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이방인 (83/274)



〈 83화 〉이방인

"뭐야 씨발."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형체는 온데간데 없이 슈트는 텅 비어 바닥에 널부러졌고, 나는 그렇게 비어버린 슈트를 흘깃댔다.
언데드였나 씨발?
하기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되는 통증 감내 능력이긴 했다.
바디블로를  번을 꽂았는데 멀쩡했고, 식량은 커녕 산소조차 희박했을 이 유적의 심층부에서 오랜 시간 있었던것처럼 보였으니.


어쨌든 뒈졌으니 신경 쓸 건 없었고, 나는 전신에 둘러진 화염 부여를 거뒀다.

푸화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오르는 불똥 사이로 일행들이 다가왔다. 마리암의 얼굴에는 걱정이 담겨있었고, 긴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메이는 평소와 같은 멍청한 표정이었다.
하품까지 하네.
내가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도  한 모양이었다.


"귀공 괜찮아?"


마리암은 아닌 듯 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를 들어올리니 그제서야 표정이 좀 풀렸다.

"당연하죠. 이런 좆밥은 저한테는 비비지도 못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어떤 애들이랑 싸워왔는데."

메이는 그렇게 거들었고, 마리암은 그제서야 슈트와 주변의 부숴진 흔적들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과 더불어 선선한 납득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강한데… 나는 이제 귀공의 무력이 어느 수준인지 감이 잘 안 와."
"뭐… 신의 대전사니까요."

나름 농담이었는데, 그녀는 진지하게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을짓길래 일부러 말을 돌렸다.


"이제 드래곤 끌어낼 그 유물이나 찾아봅시다."


마리암과 정찰병들은 내 제안에 동의하는지 흩어져  넓다란 공동을 살폈다. 그들은 능숙하게 어떤 도구를 꺼내 벽을 더듬기도 했는데, 나로서는 좆도 모르는 분야라서 아가리를 닥치고 있을  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내 팔을 타고 빠져나가는 거인의 힘을 느끼면서 폭군의 검을 집어들어 등에 걸쳤다.
아슬아슬하게 거인의 힘이 꺼지는 순간 전에는 등에 걸칠 수 있었다.


"어후, 피곤해."

물론 몸싸움이 힘들었던 건 아니다. 신조차 버티지 못하는 거력으로 두들겨패는 거라 놈에게는 여유가 없었고, 메이의 마법 역시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거인의  중복 발동은 여전히 육체에 어마어마한 탈력감을 선사했다.
몸살 감기라도 걸린 것 같은 기묘한 탈력감에 나는 괜시리 어깨를 몇 번 돌렸고, 메이는 그런 나를 보면서 방패를 주섬주섬 등에 걸쳤다.

"어디보자…."


이제 슈트 차례였다.
물론 내가 갑주를 갖고 있으니 이게 쓸모가 있을까, 싶긴 한데. 마리암한테 입혀준다면 충분히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라서 굴곡도 보기 좋을테고.
나는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슈트에 손을 가져갔고.


슈르르륵

"구와아아악!"
"힉, 현성아!"

갑자기 슈트가 변형하더니 내 몸에 파고드는 모습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씨발, 이거 뭐야 씨발!
액체처럼 변형한 그것은 내 몸을 파고들어 내 피부를 파고들어 내 목숨을 끝장내….
 않았다.


단지  피부를, 전신을 덮었을 뿐이었다.
이거 영화에서 본  같은데.

내가 비명을 지른 것과는 달리 멀쩡한 모습으로 갑옷 속 몸을 더듬자, 메이가 달려왔다.

"괜찮아?!   들려?!"


메이는 이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요리저리살피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투구를 벗고 건틀릿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게 뭔…."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기묘한 안정감이 드는 게, 확실히 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같았다.
그리고  감각은 거짓말이 아닌 듯, 건틀릿을 벗어 맨살이 드러나야 할 왼손은 정체불명의 검은 사슬로 덮여있었다.

"현성아  얼굴…."

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가리켰는데, 평소라면 잘생겼냐고 농담이라고 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혹시나 얼굴이 씹창난 거면 존나 억울할 거 같아서.
나는 조심스럽게 검은사슬로 뒤덮인 왼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었다.


그 위로 피부의 감각은 없었다. 단지 사슬끼리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뭐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내가 매만지고 있던 부분을 중심으로 사슬이 벌려졌다.


"…씨발?"


 아래엔 내 얼굴이 있었다. 차가운 사슬이 내 얼굴을 스치는 감각이 들었다.
내 손을 두른 사슬의 감각이었다.

설마?


나는 손을 끌어내리고는 완갑의 이음매나 각반의 이음매를 보았다. 더불어 허리를 틀어서는 내 흉갑 사이의 틈을 문지르며 눈으로 확인했다.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아주 촘촘하고 훌륭한 만듦새의 사슬갑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사슬은 빛을 흡수하는 듯 묵직한 검은빛을 띄었고,  사슬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슬이라는 걸 수 없을 정도로 세밀했다. 족히 일반적인 사슬갑주의 사슬고리의 10분의 1 쯤은 될 듯한 크기의 사슬이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득템인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메이도 이쯤 되니 오히려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이년아.


"찾아봤는데 아무것도 없… 귀공? 그거 귀공이 입은 거야?"

나와 메이가 말없이 눈싸움을 하는 사이, 방 탐색을 마친 마리암과 그 부하가 다가왔다.
그들은 내가 두른 사슬갑주와 메이, 내 얼굴을 흘깃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직 안전한지 확인도 안된 유물인데… 몸에 이상은 없어?"
"…그, 제가 입으려고   아니라 저절로 입혀져 버린 거라…."


왜 혼나는 거 같지.
마리암은 잠시간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없어보이는  같아서 다행인데, 혹시라도 몸이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말해줘?"

고운 배려였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고, 그녀는 그런 내 새로운 사슬갑주를 다가와 손가락으로 훑었다.
흉갑 이음매 사이로 튀어나온 사슬을 손가락으로 쓸던 그녀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런 유물은 들어본 적이 없어. 고대인의 유물들은 하나 같이 독특한 물건들이긴 하지만, 이건  독특함이라는 주제로 형용할  있는 물건이 아닌  같은데."

전문가의 말이라 나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알고 있는 고대인의 유물이 없어서 별로 할  있는 말은 없었지만.


"어디 뭐 불편하거나 기분이 이상하진 않아?"
"오히려 안정감으로만 친다면 전보다 더 좋은데요? 뭔가 좀 더… 유기적인 느낌이랄지."


협응성이 올랐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육체 전체를 감싸는 안정감이 충만했다. 독특한 감촉이었다. 한참간이나 내 사슬 갑주를 쓸어보던 그녀는 내 안색을 한 번 더 살폈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보기엔 이게 그 드래곤이 찾던 유물이 아닌가 싶어."


그녀의 말에나는 내가 두른 사슬 갑주를 흘깃 보았다.

"자동 장착에 사이즈 조절이 달려있고, 특수한 기능까지 있으니… 맞겠네요."


메이는 그제서야 대화를 따라왔는지 앗, 하는 소리를 내면서 동의했다.
 드래곤이 이걸 왜 필요로 했는지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걸로 드래곤을 꾀어낼 수 있어보였다.
즉, 당초의 목표는 달성했다는 얘기였다.

"그럼 이제 나갈까?"
"…아뇨,  쉬다가 나가죠."

칙칙한 던전 보스룸에서 쉬는 게 별로 좋은생각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워낙에 지쳐야 말이지.
거인의 중첩 발동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했지만, 그만큼  유지 시간이 다했을 때의 피로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 미소를 어떻게 읽었는지 마리암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닥불에 모여앉았다.
칼과 네모이라고 불리는 정찰병들은 방의 구조를 더 살펴보겠다며 자리를 떴고, 메이는 식량을 몇 개 더 씹어먹고는 졸렸는지 몸을 말고 잠에 들었다.
그런 메이의 머리를 무릎에 얹은 채로 나는 마리암과 마주봤다.


내 전신 갑주와 망토, 이번에 새로 얻은 사슬갑주는 곱게 정리되어 마리암의 무기나 방어구와 함께 한 켠에 쌓여있었다.

"미안해."

장작 하나를  화염 부여로 태워 밀어넣을 쯔음에, 그녀가 그렇게말했다.
평소라면 뭘 그러냐고 했겠는데, 워낙에 뜬금 없던 탓에 뭘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고, 마리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손장난을 쳤다. 불안한가?

"귀공을 도와야 했는데, 막상 메이랑 귀공만 싸우게 둔 셈이 되어버렸네.나름 도움이 되겠다고 나온 거였는데…."

아, 그런 건가.
나는 그녀가 뭘 얘기하고 싶은 건지 알아챘다.
아까 껌둥이 새끼랑 싸울  별로 도움이 못된  자책하는 모양이었다. 꾸중이라도 받기를 바라면서.
생긴 거만 보면 발랑 까지고 싸가지 없을 것 같은 여자가 유적씹덕에 성실하기까지 하니 기묘한 감상이 들었다.

"하지만 귀공의 싸움에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겠더라고. 조준을 고치는  잠깐에도 몇 번씩 주고 받고, 무기를 들고 달려들자니 도저히 근처에서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후우, 조금 착잡하더라고. 나름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녀가 특별히 약한  아니고, 내가 존나 센 거 뿐이었다.
이 다크 판타지 세계 속 인간들은 꽤 강한 편이었지만 그것도 현대인 기준으로 좀 센 것 뿐이었지 본격적으로 괴물과 신을 독대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알고 있어도 생각대로 감정이 따라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래서 자책하는것처럼 보였다.
 별 걸 다 걱정하네~ 했겠지만, 진중한 표정에 나도 괜시리 진지하게 생각했다.

"마리암이 섬기는 신의 대전사잖아요. 너무 기죽지 마세요. 인간 중에서는 꽤 센 편 아닙니까?"
"…귀공도 사람이잖아. 안 그래? 거기 아가씨도 그렇고."


메이는 몸을 말고 자고 있었지만, 마리암은 착잡한 표정으로 메이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슬슬 나랑 메이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원래는 마리암을 비롯한 나를 섬기는 군대를 이끌어 신을 격퇴할까 했었는데, 그게 무리한 짓거리라는 걸 체감했다.
이들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 영웅도 아니고, 특별한 존재나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
이 빌어먹을 다크 판타지에서 영웅과 특별한존재, 괴물은 한데 묶여 이렇게 분류 되었다.
보스 몬스터.

그래서 나는 이들의 나약함을 따지지 않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마리암도 충분히 제 몫을 했습니다. 솔직히 마리암이 없었으면 저나 메이는 함정으로 꼬챙이 당하거나, 아니면 함정을 겨우겨우 피하면서 나아가야 했을 걸요."

마리암은 침울한 표정으로 애써 웃었고, 나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마시고요."

마리암은 겨우 표정을 풀었고, 메이는 잠꼬대를 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그런 메이를 옆에 내려놓고는 가져온 담요를 몸에 둘렀다. 솔직히 말하는 것도 기진맥진했다.

"고마워."
"뭘요. 신도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도 대전사가 할 일이죠."

그녀는  농담에 소리내어 웃었고, 나는 몸을 길게 뉘이고는 하품을 뱉었다.


"피곤해서 눈 좀 붙일게요. 이따가 깨워주세요."
"응, 그럴게."


마리암은 눈을 접어 웃었고, 그 미묘한 색기를 애써 무시하면서 눈을 감았다.


"고마워."

마리암이 감사를 표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자고일어나니 몸은 결리긴 했지만, 몸살 걸린 것 같은 탈력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가자마자 드래곤이 덮쳐올 수도 있는  감안하면 다행이었다.
반면 메이는 어깨가 결린다며 찡찡댔다. 나는 그런 메이의 어깨를 한참이나 주무른 후에야 갑주를 입을 수 있었다.
마리암의 도움으로 갑주를 두른 나는, 우리가 들어왔던 길로 일행을 이끌어 밖으로 나섰다.


"이제 어떻게  거야?"

스멀스멀 그림자 사이로 비춰오는 태양빛을보면서 나는 눈을 찌푸렸고, 메이는 내 옆에 꿋꿋이 서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나는  질문에 괜히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봤다.
마리암은 어제의 음울함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멀쩡했고, 정찰병  명은 아침에 약한지 약간 피곤해보였다.
애초에 아침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사실 드래곤이 내가 유물을 가지고 있는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 판금 갑주 아래에서 검은빛을 흘리는 사슬갑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흔적을 찾을 수도 없게 가려져 있었다.
게다가 유적 밖으로 나섰는데 우리를 습격해오는 드래곤이 없는  보면…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미끼를 놓고끌어내야겠지."

나는 웃었고, 메이는 그런 나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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