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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이방인 (84/274)



〈 84화 〉이방인

넓은 초원, 소위 늑대가 달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선선한 바람에따라 풀들이 춤을 추는 초원.
그 초원 한 가운데 한 남자가 몸을 바닥에 내던진 채로 대자로 뻗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남자는 전신에 잘 만들어진 판금 갑주를 두르고, 안에는 그 색을 엿보는 것조차 어려운 짙은 검은색 사슬 갑주를 둘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금떨어진 곳, 드리운 나무 그늘 아래에 숨은 소녀가 그 모습을 불안하게 엿보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저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애정 전선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남자, 주현성은 미끼였고 소녀, 메이는 낚싯대였다.

'과연 먹힐까?'

메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현성의 모습을 살폈다. 풀이 너울거릴 때마다 주현성의 모습이 가려져 괜히 불안하기만 했다.

'땅에서 나오면….'


숨을 들이키자, 풀내음이 비강을 타고 흘렀다.
메이는 주현성이 알려줬던 정보와 계획을 머릿 속으로 복기시켰다.

드래곤이 유적지 내부에 있는 유물을 탐지해낸 건지, 아니면 누군가한테 그 정보를 흘러들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드래곤이 유물을 탐지해낸  맞다면, 주현성이 미끼로서 저렇게 초원에 누워있는 걸로 놈을 끌어들일  있을 거라고.
주현성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니 주현성은 저렇게 뻗어있었다.
목표인 드래곤이 나타나면 그 이후의 일은 메이의 몫이었다.


메이는 그녀의, 만약 부딪히면 어쩌냐는질문에 대답했던 주현성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떠올렸다. 괜히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아서 애써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겨.'


그건 그냥 단순히 자신이 있다고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다.
주현성이라는 남자는 원래 그런 성격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 메이는 그의 몫까지 열심히 불안해하고 망설였다.
무슨 마법을 쓸지, 어떻게 쓸지, 어디에 쏴야할지, 어떻게 하면 주현성이 다치게 않게 쏠지.


결국 그녀는 종국에는 드래곤이 진짜 올지에 대한 가능성보다도 주현성이 다치는 걸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던 메이에게 말하듯, 땅이 거칠게 울며 흔들렸다.


"히이익!"

괜히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참으면서 주현성이 있던 자리를 흘긋 보았다.
주현성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진짜 왔네.
아무래도 탐지가 맞는 모양이다. 어떻게 탐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 장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마력을 알아차렸을 정도니까. 다크 판타지 원주민인 드래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앞에 나타났다는 게 중요했지.


그리고 저 드래곤을 줘패는 건, 다른 걸 줘패는 것만큼 쉬울 것이었다.
나는 팔을 과장스럽게 풀었다.

쿠르르르르


땅에 거세게 움직이던 게 멈추던 순간.


투화아아악!


흙더미를 뒤집어엎으며 그 자리에서 드래곤이 솟아났다.
전신에 두른 뿔이 군데군데 부러져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서는 짙은 광기가 느껴졌다.
딱 봐도 술주정하는 미친놈 수준보다  나아간 종류의 광기였다.

"좋아, 해볼까."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권능을 사용하자, 전신에 익숙한 괴력이 내달렸다.
거인의 완력과 동일한 수준의 근력, 부풀어오르는 완력으로 어깨를 풀었다.

크 오 오 오   오!!!

드래곤은 그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보다 몇십배는 나가는 무게와 명확한 살의, 주눅 들더라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나는 기묘하게도 평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의 도살자와 싸우며 보았던 여름의 화신, 봄의 순례자가 부리던 대전사까지.
그 모든 걸 겪은 나에게 고작 드래곤 따위는 그저 뚱뚱하고 거대한 도마뱀에 불과했다.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을 끌어내린다. 놈이 다가온다. 콧김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렸다. 더운 숨이 내게 훅 풍겨온다.


그리고 나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양손으로 쥐고 버겁게 폭군의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거인의  중복 발동만큼의 근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인의 힘은 만만한권능이 아니다.
게임에서도 물리 데미지 증가 배율로는 최고라고   있었던 권능이었는데, 그런만큼 내 팔을 내달리는  진짜 거인에 준하는 완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근력으로 휘두른 파괴불가의 묵직한 거검에 두들겨 맞은 드래곤은 멀리 날아가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오   오 오!!!


고통스러워 하는 비명을 들으며 나는 다리를 바닥에 쳐박았다. 흩날리는 뿔 파편들이 거슬리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나 혼자가 아니었으니 문제될  없었다.

"메이!"

챠르르르르륵!


화염 사슬이 나무에 휘감기고, 남은 절반이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불타오르는 사슬은 당연히 나무를 빠르게 태워갔지만, 나무가 전소하기전에 드래곤에게 휘감겼다. 그리고 그렇게 휘감긴 사슬은 성실하게 나무를 끌어당겼다.

후우웅!

내가 허리를 숙이자, 내 머리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더니 나무가 날아갔다.
불타오르고, 푸석푸석해진 고목은 드래곤의 머리를 강타했다.


퍼어어억!

이리저리 튀는 불똥 사이로 드래곤은 연신 몸을 비틀어댔고, 나는 그런 드래곤에게 마주 달려갔다.
고통에 앞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드래곤에게  짓은 하나 밖에 없었다.


"―흐읍."

들이킨 숨을 따라 근육이 꿈틀거렸고, 나는 그 거력을 견디면서 검을 높이 들었다.
태양 바로 아래에 걸린 폭군의 검은 드글거리는 완력을 견디며 기기긱 하는 소름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띄워졌다.

쩌어어엉!

몸이 중력의 영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리찍은 대검이 드래곤의 아가리를 후려쳤고, 드래곤은 땅에 대가리를 쳐박으면서 몇 개의 뿔을 더 떨어트렸다.
이게 되네?

그때였다.  씹새끼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건.
드래곤은 그렇게 고통에 떨더니 몸을 틀어올렸다. 그 거체가 움직이니 딸려간 바람이 거세게 울었고, 드래곤 역시 울었다. 녀석은 울면서 몸을 비틀었고, 그렇게 비틀자 피부를 점거하고 있던 뿔들이 부르르 떨렸다.

"어, 씨발."


이거… 뭔지  것 같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전신에 달린 뿔을 전방으로 쏘아내기만 하는, 듣기만 하면 그냥 존나 단순해보이는 공격 기술.
하지만 게임에서도 어지간한 경우에는 즉사하는 패턴.

칼을 들어서 막을지, 아니면 메이의 뒤로 숨을지 하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메이가 내게 손짓하는  보고는 폭군의 검을 등에 걸치며 바닥을 박찼다.


메이는 내가 제 옆에 서자마자 방패를 펼쳤고, 황급히 펼친 방패는 바닥을  쯤 파고들면서 공간을 메웠다.
메꿔진 공간의 위로, 한 눈에보기에도 지나치게 많아보이는 파편이 쇄도했다.
유성우 같았다. 아름답지는 않은 버전으로.

투두두두두두두두두!!!

"…윽!"


그간 드래곤의 브레스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원거리 공격 수단을 원천 봉쇄해왔던 방패가 가늘게 떨려왔다.
메이는 그 방패를 붙잡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방패 위로 무수한 뿔들이 내리꽂혔고, 마력으로 이뤄진 방어장을 두들긴 뿔들은 튕겨져 나왔다가 뒤따라온뿔들에 밀려 다시 방어장 위로 부딪혔다.
죽음이 죽음을 떠미는 듯 했다.
마치 소나기처럼 내리는 죽음에 메이는 숨을 죽였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존나 까다롭네, 좆밥인 줄 알았는데.


"씨발, 이 패턴을 까먹다니."

역시 2회차 PVE를 했어야 했나.
괜한 고집으로 PVP만 하겠다고 게 병신짓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패턴을 조금만 알아도 상당히 수월할텐데.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방패에 기관총 같은 소리를 내며 격돌하던 뿔들의 공세가 멎었다.


크 롸 라 라  라 


포효가 들렸다.
근데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 드래곤이 도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씨발."

챠캉!


메이의 방패가 접히자  너머에는 도망치려고 피막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날아오르고 있는 파충류 새끼가 있었다.
졸렬하게 원거리 공격 쏟아붓고 도망?
짜증이 나긴 했지만, 속이 타진 않았다.
 새끼가 도망을 치리란 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

"현성아! 저거 또 도망가!"


메이는 숨을 고르더니 그 파충류 새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절부절했고, 나는 그런 메이를 흘긋 보고는 제자리에서 통통 발목으로만 뛰었다.

"야,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응?"
"이거, 어떻게 하면, 잘  수 있을지, 말이야."
"…응."

준비운동이 끝나고 다리가 좀 준비가 됐다 싶은 때에, 나는 내려앉아 양 주먹을 들어올렸다.

"뭐하게…?"

메이는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메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양주먹을 부딪혔다.


까앙!

거인의 힘이 실린 주먹끼리 부딪히자, 갑주가 신음하고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 검은 연기는 어떤 질량도 없는지 기묘하게 내 몸을 감싸기만 했고, 나는 그 연기가 얼굴을 간질임에도 눈앞이 또렷하게 보이는  신기했다.


까아앙!

다시 한  격돌.
부딪힌 주먹이 좀 아리긴 했지만, 검은 연기가 무지막지하게 치솟고 마력이라고 할 수 있을 감각이 거세졌다.
메이는 슬슬 눈치챘는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 사슬 갑주는 충격량을 흡수하든지,쌓든지 해서 추진력으로 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직접쌓으면 존나 개쩌는 거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나는 이미 검은 연기에 둘러싸였고, 메이의 번들거리는 방패로 살펴보니 검은 연기에 감싸져 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좀 멋있는데?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먹을 풀었다.

"야."
"…응."
"내가 끌고 오면 사슬로 끌어내려서, 바닥에 쳐박아라?"
"응?"

그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메이는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깜빡거렸고, 나는 그런 메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제 거리가 좀 있는 드래곤을 주시했다. 놈은 멀리에 있었다.
뭔 지랄을 해도 메이가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콰아아앙!
거인의 힘으로 증폭된 각력으로 바닥을 밟으니, 거세게 세상이 튀어올랐다. 멀찍이에 있는 산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왔고, 그에 준하는 속도로 드래곤이 멀어져 갔다.
물론 달리기로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나는 다리를 꾸준히 놀리면서 박차를 바닥에 굴렸다.


화르륵!

나타난 화염마가 내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나는  화염마를 움직여 거리를 좁혔다.


화염마는 내 생각 이상의 속도로 움직였다. 거인의 힘과는 비교도 안되는 속도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드래곤의 비탄에 찬 울음소리가 들릴 무렵, 나는 뛰어올랐다.

투쾅!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나와 화염마가 날아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화염마는  의사에 따라 모습을 감추었고, 나는 내 바로 아래에 위치한 드래곤을 보며 몸을 틀었다.

이미 사용법 정도는 예습을 해놨다.
사용법은 입는 법보다 더 간단했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내 몸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로 가속했다.

머릿 속으로 발동을 외친 순간,  몸이 나조차 방향을 잊을 정도로 가속했다.
그 가속도를 고스란히 실은 주먹이 드래곤의 아가리에 꽂혔고, 꽂힌 자리에서 파공성이 터져나왔다.
내 수십배에 달할 거체가 그 주먹질에 지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드래곤이 초원 바닥을 긁으며 내리꽂혔고, 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남아있던 뿔파편들이 불똥처럼 튀겨댔다.
파이는 도랑은 깊어서 드래곤은 한참에 흙바닥에 끌리면서 감속했고, 감속이 멈췄을 때는 거대한 암석에 부딪혀 몸이 치솟았다.
그 위에 올라타있던 나는 반동으로 날아올랐다.


"이런 씨발."

지나칠 정도의 부유감을 즐기는 것도 잠시, 고개를 떨구니 그 드래곤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고를 길은 아까 했던 걸 다시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허공에 뜬 채로 몸을 돌려, 양다리를 아래로 향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원래 이런 때에는 직접 말하는 게 국룰이랬다.


"발동."

투화아아악!


내 읊조림과 동시에 갑주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가속을 시작했고, 나는 다리를 내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억!

그리고 격돌.
다리가 아려오는 것도 잠시, 드래곤의 대가리가 바닥에 쳐박히며 뭉게졌다.


퍼어어억!


물풍선을 고층에서 떨어트린  같은 소리였다.
내 발 아래에서 드래곤의 눈알, 뇌수, 회백질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졌고, 나는 튀는 그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피하지 못해 피범벅이 되었다.


"…씨발."

물론 의도하던 결과보다 좋았다.
원래라면 땅으로 끌어내려서 메이랑 같이 잡아야 하던 놈이었다.
도망가기 전에 잡았다면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더러워질 필요는 없지 않았나?
나는  몸을 얼룩덜룩하게 만든 드래곤의 뇌수나 뇟조각 같은 걸 손으로 집어 떨구거나 몸을 털어냈고, 저 멀리서 메이가 헉헉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현성아! 괜찮…아?"


내게 다가오던 메이는  행색을 보고는 멈춰섰고, 나는 피로 얼룩진 건틀릿을 벗어 흔들었다.


"아니."


메이는 내 기분을 물어오지 않았고, 나도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씨발, 좆같은도마뱀 새끼.
나는 괜시리 드래곤을 발로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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