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씨발.
좆같은 야만인 새끼들.
나는 눈앞에 그득한 서류를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서류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내 눈을 뜨고서 그 서류철을 다시 바라봤다.
"애미 없는 새끼들…."
여왕 샤론이 내 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서류를 더 덜어갔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창 밖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를 했다. 이 야만인 새끼들이 야만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명 사회와 교류한 흔적도 있고 나름 지성인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썅놈들은 내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배신도 이정도면 법적 공방으로 가야한다.
나는 눈에 들어온 서류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 서류에는 이런저런 청구 금액과 더불어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명단, 그리고 가해자인 야만인 새끼들의 이름도 실려 있었다.
그 중 익숙한 이름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경미해지거나 내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세레나가 있어서 다행이지, 현장에서 고생하는 그녀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쯤 실각하고 기요틴에 대가리에 밀어넣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잘 갈린 사각형 칼날에 목이 떨어지고 있던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괜찮느냐?"
"전혀요. 마음 같아서는 전부 죽여버리고 싶은데요."
"으음…."
샤론은 그런 내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멋쩍은 낯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래, 나도 안다. 쟤한테 잘못은 없는 거. 오히려 나를 도와주겠다고 본인의 업무와 병행하면서 조언을 해주거나, 서류를 정리하거나 해주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내 좆같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서류 정리를 끝내고, 온갖 명령서에 상세한 명령이나 서명을 기입했다.
좆망한 세상이라 화폐의 가치와 함께 서명, 이름의 가치는 무뎌진 줄 알았더만 이 도시에 한해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사무를 보고 있었다.
"후우… 좆같은 야만인들."
"귀공도 야만인이지 않은가? 동포들에게 좀 관대해져보는 건 어떤가?"
"전하 방광에게 전하가 했던 것처럼요?"
"…그 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샤론은 얼굴을 붉히고는 큼큼, 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얘도 내가 편해졌는지 이제 내 개소리에도 허물 없이 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기 입으로 나더러 야만인이란다.
이렇게 잘생긴 야만인이어딨다고.
앞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는 또각거리는 신발 소리 사이로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왕이 내게 다가와 내 등받이에 손을 걸쳤다. 삐걱임이 심해졌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군."
"전 전사지 행정관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지…. 음, 정 그렇다면 짐이 안마라도 해줄까?"
…네가?
대충 그런 의미를 담아 샤론을 올려다보자 그녀의 금발이 내 얼굴을 스쳤다. 그녀는 큼직한 자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존나 미묘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뭔 표정인데?
"…."
"…."
샤론이 눈썹을 들썩였고, 나는 그런 샤론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세레나나 세네카가 나한테 반하는 건 이유가 있었고, 마리암은… 나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남자가 취향이겠지.
근데 얘는?
오히려 최악의 첫 만남이었는데.
심지어 잘 들여다보니 눈동자에 담긴 건 연정이라기엔 너무 순수했다.
마치 종교인이 제 우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호의라는 건 자명했다. 잠시 말을 고르다가 젖혔던 고개를 떨궜다.
"…뭐, 그러세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그녀는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 부드러운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열심히 주물렀다.
"…흡."
이 새끼 개좆밥이네.
주무르는 힘이 강하지도 않고, 심지어 본인이 힘든지 숨이 거셌다.
즉, 그렇게 잘하진 못했다. 겨울의 신부한테 안마를 받으면 기분도 좋고 몸도 개운해지고 최고인데.
하지만 샤론의 손을 무르지는 않았다. 낑낑대면서 애쓰고 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다지 단련하지 않는 건지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에 문대졌고, 주무를 때마다 은은한 체온을 타고 옅은 체향이 퍼졌다.
향수인가?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 없는 향기에 섞인 여체 특유의 보드라운 냄새가 풍겼다.
그래서 서류 작업을 하면서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얘가 나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굴 요소가 있었나?
이 도시의 실권은 사실상 세레나가 쥐고 있었지만,그 실권은 실상 나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이 도시의 왕이자 여름의 대전사고, 동시에 여름 그 본인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으니.
그래서 얘가 나한테 잘 보여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해도 이새끼의 소망에 닿을 일은 전혀 없어보였다.
얘가 나한테 환심을 사서, 내가측근들한테 딱 봐도 얘랑 관련된 것 같은 걸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들어줄지부터가 미지수였다.
…근데 왜 내 어깨를 저렇게 낑낑대면서 주무르고 있지?
"…끄."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뭐 잘못 먹었습니까?"
한창 낑낑대며 내 어깨를 주물러대던 방광좆밥은, 내 질문에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고는 땀 한 방울 흘러내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티났나?"
"네."
샤론은 멋쩍은지 내 어깨에 손을 걸친 채로 숨을 골랐다.
"이번 초대, 짐도 데려가줄 수 있겠나?"
"…예? 뭔 초대… 아."
살로메가 마법적으로 안전한지 확인해보겠다며 가져간, 보스몹이 보내온 초대장이 떠올랐다.
그 처리가 끝나면 초대에 응하던지 말던지를 정하기로 했었지. 새삼 떠올랐다.
살로메가 언뜻 보기에 초대장에 걸려있는 마법은 텔레포트의 일종인 것 같았고, 동시에 소수의 인원만이 이용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도시의 수뇌부는 며칠 전부터 누가 나와 동행해서 초대에 응할 것인가, 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얘는 그 중일부를 고작 자기의 좆밥 악력으로 해준 안마로 퉁치려고 했다.
어딜.
"전하의 좆밥스러움과 행정적 쓸모를 감안한다면 여기 남아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샤론은 내 말을 예상했다는 듯 막힘 없이 술술,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다. 그레이톰 성주는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사람이더군. 짐이 공석이더라도 그녀는 문제 없이 도시를 다스릴 거다."
하긴, 걔가 유능하긴 하지.
근데 내가 가는 곳은 게임에서는 보스였던 새끼가 초대하는 곳이다. 얼핏 보더라도 전투 능력이 없으면 안 가는 게 맞았다.
겨울의 신부도 동행하지 못하는데, 그녀보다 완력은 10배 이상은 낮을 일반인 여성을 내가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의문을 담아 샤론에게 말을 하니, 샤론은 그 말 역시 예상했는지 웃었다.
"방해 안되게 최대한 대전사의 뒤에 있겠지만, 위기에 빠진다면 버려도 괜찮아. 짐이 허락하지."
…내가 그렇게 개새끼는 아닌데.
내 불편한 표정을 보더니 샤론이 덧붙이며 웃었다.
"게다가, 짐을 데려가서 손해만 보진 않을 거다. 짐은 왕국에서 여왕으로 키워졌고, 예절에 능통하지.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는 꿰고 있다. 짐의 보필이 있다면 대전사에게 정치적 위기는 없을 거다."
애초에 나한테 정치적 위기라는 게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왕이 워낙 당당하게 말하는지라 솔직 고민됐다.
확실히, 보스몹 새끼가 친근하게 나온다면 굳이 잡을 이유가 없긴하다. 그렇다면 샤론의 도움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보스새끼가 나한테 적대적이지 않다는 전제 하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샤론은 그 자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러죠."
"…엇, 진짜?"
샤론은 내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
살로메가 해석한 결과, 초대장에 걸린 마법은 간단했다.
최대 3인의 순간이동 기능.
끝.
그게 전부라는 게 믿기진 않았고, 그래서 결국 초대장을 뜯어봤다. 뜯어진 초대장에는 다른 다크 판타지인들은 물론이고 메이 역시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써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어내렸다.
내용은 심플했다.
"제 무용을 전해듣고 인상 깊어서 초대하고 싶답니다."
"…흐음, 수상한데."
이제는 머리가 좀 자라난 산적 두목은 그렇게 말하며 의수로 제 턱을 긁었고, 세레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걱정을 읽지 못할 것도 없어서, 살로메에게 물었다.
"이거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건 맞습니까?"
물론 모른다고 하면 안 갈 거긴 한데.
"예, 안전한 곳일 겁니다. 붉은 어머니께서는 강대한 마법사이니, 설령 대전사님을 해치려는 뜻이 있다면 진즉 하셨을 겁니다."
붉은 어머니가 어떤 보스몹인지는 잘 알고 있어서, 살로메의 말은 사리에 맞아보였다.
게다가적혀져 있는 글귀로 짐작해보건데, 나한테 그다지 적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보통 이렇게 적은 새끼들이 막상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존나 많은 영화와 게임에서 그랬었던 걸 감안하면,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럼 가긴 가겠지만… 무장이 문제군요."
꿍꿍이 속이 있을지도 모르고, 저 장소가 완전히 안전하다는 확신은 없었으니, 비무장으로 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내가 존나 센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아이템을 두고 다닐 정도로 초월적으로 강한 건 아니었다.
심지어 초대장을 보낸 새끼는 보스 몬스터. 어쩌면 나에게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보스였다.
"음, 대전사. 무장을 하고 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싶은데."
샤론이 내 말을 받고 나는 거기에 반문했다.
"비무장은 위험하기도 하고, 전 대전사입니다. 대전사가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당연하죠."
여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었다.
"그럼 경무장, 필요한 무구만 챙기지."
"대충 어느 정도로요?"
"일단 그 큼직한 칼은 안되겠고, 판금갑주도 안돼."
하긴, 폭군의 검 갖고 가는 건 좀 그렇긴 했다.
나는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을 끌러내어 겨울의 신부에게 건넸다. 그녀는 베일 속에서 표정을 숨긴 채로 그걸 받아들고 내 갑옷을 풀어주었다.
안에 입은 사슬 갑주와 망토만 남았을 적, 여왕은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짐이 보기엔 사슬 갑주 상의에 간단한 외투, 화려한 장화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대전사는 어떻게 생각하지?"
"뭐… 여자가 옷 맞춰주는데 뭐라고 하면 개새끼죠."
샤론이 피식 웃고는 제 하인을 시켜 옷을 가져오게 시키는 동안 나는 사슬 갑주에 내 생각을 밀어넣었다. 내 사슬 갑주 하의는 상의 속으로 스멀거리며 말려들어갔다.
"그거 참 신기한 유물인데…."
산적이 놀라워했고,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원한다면 장신구에 준하는 상태로 입고 있을 수도 있었고, 원래의 형태인 전신을 뒤덮는 사슬 갑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즉, 이런 상황에 가장 최적화된 아이템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는 샤론의 하인들이 가져온 허리까지만 내려오는 외투가 둘러지고 화려한 장화를 신겨졌다. 박차는 그 위에 매달렸다. 마지막으로 외투 위에 마리암이 내어줬던 붉은 망토를 둘렀다.
"무기는 그정도면 충분하겠지?"
"아, 그렇죠 뭐."
그레이톰의 심판과 여름의도살자가 사용하던 도끼, 낙인.
이렇게 두 자루만 있어도 어느 정도 자기 방위는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메이는 평소에 쓰던 방패는 없이 적조만 메었고, 그 위로 레크노미어 가의 비보라던 갑주를 둘렀다. 서클렛은 덤이었다. 그다지 위협적인 차림이 아니라 괜찮은 모양이었다.
부럽네, 씨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차려입은 나와 메이, 여왕은 모여서 방 한 가운데에 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도시를 잘 부탁해요."
"물론이죠. 현성씨가 다녀올 때까지 잘 돌보고 있을테니, 금방 돌아오기예요?"
세레나는 그렇게 나를배웅했고, 겨울의 신부는 내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놓았다.
"…근데 이거 어떻게 쓰죠?"
"그냥 찢으시면 됩니다, 대전사님."
아하.
나는 살로메의 말에 따라 초대장을 양손으로 쥐었고, 메이가 내 옆에 딱 붙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메이의 눈을 보면서 나는 씩 웃었다.
"그거 아냐? 텔레포트해서 네 양자 구조가 바뀌면 사실 물리적으로 진짜 너는 텔레포트할 때 죽는 거라는 걸."
어디 SF 잡지에서 읽었던 얘기였는데, 금시초문인지 메이는 그 큰 눈망울을 더 크게 뜨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심지어 내 옆구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마…."
귀여운 년.
나는 초대장을 찢었다.
찢어진 종이 사이로 머릿가죽을 들썩이게 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퍼져나가더니, 그 감각이 내 전신을 타고 내 손을 잡은 여왕과 옆구리를 잡은 메이에게 퍼져나갔다.
파형 무늬를 띄는 기묘한 빛이 나타나고, 그 빛이 우리를 휘감는다고 느낀 순간.
투확!
물을 쏟아내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빠르게 변했다.
"…오."
높이 솟은 탑과 무수한 민가, 왁자지껄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손에 들려진 작은 등불과 횃불.
와, 세상이 씹창이 났는데 여기는 멀쩡해 보이네.
그야말로 중세 판타지의 표본이라고 할 수있을 강렬한 모습을 보면서 놀라워 하자, 메이와 여왕 역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서오십시오, 여름의 대전사님."
그때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백골로 만들어진 가면을 빗겨 쓴, 고풍스러운 미녀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꼬리가 바닥을 두들겼다.
"…누구십니까?"
누군지 알지만, 직접 물어봐야 성이 찰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질문에 의외는 아니라는 듯, 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끌어내려 쥐었다.
붉은 비늘이 그녀의 피부 위에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붉은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그녀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대전사 당신께서는 저를, 헤로디아라고 불러주시길."
이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대인은, 그렇게 나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