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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이방인 (80/274)



〈 80화 〉이방인

"유적을?"


마리암은 유적을 간다는 사실 자체도 처음 듣지만, 여기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운지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다. 무슨 형태의 유적인지, 어느 문화권의 유적인지는 알고 있냐던지.
물론 내가 알고 있을리는 없으니 그냥 아주 예전부터 여기에 있었다는 유적이라는 사실만을 말해줬다.
마리암은 아쉬워하더니 유적에 대한 정열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당한 유적 매니아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걍 거기서 나오는 유물 같은 거에 관심이 있던가.
내가 그 점을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우리 용병단은 예전에는 유적 탐사를 하거나 그런 탐사대를 호위하고, 보조하는 역할로 돈을 두둑히 챙기고는 했었거든."


오, 그건 의외였다.
보통 용병이라고 하면 전장에 나가거나 영지전 같은데에서 활약하는 게 국룰인 줄 알았는데,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계관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 역할이 상당히 독특했다.
그래서 용병단 전원이 근거리 무기와 장거리 무기를 하나씩 갖고 있나?

아무튼, 유적 탐사에 '모험은 커녕 PvP만 해본 병신'과 '뉴비 핵쟁이 출신 빡대가리'만을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좀 불안했는데 이렇다면 안심이었다.
아무리 좆된 다크 판타지 세상이라지만 경력자 우대는 기본이었다.

"겨울씨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언니 말이야? 으음, 글쎄. 귀공의 선택이 가장 우선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는 이해타산을 따지는지 속눈썹을 달싹이며 눈을 감고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안 데려가는 게 좋을 거야. 그 언니의 인지 능력과 근력이 초월적이라고는 하지만, 눈이 안 보인다는 건 상당히 불편하니까. 게다가 그 언니의 전투 능력도 별로 없잖아?"


하기야, 근력은 개쩌는데 손이 부드럽고 몸도 부드러워 떡감이 훌륭한 걸 보면 전투 경험은 커녕 기술이라고는 좆도 없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마리암의 말에 동의하고는 겨울의 신부에게 그렇게고했다.
그녀는 베일 속에서 불만스러운지 침묵했지만, 뒤따라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오히려 조심하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겨울의 배웅을 받으면서, 우리는 부족의 야영지 앞에 모였다.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약간의 건량과 야영 도구, 무장.
도구 같은  부족 측에서 준다고 했으니 그거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준비를 끝내고, 즉시 잘 닦인 초원 위의 길을 가로질러 유적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유적을 찾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없었을텐데,  근처 지반이 불안정하게 며칠간 흔들린 뒤에 갑작스럽게 나타났지. 아마 지하에 묻혀있었던 게 어떤 계기로 튀어나온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부족장은 드래곤의 소행일지 모른다고 짐작했고, 나는 좆도 아는 게 없어서 그럴 듯 하다고 대꾸했다.
저 유적,  기억에 전혀 없었다.
게임에 존재하더라도 숨겨진, 클리어에 영향을 주지 않는 던전일테고. 1회차만 해본 진성 PvP충에게는 생소한 던전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게, 저 유적은 높은 확률로 게임에도 존재하지 않는 던전일 것이었다.
애초에 이 부족이 자리한 초원부터가 게임에서는 다루지 않는 지역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드래곤이 출몰한 시기가 마침 저 유적이 나타난 시기랑 겹친다."
"오호, 그거 재밌는데."


 그럴 듯 했다.
드래곤, '사막의 포식자'는 독특하게도 땅을 잘 파는 능력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괴물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설정을 대부분 스킵한 나는모를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새끼가 땅을  판다는 사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땅을 파서 공격하는 패턴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막의 포식자의 등장과 지하에 있었을 유적의 출현이 겹치는 것, 땅을  판다는 특성이 합치됐을  상당히 그럴 듯한 그림이 나왔다.

아마 부족장의 추측은 정확할 것이었다. 그 유적 안에 뭐가 있길래 정신이 반 쯤 나간 드래곤이 탐을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한 유적은 피라미드 형태에 가까웠다. 위로 갈 수록 좁아지는 삼각형이었다.

입구에 널려있는 돌 인형들을 보면서나는 부족장을 돌아봤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냐?"
"모른다. 우린 건지는 자잘한 유물들을 팔아넘기기 바빴으니, 심층까지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흠, 그렇단 말이지.
나는 마리암을 바라봤고, 마리암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부하  명도 무표정이었다.

"그럼 돌아가서 부족을 지켜라. 우리가 나오면 바로 용을 잡을테니, 그때까지는 용한테서 몸을 숨겨야 할 거다. 놈이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부족이 위험할 수도 있어."


부족장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듯 했지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접이식 테이블이 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부족장이 전사들을 데리고 돌아가자, 나는 일행들을 이끌고 유적에 다가섰다.
입구로 다가서서, 일행들에게 고갯짓하고는 문에 손을 얹었다.


"가봅시다."


드   득


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적의문이 열렸다. 양 옆으로 열린 바위문은 묵묵한 검초록색으로 빛났고, 나는  칙칙한 색상에 잘 어울리는 어둠을 내다보면서 혀를 찼다.
끌어내린 도끼에서 화염이 뿜어지자 주변에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확실히 너무 깨끗했다. 유물 하나도 남기지 않을 심산으로 털어갔는지, 긴 복도 곳곳에 있는 선반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마리암과 그 부하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주변을 훑어보면서 화염석에 무기를 긁어 불을 피웠다.


이 던전이 어떤 구조인지 알지 못하니 경력자인 마리암과 그녀의 부하들이 앞으로 나서는 맞았다.
확실히 그 기대에 맞게도, 그들은 벽을 훑어보거나 천장을 확인하고, 바닥을 무기로 두드리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뻗은 유적의 구조는 지극히 심플했다. 석벽은 군데군데 검초록색 금속이 섞여있었고, 금속이 섞인 곳마다 뭔가 놓여져 있었던 흔적이있었다.


"흐응… 고대인들의 유적이네."


나와 메이는  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고, 숙련된 가이드 마리암은 그런 소견을 뱉어냈다.
물론  좆도 아는  없어서 아가리를 닥쳤고, 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암은 내가 호응해주지 않으니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함정도 많고, 침입자 대비용 병력도 많을 거라는 얘기야."
"아하."

난이도가 빡세다는 뜻이었군.
그녀는 그제서야 웃었다.


"해체도 오래 걸리니까, 최대한 피해서 가는 수 밖에 없어. 길이 없다면 해체하면서가겠지만."
"…흠, 그럼 제가 앞장설까요?"


마리암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고, 정찰병 둘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대전사를 앞세운다는 거에서 좀 에바라고 생각한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안된다고 했겠지만, 귀공이 그런다니까 안될 것도 없어보이기도 하고… 적어도 나랑 같이 걷자. 내가 미리 함정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아봐줄테니까."

마리암의 제안에 따라, 최전열에 나와 마리암이 서고 그 뒤에 메이와 정찰병 둘이 나란히 서서 걸었다.
유적은 그래도 될만큼 커다란 복도를 가지고 있었다.


"깨끗하게 싹 털어갔네요, 누님."
"그러게. 얼마 안됐다더니, 엄청 궁했나봐."

정찰병과 마리암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좆도 몰라서 그냥 마리암의 말에 맞장구나 치면서 어둑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복도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고, 완만한 경사로 비스듬하게 올라가는가 싶더니 커다란 방으로 이어졌다.


그 커다란 방은 벽이 적녹빛을 띄고 있었는데, 그 적녹빛의 석벽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면 무너진 통로 하나와 철장으로 가로막힌 통로가 있었다.

"…막혀있네요."
"걱정마, 귀공. 고대인들의 유적은 원래이러니까. 칼, 네모이! 해체해."
"알겠습니다, 누님."

쟤네 이름이 그거였구나. 얼굴은   봤지만 대화한 적은 없었던 정찰병 둘이 철장으로 다가가 이음매나 구조를 살피는 동안 나는 주변을 살펴봤다.

"뭔가 많네요."
"그치, 아마 거주구역이거나 경비구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적인데 거주구랑 경비구는 왜 있어.
하지만 다크 판타지다. 안될 건 없어보이기도 했다. 대신 나는 벽에 빼곡한 상형문자 같은 글자와 그림을 바라봤다.
검은색 남자가 흰 피부의 남자를 죽이는 그림, 또 예의 그 검은 남자가 흰 남자들이 둘러싼 왕좌에 앉아있는 그림 같은 게 있었다.
역인종차별은  아닌 거 같은데.

[고대어를 처음 확인하여, 고대어 해석을 시작합니다.]

네?
내가 글자를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기계음이 들리더니, 상형문자의 글자가 꾸물거리더니 모양이 바뀌었다.
글자는 한글이 되었다. 내가 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뇌내 구글 번역기가 이런 상형문자에도 먹히는지는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 적혀있는 문자를 읽어보면 앞으로의 탐사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숙여 그 글자들을 읽어내렸다.

….
…….


"…병신인가?"

그리고 나는 그렇게 허리를 숙여서 읽어내릴 가치도 없는 글들임을 실감했다.
거의 수준으로만 치자면 인터넷 커뮤니티 뻘글 정도에 가까웠다. 오늘은 밥이 맛없어서 PX에 가서 뭘 사먹었다느니 하는 수준에 가까운 글귀들이었다.

이 병신들은 뻘글을 유적 벽에다 새겨놓나?
나는 흥미가 죽어 글들을 대충 읽어내렸고, 마침내 검은색 남자가 그려진 그림에 적혀있는 글을 보고는 멈췄다.

'오늘은 내 친구 아린이 업무를 나몰라라 하고 내버린 채로 도망가 왕께서 놈을 친히 처형하셨다. 왕께서 두르신 검은 갑주는 놈의 피로 붉게 빛났고, 나는 두려워 억지로 철야하며 업무를 해야했다. 언젠가는 때려치우고 도망가야지. 안 들키게….'


그리고 그려져있는 그림은, 검은색 남자가 주먹으로 흰 남자의 가슴을 뚫어죽이는 그림이었다.
…고대인들도 탈주는 하는구나. 괜히 그 왕이라고 불린 검은 갑주를두른 남자에게 동정심과 동질감이 들었다.
점장으로 오래 일했던 나도 탈주 알바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쳐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고는 했으니.


물론 이 병신들이 롤링페이퍼를 유적벽에 써재껴 놓은 건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덕에 나는 귀중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정보를 정리하고 있으니 마리암이 내게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고대어와 그림… 침입자에게 경고하고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는 뜻일까? 귀공은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고대인들이 병신이라 탈주했다가 걸려서 뒈졌다는 말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순수한 흥미와 호기심, 즐거움으로 젖어있었으니.
내 사막누나가 유적 씹덕이라니.
허탈하게 웃으니 그녀는 내 웃음을 잘못 읽었는지 행복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아마 유적 데이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어쨌든, 저 심층에 있을 유적의 보스는 검은 갑주를 두른 육체파일 거라는 정보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육체적 능력으로는, 나는  세계에서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다.
약간 빡셀까봐 걱정했는데 이러면 문제도 없었다.


마리암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고.


"누님! 열렸습니다!"
"…쳇."


들려온 목소리에 마리암이 아쉬워 하면서 얼굴을 치웠다.
나도 좀 아쉽긴 했지만, 마리암은 순순히 포기하고는 막혀있던 철장으로 다가갔다. 철장은 완전히 열려  복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도 게이머, 모험은 싫어하지 않는다. 특히 이런 아예 새로운 지역이라면.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마리암의 앞으로 나섰고, 열린 철장을 가로질러 어둑한 복도에 발을 딛었다. 내 손에 든 화염 도끼가 주변을 밝혔다. 뒤를 돌아보면서 일행들에게 말하려는 찰나.

"제가 앞장서겠―"


덜컥.


"응?"


조금  앞으로 나서자마자, 딛고 있던 왼쪽 발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쑥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린 순간.

콰앙!


"…씨발."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와 내 머리 옆에 꽂혔다.
만약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헤드샷이었겠다 싶은 속도로.
씨발, 조금 지릴 뻔했다.


나는 시선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찰병들이나 마리암, 메이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머쓱하게 화살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


 쪽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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