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87/274)



〈 87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이 게임에는 3대 마망이라는  있다.
이 게임에서 가장 모성애가 짙으며 안기고 싶은 존재를 추린 거라는데, 실상 이상성욕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목록의 첫번째가 늪지의 요람인 것만 봐도.
그런데  목록에서 유일하게 진정성 있게 자리한 존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내  앞에 있는 존재였다.
기다란 꼬리는 짙은 붉은빛으로 번들거리고, 피부 곳곳에는 비늘이 붙어있는 마치 용과 인간을 섞은 것 같은 비쥬얼의 존재.


붉은 어머니, 헤로디아.

지역의 보스라고 할 수 있을 고대인이었다.
나를 초대한 그 장신의 미녀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저를 잘 알고 계신가 보군요."
"예에… 모를 수가 없지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롱불에 은은하게 번들거렸고, 그녀는  입술로 호선을 그려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옳지, 걸렸다. 피식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렇습니까? 세상이 씹창이 나서 소식통은 커녕 엇비슷한 것도 구할  없을텐데요."

헤로디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말을 안 하냐고 다그치려는데, 그녀는 웃는 낯짝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어떤 존재인지는… 짐작하고 계시지 않나요? 대전사께서 생각하시는 그대로랍니다. 그러니… 대전사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요…."


이 씨발년.
절로 내 눈가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새끼랑은 기싸움이 의미가 없으리라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런 타입은 존나게 불편했다. 여유로운 태도하며, 읽을 수 없는 표정까지.
의미 없는 기싸움을 포기했다. 그러자 붉은 애미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내가 재빠르게 불편한 기색을 숨긴 것에 놀란 건지, 아니면 내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눈치챈 것에 놀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헤로디아가 내게 다가오려는 걸, 손을 내밀어 저지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초대했습니까?"

 초대장은 정확히 나를 겨냥한 거였다.
'사막의 포식자'를 쳐죽인 순간 떨어진 초대장에는 눈 앞의 썅년이 사용하는 녀석의 마력이 깃들어 있었고, 그 마력은 마찬가지로 그 드래곤의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미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마법 특유의 감각이전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사막의 포식자와 초대장에서 느껴지던 것과 같았다.

"아들의 복수라도 하려는 겁니까?"

내가 그 세로동공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자, 헤로디아는 흥미롭다는 모습으로 가면을 빗겨썼다. 그리고 곧장 비어버린 손으로 제 하관을 더듬었다. 그 동작에 담긴 미묘한 색기에도 나는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복수라니요. 그럴리가요. 초대장은 안 읽어보셨나요?"

흘리는 웃음 소리에서는 달뜬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고혹적이고, 나의 무엇을 원하는지 훤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즐거움.
그게 존나게 불편했다.

"아뇨, 읽어봤습니다.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뭐냐고 묻는 거죠."


내 날카로운 태도에도 헤로디아는 안색을 붉히거나 표정을 찌푸리지 않았다. 단지 흥미롭다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그녀는 제 하관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손을 두른 장갑 위로도 비늘의 흔적이 있었다.

"그대로랍니다. 당신의 무용이 놀라워 불렀죠. 그 아이는 제가 낳은 아이들 중에서도  피를진하게 이어받은 강한 아이였거든요. 비록 그 두뇌가 제 기대에 못 미쳤지만요."

 드래곤은 유물을 찾고 있었다. 지금 내가 몸에 두르고 있는 검은 사슬 갑옷을.
그럼 이 썅년이 보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이 썅년이 이 유물을 노리는 거라고 봐야할텐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목적을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뭘 할 수는 없었다.


"…그러시군요."


내 미심쩍은 눈길에도 헤로디아는 그 세로동공으로 내 눈에 제 눈을 맞추기만 할 뿐, 별 다른 행동이나 마력을 운용하는 기색은 없었다.
진짜 그것만 있는 건 아닐텐데,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니 내가  해낼 수는 없었다.


하긴, 이 새끼랑 눈싸움 해봤자 의미가 없지.
나는 물러섰고, 눈을 깜빡였다.
헤로디아는 그런 내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아 들어올리는 인사를 하고는 웃었다.


"마음껏 관광하시고 내성으로 와주시길. 귀한 손님에게 대접 하나 해주지 못하고 보내는 건 실례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겼고, 그녀가 서있던 공간이 유리처럼 쩌적하고 갈라지더니.

"…씨발."


사라졌다.
그 공간의 균열도,헤로디아의 존재도.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서 은은히 감도는 짙은 향수의 냄새에서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으, 좀 무서워."

메이는 그런 내게  달라붙으며 헤로디아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나 역시 드물게 메이에게 동의했다.
나는 저런 타입은 익숙하지 않았다. 속내를 읽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수싸움은 커녕 뭘 하고 싶은 건지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래 미지는 공포로 다가오는 법이다.

괜히 흐트러졌던 숨을 가다듬고는 메이와 여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관광이나 합시다."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

도시인지 마을인지, 아니면 영지인지.
뭐라고 구분할 수 없는 주거시설과 군사시설, 상업시설의 복합적인 구성을 가로지르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건물들을 구경했다.
건물들은 중세 유럽이라기 보다는 약간 더 나아가, 르네상스에 준하는 수준으로 되어있었다.

그런 르네상스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초저녁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서로에게 안부를 묻거나, 물건을 사거나 추파를 던지거나 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우리에게 절대 접근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뭔가 이상하구나. 짐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샤론은 곤란한 낯을 띄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안 그러겠냐. 괜히 내 안색을 살피는 샤론에게 눈가를 찡그려주고는 그들 앞에서 걸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상인이 은은한 공포에 사로잡혀 다른 상인에게 열심히 개소리를 해댔고, 그 상인 역시 내 눈치를 보고는 서로 쓸데없는 신변잡기를 주고 받았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두려움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 쯤은 쉬이 짐작할  있었다.

야만부족을 처음 들렸을 때의경계심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이 느낀 건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였지, 나로 인해 말미암을 무언가에 대한공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새끼들의 공포는  손에 쥐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실마리를 잡지도 못한 채 높이 걸린 등불들 사이로 걸음을 재촉했다.
생동감이 적고, 무언가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 마치 이렇게 행동하도록 짜여진 인형처럼 구는 모습.

붉은 어머니의 강함을 생각하면 이상하진 않은데… 굳이 이럴 필요가있나?


내 상념 사이로 무언가 파고 들었다. 그 파고든 것은 정확히  손에무언가를 들려주고 사라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멍청한 소리를 내며 내 손을 바라보는 메이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기만 하는 여왕을 슬쩍 보고는 그들 뒤에서 멀어지는 사람을 보았다.

"두루마리…?"


메이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으나 굳이 그 말이 맞다며 굳이 긍정해주지 않았다.
이건  뭔 수작질이야.
살다살다 처음 당해보는 소매넣기라서,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여왕과 메이에게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고는 골목길을 향해 걸었다.

주거와 주거 사이, 길게 뻗은 골목에 들어선 내게 의문을 표하며 바라보는 두 멍청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왜 그래? 그건 또 뭐고?"
"그런 물건을 가져오는 건 못 봤는데, 짐에게 숨기고 가져온 것이냐?"


메이는 그렇다치는데, 너까지?
내가 여왕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여왕은 멋쩍게 뺨을 긁었다.

"어떤 새끼가 내 손에 쥐어주고 갔어."
"…응?"


메이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의문스러워 했다. 괜히 실망스러워 그런 메이의코를 붙잡고서 말을 이었다.

"보나마나 편지인 거 같은데,  붉은 느금마인지 뭔지와 관련해서 나랑 얘기를 나누고 싶은 누군가겠지."

첩보 영화를 많이  편은 아니었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도시에서 암약하는 어둠의 세력 같은 게 접근하는 법이다.
한창 놔달라며 찡찡대는 메이의 코를 잡아당기면서 두루마리를 풀었다.

"자, 어디 보―"


퍼어어어어어어어엉!

"구와아아아아아악!"

이 씨발 좆같은 테러리스트 새끼들! 두루마리에 IED를!
터져나오는 빛을 피하려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겨눠지는 쇠뇌에 반응할  없었다.

철컥


내 머릿가죽을 들썩이게 만드는, 그렇지만 마력과는 다른 종류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조심스럽게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니 몇 개의 쇠뇌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씨발."


여왕은 뒤늦게 눈을 뜨고는 쇠뇌들을 보고 당황하기 시작했고, 메이는 익숙하게 방패를 꺼내려다가 옆구리가 비어있음을 깨닫고는 낯빛이 식었다.
이미 칼을꺼내기엔 너무 늦었다. 사슬 갑주를 전신에 두른다고 하더라도 늦고.


"초대해놓고 이 지랄하는  너무 개새끼 아니냐?"

손을 천천히 올리면서 그렇게 말하니, 그 쇠뇌를 든 몇 명의 사람들 사이로 한 명이 걸어나왔다. 로브를 두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무기를 내려라."


왠지 중후하지만 칙칙한 음성이었다.
 새끼가 머리인가?
쇠뇌를 들고 있던 놈들이 별  없이 무기를 내리고는 쇠뇌에 걸려있던 볼트를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새끼를 노려보면서 침을 삼켰다.


"…넌 뭐하는 새끼냐?"
"인사가 늦었군요. 여름의 대전사시여."

그 중후한 목소리가그렇게 말하는가 싶더니 손이 로브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건 해골 손이었다.
…잠깐, 씨발. 감탄사 못 참는데.
내 시덥잖은 생각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 해골 손이 로브의 후드를 젖혔다.

"와, 해골!"
"…그렇습니다, 망령이죠."


그 해골은 훤하게 드러난, 왠지 잘 장식된 두개골을 내게 향한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망령이라고 지칭한 해골은  감탄사를 신경 쓰지 않는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바라봤다는 말도  아닌가? 눈알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그녀와 협력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해악만 될 겁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엔 너무 뻔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해골은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굳었다가 말했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오신 겁니까?"


해골의 표정은 읽히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명확한 당황이 섞여 있었다.
혹시 붉은 느금마가 게임에서랑은 다를까봐 왔다고는  수 없었다.

"자신이 넘쳐서 주체가 안되거든요."


그래서 개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해골은 별로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제 턱을 쓸었다.
어디서 본 버릇인데.

"하기야… 대전사님의 무용이 들려오는 것의 절반만 되더라도 문제 될 건 없겠군요."


 해골은 잠시 조용하더니 내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 도시의 마지막 시민군을 이끄는 인물이자…."


 차가운 상아색 해골 위로 언뜻 자부심이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발데가리아의 대공이며  영원한 수호자. 대전사님의 동맹을 자처하고 싶은 망령이자, 붉은 어머니의 첫번째 제자. 그리고 그녀의 첫번째 남편인."

 말과 동시에 어둑했던 벽들 사이로 빛이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빛은 적색을 띄고 있었다.
메이의 마법과 같은 빛깔이었다.

"오시스 레일  발데가리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법은 뚜렷한 색으로 그 해골을 휘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