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이방인 (85/274)



〈 85화 〉이방인

끓어오르는 솥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하나.
눈물과 땀, 감동과 향수의 파도라고 해야할까.
얼추 감상적인 표현을 늘어놓기 무섭게, 겨울의 신부가 썰어놓은 고기가 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애석하게도 돼지는 없었지만 엇비슷한 멧돼지 고기는 구할 수 있었다.
여기 부족 새끼들은 나의 강대한 무력과 용의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는 용을 죽인 자라며 나를 떠받들었다.
나에게 유일하게 미묘한 반감을 품고 있던 부족장 역시 그런 나의 모습에는 꼬리를 내릴  밖에 없었고, 얼마 남지 않은 고기는 나에게 '양보'됐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어둑하게 져서 가느다란 달빛만이 스며드는 천막 속에서, 나와 메이, 겨울의 신부는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불을 쬐면서 끓어오르는 솥을 보고 있자니 배도 적당히 주려왔다.


"마리암 언니는?"

메이가 내게 물었다. 나는 김치찌개를 멀거니 보면서 할 말을 머릿 속에서 끼워맞췄다.

"매운 건 안 좋아한다고 딴  드시러 가셨지."
"이거 매워?"


메이는 금시초문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했다.
…중국도 매운 거 많지 않나?
맨날 짱깨라고 멸시하던 문화권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사천짜장 같은 걸 보자면  있는 것 같은데.


"…별로?"
"으으음…."

메이는 내 늦은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팔짱을 끼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한국인들이 안 맵다고 하는  다 맵다던데…."
"나 못 믿냐?"
"아, 아냐! 믿어!"


이제 인중을 안 때려도 알아서 닥칠 줄 아는 고운 짱깨로 자라난 메이가, 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묘하게 찌푸린 표정을 지은 채 끓고 있는 다크 판타지 최초의 김치찌개를 바라봤다.
보글거리는 붉은 거품 위로 둥둥 뜬 기름, 떠서  몸을 흔들어대는 고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크 판타지 고추와 파, 김치가 있었다.

사실 그렇게 엄청나게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유사한 맛이라면 향수병을 좀 달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이 외관만큼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겨울의 신부 요리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인지,아니면 다크 판타지의 재료들이 그렇게 현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없었다.


"즐거워 보이세요."
"…아, 고향의 음식이라서요."


겨울의 신부는 내 말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방긋 웃더니, 인자한 표정으로 찌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 거라면 다음에도 해드릴게요."

겨울의 마망은 내게 인자하게 웃으며 솥을 국자 같은 걸로 휘저었다.
역시 먹을만한 상태가 되려면 아직약간 시간이 남은 것 같았다.
나는 입안 가득한 침을 삼키고는 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건 편지였는데, 써있는 거라고는 이게 전부였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어 7명한테 보내는 편지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독특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드래곤도 마법에 걸려있던 걸까?"
"그렇겠지."


바로 마법.
이 편지에는 옅지만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메이와 나는 그걸 눈치챌  있었고, 그래서 메이는 그 편지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드래곤을 조종하던지, 세뇌하던지 해서 다루던 마법사라면 보통마법사는 아닐텐데.


"뭐라고 써있는 거야?"
"…나를 초대한다고."

게다가 더 특이한 건, 똑같은 번역기가 탑재된 메이는 읽을 수 없고 나만 읽을 수 있었다는 거다.
정상적인 편지라면 우리   읽을 수 있어야 할텐데.
즉, 이 편지는 정확하게 나를 겨냥하고 보내진 초대장이었다.

"안 뜯을 거야?"

그래서 나는 뜯지 않았다. 확인은 커녕 그냥 쟁여만 뒀다.
알 수 없는 마법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편지라서 뜯는 건 보류했다.


"응."


메이는 몇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 앉았고, 나는  초대장을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거의 다 된  같네요."
"아, 잘됐나요?"
"예,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셨어요."

겨울의 신부는 내 칭찬에 기쁜듯이 웃었고, 나는 내 눈앞에서 끓고 있는 유사 김치찌개를 보았다.
큼직하게 썰린 멧돼지 고기는 붉은 김치국물 사이에서 영롱했고, 잘 썰린 유사 김치와 유사 고추가  국물 위를 표류했다.
좋아, 이건  참지.

부족민 아주머니에게 받은 목재그릇 속의 밥을 덜어서 메이와 겨울의 신부 앞에 두었다.


"이건…."
"밥입니다. 찌개랑 같이 드시면 돼요."

겨울의 신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해했다.

"수저로 떠서 드시면 됩니다. 제가 시범을…."


아, 맞다.
얘 눈 안 보이지.
새삼 조용해지는 겨울의 신부와 미묘한 표정을 짓는 메이를 흘긋 보고는 헛기침을 뱉어냈다.

"크흠. 말을 잘못했네요."


그럼 시범이라고 해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냥 말로 해주는 게 전부겠군.

"찌개의 고기나 채소를 건져서 드시고 밥도 같이 드시면 됩니다."


겨울의 신부는 머뭇거리는 손으로 수저를 뻗어 고기를 하나 건지고는 입에 넣었다. 그 작은 입이 고기가 들어가니 부풀었다.

"…맵네요."


흠, 그런가?
나는 밥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밀어넣었고, 원래 먹던 밥보다는 찰기가 살짝 강한 쌀알이 입안에 느껴졌다.
약간 아쉽지만,  대신 닭이라고들 하니까.
찌개 위를 떠다니는 고기를 수저로 건져 입에 밀어넣었다.

"크."

맵기는 무슨.
하나도 안 매운데.
오히려 나는 혀를 간질이는 지방 붙은 고기의 감칠맛과 식감, 쌀알의 은은한 단맛에 잘 어우러졌다.
쌀이 원래 이렇게 달았나?

나는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심정으로 입안 가득 고기와 밥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씹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육즙으로 낱알이 젖어들었고, 젖어든 밥알들은 내 어금니, 앞니를 점했다.


"맛있는데?"

그런 나를 보면서 침을 삼키던 메이는 황급하게 밥과 김치찌개를 먹었고, 나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씹으면서 놀라워 하고 있었다.
짱깨라서 입맛에 안 맞을 줄 알았는데.


"약간 매운데 맛있어."


겨울의 신부는 약간 얼굴이 붉었고, 메이는 매운지 이따금씩 혀를 빼물었다.
그래도 짱깨라서 매운맛에 어느정도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근데 얘가 맛없다고 한 적이 있긴 한가?


"네 입에 안 맛있는  없지 않냐."
"그건 그래."

메이는 헤헤 웃으며 밥을 비워나갔고, 나는 질세라 빠르게 아가리 속으로 음식을 때려박았다.
대충 0.7김치찌개 정도는 되는 김치찌개였다.
마늘이 없는 거나 안에 넣은 채소의 근소한 차이 때문에 만들어진 0.3 정도 고향의 맛과는 벌어져 있었지만, 향수로 시달리던 내 몸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로, 나는 가까워져 가는 도시를 바라봤다.
고대의 도시, 꽤 오랜 시간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장소.
아직까지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확실히  사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한동안 따뜻한 잠자리에서 여자를 끼고 편안한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다 노숙을 하니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윽…."


그리고 그건 뿐만이 아닌지, 메이는 칭얼거리면서 내게 안겨왔다.

"나 마사지 해줘…."
"나중에. 여기 흔들리는데 어떻게 하냐."


메이는 그래도 툴툴대면서 나한테 앵기더니, 결국은 포기하고 내 다리를 베개 삼아 뻗었다.
나는 도시의 성문이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 마차에 몸을 기댔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으니까."


메이는 더 이상 불만을 말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메이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겨울의 신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숨 죽여 웃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긴 여정은 아니었지만, 수확은 확실했다.
나름 강맹하다고 주장하는 부족민들을 규합해서 그들이 고대의 도시로 가도록 설득했고, 그들은 행렬을 이루어 도시에 진입했다.
그들은 훌륭한 병력이 되어줄 것이고, 훌륭한 시민이 되어줄 것이다.


아마도.
적응 못하고 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채소들의 씨앗과 김치, 쌀이 중요한 거였으니.
마차를 끌던 마리암이 문득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 눈을 마주봤다.

"귀공, 신원 증명을 위해 귀공한테 와달래."


이 새끼들은  자꾸 왕한테 오라 가라 하는 거냐.
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저건 틀린 절차가 아니었다.
나는 마차에서 몸을 일으켰고, 메이는 툴툴대면서 겨울의 신부 다리로 자리를 옮겼다.


"많기도 하지."

만약 내가 소수의 사람들만 데려왔다면 이런 절차가 필요 없을테지만, 나는 부족 전체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이 행렬은 끝도 없는 것처럼 이어져 있었고, 나름 큰 부족인지 가축도 상당히 많았다.
그것만 본다면 위협적이진 않아야겠지만, 야만인 새끼들 몸집이 워낙 좋아야지.

나는 성문으로 다가갔고,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던 야만인들은 내가 성문 앞에 서자마자 열리는 것에 안도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문 너머에는 기사단장이 있었다.
이 할배는 새벽부터 일하나?
내가 어이 없어 웃자, 기사단장은 노인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병사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번 원정은 성공적이신 것 같군요. 저들이 전하의 휘하로 들어온다면 큰 도움이  겁니다."


그런 목적으로 갔던 원정은 아니었는데.
내 미소를 어떻게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단장 퍼시발은 웃으면서 나를 안으로 들였다.


"곧 다른 이들도  것입니다."
"일하는데 방해한  아닌가 모르겠네요."
"허허, 전하가 오시는데 방해라뇨."

 할배, 처음 볼 때만 하더라도 능구렁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해졌다.
나는 놀라워하면서도 성문 인근에 위치한 아성에 들어섰다.
그 안에서 잠시 시간을 떼우니, 세레나와 교단 중역들이 나를 들어와서는 나를 맞이했다.

"또 사람을 데려오셨네요."
"아, 그게 다 제 재주죠."


거만한 말임에도 세레나는 웃기만 했고, 나는 그녀를 마주보면서 웃었다.
이제는 꽤 머리카락이 자라난 대머리 산적은 호기롭게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로메만이 좀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뭔데?
내가 살로메와 눈을 마주치니, 살로메는 꼬리를 크게 흔들면서 흠칫 떨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왠지 미묘하게 차가운 도마뱀 거죽이 내 몸을 뒤덮으며 샅샅이 뒤졌다.

"어, 씨발, 어? 왜, 왜 그러세요!"


씨발 이 도마뱀이 나 강간하려고 한다! 도와줘 병신들아!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이들은 당황한 채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당황에서 벗어나 손을 쓰기 전에, 살로메가 내게서 손을 거뒀다.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물건이 들려져 있었다.

일단  순결이 들려있는 건 아니었다.


"대전사님, 이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미묘하게 날이 선 목소리였는데,  날이 향한 게 내가 아니라는 건 명확히 느껴졌다.
오히려 존나… 불안해보였다.

"그… 저 야만인들 괴롭히던 드래곤 때려잡으니까 떨어졌는데…."

뭐지, 왜 엄마한테 혼나는 기분이 들지?
내가 드래곤을 잡았다는 사실부터가 금시초문인 일행들은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살로메는 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큼직한 파충류 눈알에 염려가 담겼다.

"그, 마법 냄새가 좀 나길래 안 열었거든요… 뭔가,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살로메는 얌전한 도마뱀이다. 오히려 조신하기까지 한 녀석이다.
근데 그런 살로메가  몸을 더듬어서 편지를 거둬가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있자니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착각한  아니라면, 이 마법의 흔적은 제 스승님이시자 저희 부족 마법의 대사조이신 '붉은 어머니'의 흔적입니다."


…붉은 어머니라고?
걔가 거기서 왜 나와?
그거라면… 나중에나 잡아야할 보스인데?

나는 살로메 손에 들려진 편지를 바라봤고,  편지의 찍힌 인장은 요사스럽게 빛났다.
눈이 시릴 정도로, 붉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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