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이방인 (78/274)



〈 78화 〉이방인

"…정말 이것 뿐이오?"
"미안하게 됐군."


부족장 켈론은 자신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전사를 꾸짖지 않았다.
저 전사에게는 가족이 많다. 고작 이정도 식량으로는 아픈 어머니나 앓아누운 아내를 먹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켈론은 식량을 더 쥐어줄 수 없었다. 저 전사 뿐만이 아닌, 이 부족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픈 가족과 앓아누운 자식이나 아내가 있었으니.
그래서 전사는 그런 눈초리를 보내오기만  뿐,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
다만 등을 돌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망을 제 신에게 토로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처음에는 세상이 무너져간다는  자각하고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것에 불과했다.그 유적에 있는 물건들이라면  부족을 충분히 몰려오는 종말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족장 켈론은 착잡한 마음으로 지금의 참사를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드래곤."


원로의 대부분이 그 드래곤에게 삼켜지기 전, 그들은 그 용이 여름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가 쫓겨난 불쌍한 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족장인 켈론은 그 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에 선선히 동의했다. 식량은 많았고, 그들이점거한 농지는 상당히 넓었으니.
용 하나 쯤 먹여살리는데 문제는 없었다.
시련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시련들을 이겨내려거든 길들인 용 정도는있어서 나쁠  없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재앙의 어머니께서는 그들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드래곤의 식성은 잡식이었다.
동식물을 가리지 않았고, 그 드래곤에게 있어서 인간은 다소 씹어먹기 힘든 식사에 불과했다.
그들이 살던 농토는 빼앗겼고, 가족을 잃었다. 존엄성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 초원이 드넓은 덕이었다.


갖고 온 식량 줄 일부를 쪼개어 배급을 완료하고서 부족장은 남은 식량의 수를 추렸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연명할 수 있을런지.
눈을 질끈 감자 살아남은 원로들이 그를 위로했다. 정작 위로가 필요한 건 자신들이면서도.


"켈론, 나와보게!"


그때 누군가 천막의 차양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무례에 대해 원로들은 꼬집지 않았다.
그러려고 했으나 그 표정이 무척이나 다급했기 때문이었고, 그 정찰병이 미리 드래곤을 보고 움직여준 덕분에 몇 번이나 위기를 피한 탓도 컸다.
그래서 원로들은 꿍얼거리며 짐을 챙겨들었고, 정찰병들은 그들에게 눈을 잠시 돌렸다가 다시 족장에게말을 걸었다.

"뭔가… 뭔가 오고 있다네!"

두루뭉술한 보고였다.
드래곤이라면 드래곤, 괴물들이라면 괴물들, 탈영병들이라면 탈영병이라고 할텐데, 뭔가 온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켈론은 불편한 심기를 제 오랜 친구인 정찰병에게 드러냈고, 정찰병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일축하고는 그에게 손짓했다.

"직접 보게, 나도 도통 뭔지…."


결국 켈론은 몸을 일으켰다. 선이 굵고 키가  부족장이 일어나자 원로들은 천막이 좁아진 것처럼 느꼈다.


"자네가 일러주는 거니 중요한 일이겠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해주면 좋겠군."


정찰병은 그런 켈론의 불만에도 별 말을 하지 못했다. 직접 보면 알게 될 거라는 일념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켈론은 천막들을 가로질러, 대충 세워둔 목책 한 켠에 있는 망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어머니시여…."

켈론은 오래 섬긴 신을 불렀고, 그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후끈한 열기가 그에게 닿았다. 그는 후덥지근한 공기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타오르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올라탄, 기사.
전신에 두른 검붉은색 판금 갑주는 빛을 먹어치우는지 둔탁하게 빛났고, 흩날리는 망토는 열풍과 초원을 타고 흐르는 남풍에 따라 흩날렸다.


 기사의 손은 비어있었으나,  허리춤에는  눈에 보기에도 특별하다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기가 메어져 있었다.
화려한 도끼와 독특한 칼자루를 지닌 장검.
그리고 등에 걸쳐진, 휘두르긴 커녕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들어보이는 거검.


기사를  번도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봐온 왕국의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우선 불타오르는 말에 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켈론은 숨을 들이켰고, 정찰병은 봤냐는 듯 우쭐한 표정을 보냈다.

"적인가?"
"그런  같진 않네. 저기에 꽤 오래 서있더군."


정찰이라면 돌아갔을테고, 적이라면 공격해왔을 거다.  목책은 방어의 목적도 거의 띄지 못한다.
심지어 부족민들은 당황과 경계를 섞어 그 전사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켈론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우선 대화를 해봐야겠군."

그의 결단에, 정찰병은 제 오랜 친구이자 부족장인 남자를 측은하게 바라보았고, 켈론은 침을 삼키면서 목책을 뛰어넘었다.

*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화염마를 타고 나타난 건 옳은 판단이었다.
부족민들은 나를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에 화염마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공포와 경외 섞인 눈초리를받고 있었다.


그렇게 선사한 위압감 덕에 으레 이런 협소한 사회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배척질이 없었고, 나는 내 집처럼 부족장의 천막 안에 앉았다. 메이는  바로 옆에 앉아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뭔지 모를 건량을 씹어삼켰다.

"버섯 같아."
"말린 버섯이다. 동포의 여식이여."
"그렇구나… 맛있어요."
"그거 고맙군."

부족장은 켈론이라고 하는 이름이었는데, 성은 없다고 했다. 얼추 누구누구의 자식 켈론 같은 이름이었던 것만 기억했다.
역시나 게임에서는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안내를 받아서 왔다고."
"그렇다네, 동포여. 비록 부족은 다를지라도 동향의 동포들이 고통받는데 어찌 왕된 몸으로서 안 와볼 수가 있겠나."

부족장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고, 나는 사이비로 단련된 아가리를놀렸다.
솔직히 거의 2달 가깝게 아가리를 털고 다니다보니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군…."


음, 안 먹히네.
나는 부족장이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나를 부쩍 경계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네. 설령 자네가 진짜로 용을 쫓아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걱정이 되는군. 자네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으니."


오, 신중해.
지금껏  다크 판타지에서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만 보다보니, 상식적인 반응을내보이는  부족장의 태도가 신선했다.

"우린 무기는 커녕 식량조차  떨어져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들다네. 병자들에게만 겨우 몫이 돌아가는 탓에 전사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부족장 켈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깐, 씨발 뭐라고?

"…식량이 없다고 했나?"
"그래, 자네의 여식이 먹고 있는 그 건량이 몇 개 있는 정도가 전부라네."


메이를  딸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건 별로 상관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있었으니.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족장에게, 나는 희망을 애써 붙잡으면서 말했다.

"그… 절인 채소 같은 거나… 물에 찌면 부풀어 오르는 하얀 알갱이는…."


부족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치랑 밥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올리면서 표정을 억지로 관리했다.


"…드래곤이 점거하고 있는 우리의 옛 땅이라면 좀 남아있겠지만…."

족장은 중언부언으로 해명했는데, 드래곤의 습격이 워낙 빨랐던 탓에 빠르게 벗어나느라 식량을 챙길 여유도 없다고 했다.
그거… 그거 존나 씹창인데.
그거 두 개만 보고  야만인의 땅인데, 정작 중요한 김치랑 밥이 없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얼굴을 쓸었고, 부족장의 단단한 얼굴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뭐 씨발아.

"자네는 정말 따스한 사람이군. 자기 일처럼 침통해 하다니…."

그런  아닌데 씨발 주걱턱 새끼야.
라는 말을 뱉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김치는 오래 놔둬도 썩지 않고 쌀도 보관 상태만 좋다면 아직은 멀쩡할 거다.
즉, 내가 드래곤을 해치우고 쟤네를 원래 땅에 데려가면 김치와 쌀을 건질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드래곤을 해치운다면, 자네들의 식량 사정은 해결되는 건가?"


족장 켈론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욱신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메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린 버섯을 먹어치웠다.


"그럼 우리가 그 드래곤을 해치워주겠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자네들의 개종과 합류일세."

부족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눈을 마주보면서 김치와 밥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눈동자에 깃든 열의를 보고도 아니라고 수 있을리가 있겠나. 자네가 그렇게 해준다면 우리는  말 없이 자네를 따르겠네."

부족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밖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자 안으로 몇 명의 전사가 몸을 들였다. 차양에 걸친 그들의 근육에서는 땀내가 났다.

"그 짐승은 지능적으로 우리를 습격하고 있다네. 우리의 본영을 공격하는 게 아닌, 정찰대와 전사들의 소규모 집단을 노리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 저들이 자네에게  드래곤의 행적을 알려줄걸세."


용의 지능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거의 유사 인간 수준은 되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니.
그래서 나는 별 토를 달지 않고 몸을 일으켰고, 메이는  뒤를 따라왔다. 입에 말린 버섯을 문 채로.

그들은 간단히 자신들을소개했고, 나는 정신적으로 스킵했다. 그래서 이름은 외우지 못했다.
안내에 따라 천막들을 가로지르고, 내가 화염마를 타고 나타났던 숲을 오른쪽에 끼고 쭉 걸었다.
점점 완만한 구릉이나 멀찍이서 산맥이 보일 쯔음에, 나는 우리의좌측으로 나타난 유적 같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뭔가?"


전사들은 그 유적을 흥미 없는 눈으로 흘깃 보고는 내게 눈초리를 보냈다.  눈동자에 담긴 건 대충 보자면, '외지인이 너무 뭔가를 알아내려고 해서 화가 난 느낌'에 가까웠다.


근데 뭐 어쩔 건데 씹창 새끼들아.
김치도 없으면서 씨발.


내가 마주 꼬라보니, 그들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대답했다.


"아주 예전에 이 땅을 점거하던 이들이 지은 유적이다. 선조대부터 있었으니 얼마나 오래 됐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저기에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흘깃 보는데,  반응을 노골적으로 살피는 기색이 강했다.
뭔가 미심쩍었다.
씹새끼들 갑자기 내 뒤통수 후려까는 거 아냐?

나는 투구를 뒤집어 썼고,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그들은 묵묵히 안내를 계속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박살난 수레나 핏자국 같은 게 널려있는 공터였다.


흠터레스팅.
수레는 비어있었고,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존나 기묘했다. 걍 아무것도  싣고 수레를  바에는 안 가지고 가는 게 나을텐데.
심지어 수레의 밑에서 부스러진 흙의 방향으로 봤을 때, 아까의  던전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뭘 나르던 수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봐도 던전에서 무언가를 건져나오던 것 같은데, 전사들은 시치미를 떼며 아가리를 닫았다.
이 씨발놈들이 도와주려는 착한 새끼를 속여먹으려 드네? 거인의 힘 마렵게.


내가 화를 내려고 혀를 차고 어깨를 푸는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친숙한 소리였다.


  라 라 라 라 라 라


"…오."

드래곤이 빡대가리인 모양이다.
같은 곳은 두 습격 안 하는 게 국룰이건만.
나는 여유롭게 몸을 풀었고, 전사들은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그리고 개중에는 조금 입이 가벼운 전사가 있었다.


"…그럴 수가… 이번에는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렇게 억누른 비명을 지른 전사에게 다른 이들이 눈초리를 보냈고, 나는 그걸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새끼들 봐라?


나는 한창 당황하고 두려워 하는 쫄보 새끼들에게 다가갔다.


"다음에도숨기면 그 발목을 전부 뜯어버리겠네. 알아듣겠나?"


전사들은 내 험악한 말에 인상을 찌푸리려다가.

크 롸 라 라  라 라!!!!


용이 보이기 시작하자 얼어붙었다.
그들은 결국  협박에 동의하고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나는  쫄보들을 눈으로 일별하고 메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떡할 거야?"

메이는 어느새 적조를 뽑아들고는 방패를 고쳐멨다.
그런 그녀와 나를 향해서 용이 날아들고 있었다.
거대한 몸체는 돋아난 수십개의 뿔로 장식되어 있었고, 몸체는 사막의 모래 같은 칙칙한 황금색이었다.
나는  용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내 전신을 타고 거력이 흘러내렸다. 내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고, 나는 갑옷을 으깨버릴  치솟아오르는 근력을 억지로 다스렸다.

"조져야지."

메이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앞으로 뻗었고, 나는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을끌어내렸다.

크롸라라라라라!!!!!!


그리고 드래곤이 우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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