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이방인
철컥!
마리암이 몇 군데 건드려 찾아낸 회로 엇비슷한 무언가를 절단하니, 함정은 제 속을 게워내더니 작동을 정지했다.
몸을 일으키는 마리암은 평소와는 달리 사슬갑주에 브리건딘이라고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녀도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런 방비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순조롭게 함정을 처리하고 나를 불렀다.
함정이 제거되면 그녀를 바로 뒤에 끼고서 내가 맨앞에 선다. 나는 함정에 대응할 수 있을테니까.
적이 나오면 내가 최전열에서 상대하고, 함정이 나오면 마리암이 처리하면서 주변을 경계한다.
이런 섬세하고도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우리는 순조롭게 탐색을 계속하고 있었고, 마리암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귀공이 있으니까 편하네."
"그래요?"
"응, 보통 이쯤 들어왔으면 횃불 걱정을 해야하거든."
아, 하긴.
게임이랑은 다르게 이 세계에서 횃불은 한 번 키면 영원히 유지되는 무언가가 아니긴 했다.
그러니 횃불을 어느 정도 여분을 가지고 다녀야 했고, 그런만큼 짐짝이 늘어났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그냥 무기에 화염 부여를 쓰던가, 아니면 여름의 도살자가 쓰던 도끼를 뽑아들기만 하면 된다.
아니면 둘 다 하던가.
나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높이 든 채로 도끼를 앞으로 내밀었다.
"감사하십시오, 휴먼."
"응? 아, 물론 감사하고 있지."
마리암은 눈을 접어 웃었고, 나는 실 없는 농담을 한 죗값을 그녀의 순수한 눈빛으로 받아냈다.
젠장, 드립이 안 먹히네. 내가 낙담하거나 말거나, 마리암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유적을 얼마만에 와보는 건지… 이정도 유적이면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유적을 탐사하니 즐겁네."
마리암은 진성 유적 씹덕이었다.
한 거라고는 나타나는 기계 인형 같은 걸 내가 때려부수고, 마리암이 함정을 해제하는 것 밖에 없었는데.
혹시 나랑 있어서 즐거운 거 아닌가, 하기에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도 달랐다.
"이 유적, 드래곤이 파낸 거 같다는 얘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흐음… 드래곤이 그랬다는 게좀의아하긴 한데, 안될 건 없지. 드래곤은 탐욕스러운 짐승이니까."
그녀는 몸서리쳤고, 나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살피면서 어둑한 복도를 묵묵히 보았다.
"이렇게 잘 보존된 유적은 흔치 않으니까, 실질적인 가치는 떨어지더라도 학술적 가치가 높아. 드래곤에게만 특수한 가치를 갖는 유물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긴 해."
흠, 그렇군.
유적 씹덕의 설명이니 선선히 납득했다.
다만 좀 의구심이 드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유물을 노리고 파낸 게 맞다면 드래곤 새끼가 어떻게 이 안에 있는 유물을 알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존나 의아했다.
뭐 투시 능력이라도 있나?
"왜 그래?"
마리암은 내 그런 의구심을 다르게 읽었는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차, 너무 생각이 길었나.
여자들은 취미나 관심사에 흥미를 가져주는 걸 좋아하니까, 반대로 보자면 관심사나 흥미를 부정하면 좆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둘러댈 말을 생각했다.
"마리암씨가 이런 걸 좋아하는 줄 몰랐거든요."
"나라도 좋아하는 건 있지. 싸우는 것도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원래 왕국에서 유적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거든."
그건 듣지도 못했던 얘기라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는눈웃음을 지었다. 요염한 미소였다.
근데 왜 유적 전공의 학생이 용병일을 하게 됐지?
나는 그 의구심을 드러냈다.
"근데 어쩌다 용병이 되셨대요."
"…글쎄?"
마리암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되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내 팔목을 붙들어 걸음을 막았다.
"함정이야."
"아, 예."
"내가 처리할테니까 뒤에 가서 내 부하들 상태 좀 봐줄래? 원래 이렇게 조용한 녀석들이 아니라 걱정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배낭에서 몇 가지도구를 꺼내고는 작업을 시작했다. 들려지는 타일이나 벽을 파고드는 끌을 보면서 나는 뒤로 걸음을 물렸고, 곧 메이와 정찰병 두 명에게 합류했다.
뭐였더라 이름이, 네모이랑 칼이었나? 그들은 형제인지 외모가 엇비슷했다.
그들은 내가 다가오니 먼저 말을 건넸다.
"대전사님께서는 어떻게 좀, 할만하십니까?"
정찰병들은 멀쩡해보였다. 오히려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오는 걸 보자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박하게 보이는 두 정찰병은 씩 웃었다.
"당신들은 좀 어떠십니까?"
"아, 저희야 이런 일은 전문이라 괜찮습니다."
"암요. 오히려 불편할라고 해도 여기 계신 종자분께서 잘 도와주셔서 말이죠."
메이는 보란듯이 가슴을 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와, 존나 커. 나는 슬그머니 내려가려는 손을 끌어올려 메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그럼 전문가의 식견으로 봤을 때 얼마나 걸릴 것같습니까?"
내가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니,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고는 잠시간 숙고했다. 경쾌하게 생긴 두 남자는 내 질문에 결국 품에서 종이조각을 꺼내 뭔가를그리면서 계산했다.
계산식이 있어? 존나 전문적이네.
"방 두 어개 쯤 지나면 심층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 나리?"
"대전사면 족합니다."
두 형제는 씩 웃었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메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손을 떼냈다.
"저희 누님이랑 잘 지내시니, 저희도 기왕이면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거 대전사님은 생각보다 낯을 가리시는 분이시군요?"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저희 누님 좀 잘 부탁합니다. 감성적인 사람이라 대전사님을 꽤 깊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요. 제가 대전사님 관련으로, 진지한 인생 계획도 몇 줄 있을 겁니다."
두 형제가 한 마디씩 늘어놓는 걸 들으며, 나는 괜히 뒤를 슬쩍 돌아봤다. 마리암은 집중하고 있는 탓에 못들은 모양이었다.
아, 좀 깊게 생각하긴 하겠지. 서로 깊은 육체적 대화를 나눴는데.
내가 시선을 그들에게 되돌리니, 그들은 짖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님이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몰랐던지라 좀 충격이긴 했죠. 그래도 뭐… 불만은 없습니다. 다른 쭉정이랑은 다르게 대전사님은 믿고 맡길만 하니까요."
나는 그 말에 얼어붙었다. 두 정찰병 형제는 내 반응을 보더니 씩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못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대전사님도 순진하시구만."
…하긴, 그렇게 얇은 천막인데. 안 새어나가면 그게 이상한 거지.
혹시나 해서 메이를 돌아봤는데, 메이는 멍청한 얼굴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뭐가요? 나도 알려줘요."
"어린이는 알면 안됩니다, 종자님."
"씨, 나 어린이 아닌데."
메이는 결국 형제들이 아닌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 뭐라고 둘러댄다.
나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카드 게임 했거든. 잘하더라고."
두 형제는 웃음을 참느라 진을 뺐고, 메이는 그럼 다음에는 자기도 끼워달라며 찡찡거렸다.
그걸 어떻게 끼워줘.
찡찡대는 메이를 뒤로 하고 다시 마리암에게 다가가니, 마리암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는 나를 봤다.
"해체했어. 근데 앞에 뭐가 있는 거 같네? 귀공이 해결해줘."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네요."
내가 농을 던지면서 도끼를 뽑아들자, 마리암이 몸을 일으키며 쇠뇌를 꺼내들었다.
*
원래 이런 던전이나 유적 같은 곳은 국룰적으로 침입자 대비용 병력이 있기 마련이다.
언데드든, 기계든 뭐든 간에.
다른 게임 뿐만이 아니라, 칼라미티 사가에서도 그랬다. 그래봤자 나오는 그 게임에서 나오는 던전은 세 개가 전부였지만.
그래서 적이 나오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잘 인지하고 있었고, 칼과 네모이, 마리암은 전문가니까 뭐가 나올지도 알고 있었다.
메이만 좆도 몰랐다.
콰득!
내가 휘두른 도끼가 직각으로 떨어져, 기계 인형의 골통을 쪼개놓았다.
나는 금속이 지글거리면서 도끼날에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팔목을 움직여 도끼를 깊숙히 꽂아넣었고, 인형이 완전히 멈춘 후에야 들어올렸다.
투콱, 콱!
"어우, 씨발. 살벌해라."
농담을 던질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저거 위력이 만만찮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끼에 매달려있는 기계 인형을 방패로 삼아 다가갔다. 쉴새 없이 조그마한 볼트를 쏴대던 놈에게 다가가자 놈은 기계음을 내며 물러서려고 했다.
쏘던 무기가 거둬지자마자, 나는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레이톰의 심판을 타고 흐르던 회색의 마력이, 매달린 잔해와 도망가던 기계를 동시에 베어갈랐다. 부품을 바닥에 쏟아내며 몸을 뉘인 기계를 괜히 발로 걷어차주고는 뒤를 돌아봤다.
"여긴가 봅니다!"
내 말에 일행이 기계의 잔해를 헤집으며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거대한 철문을 바라봤다.
적녹빛이 섞인 틀에다 검녹색이 흐르는 금속제 문짝이 달려있는, 왠지 존나 화려한 대문.
이건 국룰에 따르면 보스방이었다. 솔직히 아닐 수가 없었지.
심지어 이 문을 지키고 있던 인형이 존나 많던 걸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도끼와 그레이톰의 심판을 왼허리에 메어두고는,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 칼자루에 손을 걸쳤다.
"다들 준비됐죠?"
"응."
"옙."
두 종류의 대답이 각각 두 개의 입에서 나왔고,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큼직한 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괴력이 심장을 타고 흘렀다. 인간으로는 범접할 수도 없는 근력이 끓어오르는지 근육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 전능감을 만끽하면서 몸을 젖혔다가.
"이리 오너라!!!"
콰아아아앙!!!
발로 찼다. 문짝 하나는 떨어져나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남은 문짝도 삐걱대며 젖혀졌다.
휑하게 드리우는 어둠 속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서니 나를 넓은 공동이 반겨주었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진 않네."
다행이군.
아무것도 없었으면 좀 빡칠 뻔 했다.
동공의 중심 쯔음에, 어떤 인간이 앉아있었다.
성별은 알 수 없었다. 전신에 왠지 알 수 없는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고, 그 슈트는 어떤 이범배씨와 엇비슷한 느낌이 났다.
쫄쫄이라는 얘기였다.
"씁, 흑인인줄 알았는데."
상형문자 위의 그림들이 죄다 검은색 인간이길래 흑인인줄 알았건만, 그냥 검정 슈트를 두른 인간이었다.
나는 머쓱해하는 사이에 놈은 제 왕좌에서 일어났다. 존나 화려한 왕좌였다.
깡! 깡! 깡!
놈은 그렇게 일어서서 주먹끼리 부딪혔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듯한 쇳소리가 울리더니, 놈의 몸에서 점점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거… 이거 존나 익숙한데?
머릿가죽이 뒤집히는 것 같은 기묘한,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 감각을 느꼈던 주체를 떠올렸다.
그건 회색의 주인이었다.
"마력…?"
그 감각을 마리암 역시 느꼈는지 그렇게 말했고, 메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마력이라고?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였어?
마력 쓰는 마법사면 개좆밥인데.
내가 아쉬워하는 순간, 그놈은 그 알 수 없는 짓거리를 멈췄다. 전신에 둘러진 검은 연기가 너울거렸다.
그리고 놈이 자세를 낮추는 순간.
투쾅!
놈의 형체가 급속도로 커졌다.
그렇게 거대해진 형체는 어느새 내앞에 다가와,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이런 씨발.
커진 게 아니었다. 놈이 내게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거였다.
영원의 정신을 켰음에도 대비할 시간은 없었다. 놈의 주먹은 이미 내 투구에 닿기 직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순간의 고통을 영원처럼 느끼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방비만 한 채로 권능을 꺼야했다.
나는 이를 딱 다물고, 영원의 정신을 껐다.
콰아아아아앙!
시야가 뒤집힌다. 격한 통증이 얼굴에서 느껴진다.
내 몸 형편 없이 날아가는 와중에, 놈의 차가운 금속 주먹은 여전히 내 투구에 닿아있었다.
콰르르르르르!!!
"씨…발…."
얼굴에 틀어박힌 주먹은 떼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벽에 쳐박힌 채로 그 씨발놈의 주먹이 투구를 짓누르는 감각을 느꼈다. 마력 특유의 느낌도 여전했다. 마력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가속인가?
"귀공!"
"현성아!"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머리가 찌그러져 죽는다. 새삼이 세계가 좆망 하드코어 게임이라는 걸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얌전히 뒤질 생각은 없었다.
그 껌둥이 새끼가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두번째 주먹이 내게 날아왔다.
카앙!
"…이 씨발놈아…!"
내게 붙들린 놈의 강철주먹이 부들부들 떨렸고, 나는 내 팔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을 느꼈다.
[거인의 힘이 중복 발동됩니다.]
넌 뒈졌어.
나는 폭군의 검 칼자루에서 손을 떼내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꾸드드득
금속 건틀릿이 비틀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 감각을 그대로 앞을 향해 방사했다.
투쾅!!!
그리고 껌둥이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