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시민군이라.
그 어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이렇게 얼추 보기에도 행복도가 밑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을 것만 같은 국가라면 당연히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반동 세력 같은 것도 있겠거니 했다.
문제가 있다면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하는 거였다.
나는 내게 붉게 변한 해골 손을 내어보이는 뭐시기 대공을 빤히 바라보니, 그 해골은 의아한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아, 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제가 그만 버릇대로 해버렸군요. 대전사시라면 저따위 보다는 한참 위일텐데…."
그 공손함 위로 마력이 산산히 흩어졌고, 그 해골을 휘감았던 붉은 기운 역시 사라졌다.
그 붉은 기운은 역시 다시 느껴보아도 메이와 같은 종류의 마력으로 보였다.
살로메가 메이에게 가르쳤고, 살로메는 건너건너로 붉은 어머니에게서 마법을 사사받았다고 했었으니….
어떻게 보면 사문이라고 할 수 있을 존재에게 메이는 경계와 놀라움 섞인 눈빛을 보냈다.
"여름의 대전사이자 고대의 도시를 다스리는 왕, 주현성입니다."
아, 저 표정!
내 이름을 듣고는 어떻게 발음해야할지 고민하는 저 표정!
어째 다크 판타지 새끼들은 다 내 이름을 듣고는 한 번 정도는 저런 반응을 내보였고, 거기에는 겨울의 신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었다.
결국 그 해골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숙이고 있었던 허리를 세웠다.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대전사시여.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할 말은 다 했던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뭐 말할 거 있으면 말하라는 듯 나는 손을 내저었고, 그에 해골은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도시, 발데가리아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여기 이름이 발데가리아였어?
나는 좆도 모르는 이름이라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여왕 샤론이 내게 다가와 귓전에 속삭였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이도시는 고대의 도시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철저한 방비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드래곤의 선조 격이라고 할 수 있을 붉은 어머니가 그 땅을 수호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의문도 생겨났다. 게임에서는 나름 보스였던 붉은 어머니가 여기서는 왜 도시를 수호하고 있고, 얘네는 왜 그 수호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꾸린 건지.
"얼추 듣기만 했습니다. 몇 가지 의문이 생기는 점도 있고요."
"그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겠군요."
그 해골바가지가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얼핏 보기에도 하수구처럼 보이는 벽과 천장에 붉은 마력이 줄줄이 흐르더니, 그대로 그 위에 무언가 피어났다. 피어나는 형상은 꽃봉오리처럼 퍼져나가면서 어떤 상을 그려냈는데, 그건 얼추 보기에도 도시처럼 생겼다.
"이 도시는 붉은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오호, 수호가 아니라 착취라.
"수호받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탓에 온갖 괴물들로부터 도시를 온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물론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세간에는?
이미 세상이 씹창나서 사회랄 거는 고대의 도시 정도 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내 의구심은 표정에 드러났고, 그에 해골은 도시의 약도를 뼈가 훤히 드러난 손가락으로 훑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예?"
뭔 개소리야, 멀쩡한 국가가 어딨다고.
나는 따지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해골이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아니, 저걸 말이라고 할 수 있나?
"멸망한 건 이 대륙 뿐… 이 거친 바다 너머에는 아직 문명이 존재합니다."
바다 너머라는 말은 얼추 낙관주의자의 개소리처럼 들렸다.
"믿지 못하시는 얼굴이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해골은 나를 타일렀고, 나는 그에 더 들어보기로 생각하고는 입을 닫았다.
"야만족보다 더 야만적이지만 그만큼 강맹한 서대륙의 용자들이 이 도시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겨울의 폭군을 섬기죠. 그들은 역사서에서도 몇 번 밖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등장할 때마다 역사에 굵은 족적을 남기고 사라졌죠."
신의 자손?
그게 존나 허황된 소리라는건 차치하고, 겨울의 폭군을 섬긴다는 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들 중 일부도 이 도시에 체류하고 있으니, 시간이 나면 한 번 만나보시죠. 운이 좋다면 그들을 따라 매복이나 약탈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잠깐, 매복이나 약탈?
나는 그제서야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고, 누군가가 떠올랐다.
게임에서는 고대의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놈이었는데, 이 망할 놈의 세상에서는 이 도시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매복 및 결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지정된 NPC에게 말을 걸어 큐를 잡아야 했는데, 그걸 주관하는 NPC는 전형적인 바이킹스러운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결투와 매복의 보상 역시 담당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겨울의 처녀 다음으로 익숙한 놈이었는데….
"왠지 찾아도 안 나온다 싶었더만…."
내 혼잣말에 해골이 의아한지 고개를 기울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어야 했다.
왠지 고대의 도시에 없더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해골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근데 그게 뭔 상관입니까? 여전히 이 대륙이 씹창이고 이 도시가 자리한 곳도 씹창난 대륙인데요."
"입이 거치시군요. 지금부터 설명할 참입니다."
해골의 손이 몇 번 휘저어지니, 벽에 그려진 도시의 그림이 지도 같은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 겨울의 폭군을 섬기는 야만민족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게도 모든 괴물들이 그들이 사는 곳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그 서리를 두려워 한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괴물들은 그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마친 해골은 나를 마주보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나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는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뭔 소린지 못 알아들은 건 나 뿐만이 아닌지 일행은 침묵했다.
"한 마디로… 그 야만민족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저희는 괴물들이 공격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저희의 도시에 무의미한 수호를 하며 제 야망을 부풀리고 있는 건 붉은 어머니, 그녀입니다."
아하, 그런 얘기구만.
"근데… 외지인에다 아예 부외자인 제가 듣기로는 개소리에 허황된 음모론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이는데요. 근거라던가 그런 건 있습니까?"
해골은 그 말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뭔지 알 수 없는 거울이었는데, 거울답지 않게 그걸 바라보는 나를 비춰주는 게 아닌 뭔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 공간에는 수십의 남자들이 매달린 채로 정체불명의 액체와 생명체에 뒤덮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그녀가 벌이고 있는 짓입니다. 그녀는 이 도시로 유명한 영웅들을 불러내어 유혹하고, 그들의 생명력과 영혼을 빨아내어 본인의 양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양분으로 뭘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뭔데 씹덕아.
다시 팔짱을 끼고 노려보자 그에 마법사 해골이 허허 웃었다.
"그 이빨 다 뽑아버리기 전에 말이나 하십시오. 짜증날라고 하니까."
"…그녀는 당신을 마지막으로 강대한 영혼과 생명력을 빼앗아 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로 세상을 뒤덮으려는 야욕을 갖고 있죠."
오… 그건 몰랐는데.
게임에서도 워낙 뜬금 없이 싸웠던 터라 왜 그런지는 몰랐는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갔다.
이래뵈도 겨울의 해방자는 초인이 아닌가. 그 강대한 생명력과 영혼이라면 분명히 특식이라고 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신이 어떻게 된다는 건지, 그게 존나 허황되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저 역시 원래는 살과 거죽으로 뒤덮인 멀쩡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야욕에 휩쓸려 이런 꼴이 되었죠. 제 몸을 지금 유지할 수 있는 건 제가 익힌 마법 덕입니다."
그렇게 말을 끝마친 해골 마법사는 품으로 다시 거울을 밀어넣었다.
"더 길게 잡아뒀다가는 그녀도 이상하게 생각할테니 슬슬 돌아가셔야 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 대답해주십시오."
그 해골은 팔짱을 끼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 어둑한 눈구멍에서 언뜻 정의감 같은 게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그렇게 보이기만 했다.
"저희를 도와서 그녀를 무찔러 주십시오."
그리고 해골은 마침내 입을 닫았다.
솔직히 나쁠 거 없는 제안이다. 그 붉은 느금마가 나를 노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떻든 간에 내가 이 도시를 떠나는 걸그냥 둘리도 없을테고.
하지만 가장 걸리는 게, 내가 얻는 게 없다는 거다.
"도와주시면 뭘 주실 수 있죠?"
"…예?"
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영웅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편의점 점장겸 고인물일 뿐이지, 나에게 이득이 없는 한 굳이 도울 이유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메이와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턱을 쓸었고, 해골은 제 이마를 쓸면서 고민했다.
"…거기 당신."
해골이 가리키는 곳에는 메이가 있었다.
메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와 같은 마법 학파인 것 같은데… 제가 마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전사께서도 본인의 총애하는 이가 마법에 더 능란해지면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메이는 그 말에 놀란 듯 손가락을 꼼질거렸고, 그 꼼질거림은 붙잡힌 내손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마법적 성취가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르는 것 같은데… 붉은 주문의 대가인 제가 도와준다면 당신 역시 대가에 준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메이는 그 큼직한 눈에 걱정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확실히, 메이의 마법은 여전히 쓸만하긴 했지만 그건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 여전히 메이는 한 플레이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끄덕이고는 내밀어진 해골의 손을 붙잡았다.
촉감은 좆같았다.
"좋습니다."
그제서야 해골은 안도했는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폐도 성대도 없으니 의미가없지만,살아있을 적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슬슬 그녀의 의심이 짙어질테니 돌아가십시오. 부디 돌아가셔서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최대한 대접에 응해주십시오."
그의 손아귀에서 붉은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우리는 눈 한 번 끔뻑이기도 전에 아까의 골목에 서있었다.
"…그거 참 빠르네."
그와 동시에 내 머릿가죽이 들썩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불쾌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붉은 어머니의 감시라는 그거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감시하는 새끼한테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자. 좀 쉬고 싶네."
*
고대의 도시 역시 시설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압도적인 수준이다.
절대 다른 곳에 비하자면 딸리지 않았다.
물을 덥힐 수 있는 보일러에 준하는 시설, 냉방 기능은 없지만 완비된 난방 기능.
이미 지어진 돌로 된 주거들은 튼튼하기로는 나무로 지어진 집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높았고, 공간 효율도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좀 아쉽기 마련이다.
특히 목욕통이라고 방수 처리된 큼직한 나무통에 뜨끈한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해야할 때는 더더욱.
다크 판타지가 익숙해지고 있는 시점이라지만 아쉬울 수 밖에 없어서, 나는 언제나 대리석이나 하다 못해 금속으로 된 욕조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왔었다.
"…으어, 살맛 나네."
그런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건, 이 도시에서 밖에서는 찾을 수 없을 시설이었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욕조에 가득 따라진, 깨끗한 덥혀진 물.
찰랑이는 물이 내 가슴팍을 적시고, 나는 대리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짙은 숨을 뱉었다.
물론 붉은 어머니가 나를 노린다는 걸 안 이상 여유롭게 있는 건 독일 수도 있지만, 그 대공인지 뭔지 하는 해골 마법사는 나에게 대접에 응하라고 했으니, 나는 어쩔 수 없다며 웃으면서 몸을 뜨뜻하게 지졌다.
이런 대접이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겠는데.
그때, 내가 들어와있는 욕실의 문이 열렸다.큼직한 나무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흘러들었다.
시종인가?
"…엉?"
"…."
뭐 와인이라던가, 아니면 주전부리라도 가져온 시종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그 자리에 서있는 건 메이였다.
가운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큼직한 가슴의 절반 정도는 드러나 있었고, 그런만큼 조금만 가운이 내려가면 음탕한 유두가 눈에 보일 것만 같았다.
미니스커트처럼 허벅지 조금 아래까지만 덮여진 밑단 역시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얘가 왜 여기에 있냐?
내 의문은 좆까라는 듯, 메이가 총총걸음으로 욕조로 다가왔다.
"메이?"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에 몸을 밀어넣었고, 넓찍한 욕조인 탓에 메이는 아무런 방해 없이 나와 같은 욕조에 몸을 담궜다.
그러자 수건이나 다름 없는 가운이 젖어들어가면서 언뜻 핑크색의 유륜이 가운 위로 드러났다.
눈을 떨구면 다른 핑크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보지 마아…."
메이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가슴팍을 팔로 감쌌고, 그 탓에 눌린 가슴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반 정도는 섰다.
그렇게 서버린 자지를 손으로 꾹 눌러 애써 감추자 메이는 그런 나를 흘긋 대면서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