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6화 〉이방인 (76/274)



〈 76화 〉이방인

 우 우 우 웅

야만인, 헤르돈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어깨를 움츠렸다.
한쪽 팔을 잃은 그는 사실 이 여정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동행하는 인물이 무척이나 적고 군세라고  것도 없는 것에 대한 불만에 가까웠다. 이들은 용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돈은 얼마 안 지나 생각이 뒤집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콰 아 아


또 한 번의 폭음.
이번에는 굳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찾을 필요가 없었다. 큼직한 뱀이 고목이 드리운 하늘 사이로 날아갔다.
머리가 없는 걸 보면 정확히 주현성의 주먹이 머리를 쪼개놓은모양이었다.
저렇게 죽어나가는 괴물의 수와 질은 보통이 아니었다.

부족 최고의 전사들로만 꾸려진 병대가 전멸하고 가장 노련한 사냥꾼이었던 헤르돈 혼자 남을 정도로, 숲의 괴물들은 녹록치 않았다.
그런 괴물들이 주현성의 발과 주먹에 곤죽이 되어 흩뿌려지는 풍경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충격적이었다.
한 개인이 품어선 안되는크기의 무력이었다.
헤르돈은 주현성을 보면서 기묘한 무력감마저 느꼈고,  구성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이 모든 인원은  한 명의 남자를 위한 시중에 가까웠다.
편하게 야영을 하고, 여정을 보내기 위한 인원들.
헤르돈은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이끌어 안내했고, 다른 이들은 다시 한 번 멀찍이서 들려오는폭음에서 관심을 껐다. 곧 조용해질테니.

*

일행은 간소했다.
나, 메이, 겨울의 신부에다 정찰대로서의 경험이 풍부한 마리암과 용병 몇명, 안내역의 야만인 헤르돈까지.
처음에는 여왕과 근위대 역시 나를 따라오고자 했으나, 나는 내가 부재중일 때 도시에 병력이 남아있는 게 맞다는 판단 하에 여왕과 근위대장에게 세레나의 보조를 맡겨놨다.


물론 여왕의 허당스러운 일면들을 보자면 확실히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솟고는 했지만 그래도 세레나 역시 그 판단에 동의한 걸 보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했다.
내가정치질하는 거보단 낫겠지.

샤론은 그런 내 제안에 경건한 모습으로 동의했고, 나는 별 탈 없이 도시를 나섰다.


처음에 숲에 들어서고 나서 보이는 괴물들은 상당히 많고, 공격적이었다.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그르르

들려오는 낮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풀속에서 괴물 하나가 몸을 낮춘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지어 으르렁거렸다.
나는 왼쪽 허리춤에 메어진 도끼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뭐 씨발."

끼이잉 깨갱


지금은 저렇게 노려보다가 내가 겁이라도 주면 부리나케 도망가기 일수였다.
처음에는  야생동물이나 괴물의 습성인가 했지만, 마리암은 단순히 나의 무력에 겁을 먹고 도망치는 거라고 했다.
새삼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했다.
내가 이 숲에 불을 지른 전적도 있고, 방금 전에는 시간을 써가면서 보이는 괴물을 줘다줘패서 죽여버리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어느정도 지성을 갖춘 몬스터들은 나에게접근하지 않았다.
나는 끈적거리는 흉갑이나 갑주를 풀어 겨울의 신부에게 건네고는 모닥불로 다가갔다.

기이익 기이이이익

그 모닥불 근처에는 불타오르는 사슬에 묶여진 비행형 괴물이 있었다.
아마 메이의 마법인 모양인지, 메이는 그 바로 옆에서  큼직한 눈으로 괴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섬뜩했다.
괴물의 형상은 지극히 평범했다. 딱히 뒤틀린부분도 없고, 날개나 부리, 눈알에서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즉, 봄의 순례자와는 좆도 관련이 없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야영지를 펴고도 그다지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설령 덤벼드는 간 큰 놈이 있다고 하더라도 메이가 처리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투창이라도 쏘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모닥불 근처 나무 토막에 앉고는 장작을 쥐었다.

푸화아악


내 손에서 일어난 불길이 장작을 태운다. 하지만 뜨겁지 않다. 별 생각도 없이 타오르는 나무토막을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놀랍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들어올리니 붕대를 몸에 두르고 그 위로 거의 몸을 가리지 못하는 가죽 갑옷을 입은 야만인이 내 손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건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워보였다.


"여름의 사제인가?"

그 야만인, 헤르돈이라고 본인을 칭한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일단 도살자의 대전사는 맞으니까 얼추 사제는 맞나?
좀 애매하긴 했지만, 뒈진 신은 말이 없는 법이다. 나는 일단 그렇게 칭하기로 했다.

"그렇지.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대부분 여름의 도살자를 섬기는 이들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야만인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렇군… 여름은 어떻게… 가호를 잘 내려주는가? 어떤 가호를 내려주지?"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 다크 판타지 주민 새끼야.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 사이비가 뽀록이 나버리니 아가리를 닥쳤다.
내 그런 침묵을 어떻게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만인은 잘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보통 우리 초원의 동포들은 여름의 도살자를 신앙하기 마련이니까. 전사신이신 여름의 도살자를 섬기는 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우리 부족은 아니었다."

…그러네, 보통 야만인 하면 으레 떠오르는 전사 이미지에 부합하는 건 여름의 도살자 신앙이다.
그러니 그런 국룰에서 벗어나는 부족이라면 궁금해할만도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하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내 채근을 받아들였는지 야만인이 한팔로 능숙하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돌로 조각한 나뭇잎 비슷한 무언가였다.
헤르돈은 제 품에서 나온  돌나뭇잎을 지긋이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우리 부족은 재앙의 어머니를 신앙했다. 가을의 마녀라고도 불리우시는 분이지."

전사신이 아닌 시련 밖에  주는 썅년을 신앙한다는 건 좀 의외인 이야기였다.
가을의 마녀를 섬겨서 좋을  없을텐데?
물론 걔 권능은 상당히 강력하다. 재앙을 내리고, 디버프를 걸고, 자연현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으니.
하지만 야만인과 야만부족에게 적합한 신앙은 아니었다.
 표정에 그게 드러났는지, 야만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헌데 너의 그 강력함과 권세를 보니… 개종하는 게 나아보이는군."
"가을의 마녀께서 아무것도 하사하지 않은 건가?"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신은 필멸하는 존재긴 하지만 신에 걸맞는 신성과 권능을 쥐고 있다.
그런만큼 자신을 신앙하는 이들에게 가호를 내리기도 하고 이끌기도 한다.
당장에 여름의 도살자만 하더라도 광신도 새끼들 여럿을 사막에 모아놓고 배틀로얄까지 해댔으니.

그러니 가을의 마녀도 뭔가 내렸겠거니 했다. 게임에서도 가을의 마녀의 권능은 얻는 방법이 많은 편이었고.
하지만 야만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재앙의 어머니께서는 그런 분이시라네. 어머니께서는 시련을 내리실 뿐이지. 그걸 이겨내고 성장하는 건 그 자식된 이들의 과업일세."

이겨내고 성장하는 게 그 신앙하는 놈들의 몫이라는 건, 실상 주는  좆도 없지만 어쨌든 시련을 안겨준다는 것처럼 들렸다.
만약에 여기가 다크 판타지가 아닌 지구였다면 다른 신앙들과비슷했겠지만, 여기는 신이 강렬하게 실존하는 판타지 세상이었다.
그런 신이 내리는 시련을 이겨내봤자 좆도 얻는  없다는 건 기이했다.
그냥 하드 난이도로 올리는 거 아닌가?


생각보다 가을의 마녀 신앙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가을의 마녀가 방임주의인데 딱 형편 좋게 빡셌던가.
시련을 내리기만 하고 이겨내도 주는 게 없는 병신일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겠지.


내가 그렇게 침묵하고 있자니, 야만인 헤르돈은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우리부족은 봄으로 신앙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네. 부족장과 원로들께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지."

봄의 순례자는 진짜추천 못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야만인이 말했다.


"영원과 순환, 깨달음의 길을 걷는 구도자들, 그 승려들의 위대함은 자네도 익히 알테지. 심지어 우리 부족에서도 그런 봄의 승려들을 보고 신앙하는 신도들이 나오기도 했었다네. 그리고 그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의 한계를 넘어 위대함을 거머쥐었지."


야만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모닥불을 내려다보았다.
튀는 불티 사이로 야만인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생각보다 봄의 신앙 자체는 존나 멀쩡한 모양이었다.
그 신앙의 주체가 씹새끼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하는걸 보자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봄의 순례자 신앙으로 개종은 안된 모양이었다.


"그럼 왜 안 그랬나?"


야만인은 조금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승려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지, 동포여."


봄의 승려들이 뭔지,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전혀,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무언가였으니까.
생소한 용어지만 널리 퍼진 무언가인 것 같아서 아가리를 닥치고 있자니, 야만인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자네에게  수 있는 게 없다네.  부족들 역시 그렇고. 하지만 자네는 여름의 충실한 신자겠지? 만약 자네가 우리를 도와 우리를 구해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네가 섬기는 여름의 종복이 되겠네."

헤르돈은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깃든 건 미약한 희망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좀 납득이 됐다.
안전한 성벽과 병력,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고대의 도시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국가는 이미  가치를 잃은지 오래였고, 집단은 개인이 된지 한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 천막으로 들어가는 야만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일도 길을 서두르려면 자야했다. 말을 마리암이랑 같이 타고 가니 실상 나는 좀 노닥거려도 되겠지만, 졸다가 낙마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천막의 가림막을 걷어내며 안으로 들어섰고, 약간 칙칙한 공기 속에서 보이는 두 명의 여자를 확인했다. 천막틈에서 새어들어오는 모닥불의 불빛이 긴 음영을 만들어냈다.  음영 끄트머리에 그 두 명이 나란히 서있었다.

"…겨울님? 마리암씨?"


겨울의 신부가 여기에 있는 건 좀 납득이 가는데, 넌 여기 왜 있냐?
내가 그런 표정으로 마리암을 바라보자, 마리암이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기름 램프의 불빛을 받아 윤기가 흘렀다.
숨이 묘하게 뜨거웠다.
마치 흥분한 것 같았다.


"귀공의 밤놀이에 나도 끼워줬으면 해서."


네?
나는 겨울의 신부에게 고개를 돌렸고, 겨울의 신부는 청아하게 웃었다.

"저는 동의했어요."

아, 진짜?
물론 내가 마다할리는 없었지만, 이건 천막인데?
소리 존나 새어나갈 건데?
게다가 한  더 끼우면 네가  시간도 줄어드는 건데?
복잡한 심경으로 겨울의 신부를 바라보자, 마리암은 그런 내 얼굴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굳은살이 남아있는 손이 내 뺨을 스치더니 뒷목에 얹어졌다.




마리암은 그대로  목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맞췄다. 옅은 구릿빛을 띄는 입술이 입술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는 그 입맞춤을 남기고서 배시시 웃었다.


"소리라면 걱정하지 마, 귀공의 밤놀이에 대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까."

마리암은 나를 이끌어 천막에 깔려있는 이부자리에 내 몸을 뉘였고, 나는 미묘하게 딱딱한 바닥을 신경 쓰면서도 내 위에 걸터앉은 마리암을 바라보았다.

"순례는 어쩌고요? 그러는 동안엔…."
"아, 뭐 어때. 순례보다는 귀공이 중요하지."

그녀의 뜨거운 손가락이 천천히 내 몸을 타고 올랐고, 내 웃옷을 풀어놨다.

"게다가, 귀공도 꽤 기대한  같은데?"


마리암은 고혹적으로 웃었고, 나는 외통수임을 직감했다.
당해줄 수 밖에 없는 외통수였다.
나는 내 위에서 천천히 옷을 벗어재끼기 시작하는 마리암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