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우린 망했어… 망했다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며 혼란스러워 했다.
그들의 몸에는 단단한 철갑이 둘러져있고, 손에는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잘 만들어진 장병기가 자리하고 있다.
심지어 허리춤에는 짧은 소검과작은 방패가 달려있어 설령 무기가 파손되거나 잃어버리더라도 문제 없이 전투를 속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의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풍선처럼 부풀어 그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질량에 눌린 이들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돌렸다.
"히익…!"
그때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한참 멀리, 저만치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그 소리가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 잘알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대문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 소리가 들리고는 문에 무언가 강하게 부딪혔다.
쿠웅!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 했던 병사들은 그 소음에찍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단지 겁에 질려, 이 상황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랐다.
"흐억, 헉, 닫아! 닫아!!!"
한참간 무기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던 대문이 벌컥 열리고, 어떤 병사가 부리나케 들어왔다.
그제서야 병사들은 바깥을 조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섬기는 인물은 유력한 상인이자 뛰어난 수완을 가진 사업가로, 바다 위를 유랑하는 용병 사업에 투자하여 상선들을 보호하며 쏠쏠한 이득을 챙기던 인물이었다.
그런만큼 그가 지은 저택의 대문은 특수한금속으로 지어져있었다.
제 아무리 마차만한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단번에는 부수지 못할, 강철목과 태양강철로 만들어진 대문.
그 대문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다시 닫혀버린 저택의 정문을 보면서 불안해했다.
과연 이런, 단순한 나무로 지어진 문이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은 빠르게 판단했고, 제 주인이 명령하기도 전에 온갖 가구를 뜯어다 정문까지 끌어왔다. 평소라면 나오지 않을 힘까지 나왔다. 화재 상황에서의 괴력이라고 할만했다.
"빨리, 빨리 막아! 씨발, 그 괴물 새끼 오기 전에 빨리!"
밖에서 뛰쳐들어왔던 병사는 뭘봤는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면서 제 동료들을 재촉했고, 나아가 딱 봐도 비싸보이는 장식된 갑주나 무구들 역시 바리케이트에 합류시켰다.
그게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그 안에 있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단지 겁에 질려서, 이제는 그 괴물이 사라졌으면 하고 간신히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가구를 전부 끌어다놓고 장병기를 들어올렸다.
"…씨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읊조리자, 다른 병사들에게 그 불안은 전염되었다.
아니면 애초부터 그랬던가.
그들은 각기 섬기는 신, 어머니, 그저께 따먹었던 창녀의 이름, 고향의 친구의 이름을 외우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그 중 누구도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오직 한 명, 재앙의 어머니만을 제외하고.
그들에게도 재앙이 도래했다.
주현성이라는 재앙이었다.
―쿠웅!
그 소음은 분명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지만, 저택 전체가 뒤흔들렸다.
몇명은 고개를 숙였고, 몇명은 숨을 삼키며 무기를 문에다 겨눴다.
그 괴물은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이다. 인간의 시도가 무용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소음이 잦아들고, 진동 역시 잦아들자 병사들은 의문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기이하게도 조용했던 까닭이다.
"…가, 간 건가?"
혹시 모른다. 더 이상 제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떠난 건지도.
병사들 중 몇은 낙관적인 생각을, 나머지는 비관적인 생각을 해냈다.
마른 침을 삼키고, 목울대가 꿀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눈물마저 찔끔 흘리고, 이마에서 구슬땀을 떨어트릴 쯤이 되어서야, 주현성은 행동을 개시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경첩, 손잡이, 문을 간단한 조작만으로 개폐하게 해주는 기계장치, 가구들, 가구에 다가서던 병사들까지.
박살나 쏘아지는 문에 휘말려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이들은 빠르게 기절했고, 다른 병사들은 침을 삼키며 그 문 너머의 존재를 보았다.
전신에 두른 검은 사슬이 군데군데 보이고, 그 사슬 갑주 위로 언뜻 평범해보이는 순백의 판금 갑주를 두른 전사. 그런 갑주 사이로 검은 연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위압적인 풍모.
그 전사가 가면 같은 면갑 속에서 눈을 굴렸고, 병사들은 주춤주춤 물러설 뿐 달려들지 못했다.
그 손에 들려진 칼날은 빛나고 있었다. 회백색으로 명확하게 빛나고 있어, 병사들은 저 전사가 자신들과는 급이 다른 존재라는 걸 빠르게 자각했다.
강력한 마법사이자 한 때 어떤 지방의 토호였고, 한 편으로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상인인 남자, 텔리네오 준작은 눈쌀을 찌푸리며 병사들을 바라봤다.
이 병사들은 해적과 겨뤄본 적도 있었다. 이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겨울을 섬기는 대륙 너머의 전사들은 물론이고, 온갖 잡적들이나 괴물 역시 상대해본 경험도 있는 나름의 정예병이었다.
이들이 도망가지 않은 건 그런 성공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준작은 병사들이 절대 달려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저 전사가 먼저 대놓고 빈틈을 내보이거나, 전부 죽이려고 들지 않는 이상.
'머리를 쓰는군. 성가셔.'
준작은 혀를 찼다.
전사가 무식하다는 건 잘못된 상식이다. 강하고 오래 살아남는 전사일 수록 지적 능력은 뛰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주시하면서도병사들이 접근하지 못할 거리를 선점하는 전사를 보면서 혀를 찼다.
영리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준작은 품에 있는 마법 도구를 꺼내지 못했다. 그걸 꺼내는 순간 균형이 무너지고, 딱 봐도 저 어마어마해 보이는 근력으로 접근한다면 자신은 바로 죽을테니까.
숨을 고르고 있자니, 그 전사가 그를 바라보면서 왼손으로 허리춤을 짚었다. 거기에는 화려한 양식의 도끼가 있었다.
지금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의식이 도끼에 쏠린 사이, 준작이라면 그 사이에 마법을 만들어내 쏠 수 있었다.
그래서 준작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머릿가죽을 들썩이게 하는 기묘한 힘의 기류가 그를 휘감았고, 그가 손을 뻗어내자 보라색 광선이.
즈컥!
쏘아지지 않았다.
그는 선명한 절단음과 함께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는 제 팔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본 것은 간단했다. 그 전사가 검은 안개를 뿜어내면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아주 잠시 회백색 섬광이 달려들었다.
그 다음에는 보는대로, 잘려나간 팔이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크."
그가 무릎을 꿇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준작의 목에 검날이 들이대졌다. 회백색으로 타오르는 검날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피가 푸슉 솟았다. 솟아난 피가 바닥에 깔린 화려한 양탄자를 더럽혔다. 끈적한 피가 들러붙은 양탄자는 눅눅해져 바닥에 들러붙었다.
준작은 그 상태로 마법을 쓰려고 했다. 팔이 잘렸지만 아직 마법은 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력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그가 어떤 심상을, 어떤 계산을 해내도 마력은 요동치기만 했다. 마치 코르크 마개에 잘 막혀버린 와인병처럼, 출렁댈 뿐 방출되지 않았다.
준작은 그제서야 제 목에 닿아있는 검날을 알아보았다.
"끄으으…."
그 전사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면갑으로 얼굴을 아예 가린 탓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커녕, 이쪽을 보고 있는 건지도 알아챌 수 없었다.
준작은 제 손목을 쥔 채로 신음했고, 그제서야 전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차린 병사들이 헛숨을 삼키며 장병기를 겨눌지 말지 고민했다.
스륵
천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전사의 왼쪽 허리춤을 메우고 있던 도끼가 끌어내졌다.
그 도끼는 주인의 손에 쥐어지자마자 믿을 수 없는 온도로 달궈졌다. 그 매캐한 향을 맡으며, 준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아니겠지.
준작이 숨을 들이키는 순간, 주현성의 도끼가 파고들었다.
"그아아아아아악! 아아악!"
달궈진 도끼날의 옆면이 그대로 준작의 잘려진 손목을 짓누르자 자작은 끔찍한 작열통에 비명을 질렀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입에서 피거품을 뱉어내면서 고통스러워 했다.
하지만 전사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도끼를 거뒀다.
지혈은 완벽했다. 고문 역시 그러했다.
병사들의 정신적 고문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들은 주현성이 말을 하기도 전에 무기를 바닥에 내버리고 있었다.
주현성은 그걸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
"뭐야 씨발."
왜벌써 항복해.
재미 좀 보나 했는데, 이 새끼들은 바로 무기를 내버리고는 훌쩍이거나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거나 했다.
내가 뭐 그리 심한 짓을 했다고.
사실 이 꼬라지가 3번째 쯤 되니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나설 때마다 이 병신들은 그냥 무조건 항복을 해버렸고, 나는 뽑았던 무기를 다시 집어넣으면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칼자루를 손 안에서 돌리며 생각했다.
물론 내가 좆밥 패는 취미는 있긴 한데….
"현성아!"
그때 내가 부쉈던 문을 넘어서며 메이가 들어섰다.
메이의 얼굴은 약간의 검댕이 묻어있는 걸 빼면 멀쩡했다.
하긴, 신을 상대하던 플레이어들인데 고작 좆밥 NPC한테 발리면 체면을 못 살리지.
나는 그런 메이의 뒤로 몇 명 대공의 부하들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무기를 집어넣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전사님. 나머지는 저희가…."
이 과정이 벌써 세 번 반복되었다.
내가 정리를 끝내면 대공의 부하들이 나타나 이들의 인계와 수색을 책임지니, 나는 그냥 몸만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까부수고 약간만 위협하면 됐다.
굳이 나설 필요가 있긴 한 건가, 싶은데.
대공의 부하가 다가오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사병 중 하나가 번뜩 일어나는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쟨 또 왜 일어섰대.
안 무섭나 싶어서 다가서려는데, 놈의 동작이 기이했다.
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딛더니, 곧장 나에게로 쏘아졌다.
"어."
마치 화살 같은 움직임으로허공을 날아 나에게로 다가오는 녀석은, 어느새 꺼내쥐었는지 크게 휜 외날검을 나에게로 휘둘러왔다.
피할 수 없다. 물론 사슬 갑주가 있으니 크게 다치지도 않겠지만.
맞아준 다음에 주먹으로 때려줄 생각으로 몸을 젖히려는데,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내 몸은 앞으로 기울었다.
검날은 사슬 갑주를 스치지도 못하고 내 옆으로 빠져나갔고, 나는 주먹을 뻗었다.
콰직!
날카롭게 세워진 내 주먹이 그 사병의 목을 파고들자, 그 병사의 목뼈가 부러진 듯 머리 전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 사병은 성대가 뼈에 꿰뚫린 탓인지 피 끓는 소리를 내더니 풀썩 쓰러져 죽었다.
명확히 죽었다. 동공은 풀려버렸고, 몸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여버린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그 어떤 감흥을 느끼지도 못했다.
뭐지?
내가 그런 동작으로 망설임 없이, 반사적으로 자객을 죽여버린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내 안에서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것도 충격적이었다.
"혀, 현성아?! 괜찮아? 다친데 없어?!"
메이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털어내는데,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어, 어. 괜찮아. 안 다쳤어."
이런 격투술을 배운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 따르자면 없었다.
하지만 방금 동작은 마치 이게 맞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미 몇 번이고 사람을 죽여본 것처럼. 이미 몇백번이고 해봤던 것처럼.
나는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였고, 메이는 그런 나를 두리번거리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없어보이니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몸을 두른 검은 사슬 갑주를 내려다봤다. 갑주에 실린 기능인가? 뭐, 자동 반격 그런 거?
그런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대공의 부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저택의 주인과 사병들을 포박해 끌고 갔다. 몇 명은 남아 저택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계단에 주저앉았다.
괜히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착잡하게 다가왔다.
괴물은 이미 몇천마리고 쳐죽여놓고, 사람 하나 죽였다고 호들갑 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한테 괴물 감수성 같은 건 없어서.
그렇게 내가 조용하니 메이는 안절부절 하면서 내 투구를 손으로 더듬었다.
"괜찮은 거 맞아? 표정이…."
투구 쓰고 있는데 어떻게 읽었대.
내가 메이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니, 메이는 뺨을 긁적이더니 헤헤 웃었다.
귀여운 년.
"별거 아냐."
괜히 감상에 잠기기에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다음 지점으로 옮길까 하는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전사님! 여기로 좀 와주십시오!"
대공의 부하가 남겨두고 간 병사들 중 하나였는데, 그는 계단 바로 옆에 위치한 뭔지 모를 철문 같은 것 앞에 서있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이거 입구 아닙니까?"
확실히 그래보였다.
딱 봐도 보상방이나 뭔가 특별한 창고로 쓰이는 방 같았다.
득템은 못 참지.
나는 문짝으로 다가갔다.
"당기거나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 걸 보면, 특별한 잠금장치를…."
콰아아앙!
"…아하."
아직 남아있는 거인의 힘을 직관적으로 이용해서 문을 발로 차자, 뜯겨져나간 강철문이 길쭉한 통로를 미끄러지며나아갔다.
병사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