할 용이 없다는 사실이 꽤 의아하긴 했지만교단에서 입으로 그런  없다고 해서 대충 게임과의 차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야만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건 분명히 여름의 영토 중간 보스, 사막의 포식자였다.

왜 야만인의 땅에서 지랄 중인지,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는  수 없었지만  가지는 확실했다.

"사악한 용 녀석… 용서할 수 없군."

야만인은 나의 급발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한 보였지만, 지가 어쩔 건데.
나는 굳은 표정으로 야만인의 어깨를 두드렸고, 야만인은 내 손과 내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회복하는대로 안내해주게.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를 자네에게 붙여줄테니."

야만인은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샤론에게 겨울의 신부를 불러달라며 요청했다. 샤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고, 졸지에 환자 하나를 잃은 연금술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지금부터 조지러 갈 용에 대한 적개심과 부족에 대한 애정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었다.
김치와 밥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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