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94/274)



〈 94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어둡네."


문짝을 뜯어내자 대공의 부하는 곧장 돌아왔다.


제 휘하의 병사들이 알려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큰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나를 따라서 내려가는 것과 밖에서 기다리는   명확히 안전한 방향을 골랐다.


그래서 나와 메이는 단 둘이서  정체불명의 장소로 진입했다.

계단 바로 앞에만 들여다보일 정도의 어둑한 공간, 나는  공간 앞으로 그레이톰의 심판을  뻗었다가 거뒀다. 무슨 어둠이 물리적 형태라도 얻어낸 것처럼 뻗어지는 빛에도 그다지 개지 않았다.


메이가 내 뒤에서 침음성을 흘렸다.

"으응, 그러게."

어느새 어둑해진 주변, 저택의 지하로 서서히 내려가는 좁다란 계단을 따라 한 줄기 빛이 등에서부터 비춰왔다. 기다란 복도에서부터 쏟아지는 빛은 내 손에 든 칼에 둘러진 회백색의 빛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뚜렷한 시야나 상황 파악 없이 무작정 계단을 내려갔다.

"다리 아프다."


"다시 올라갈까?"


"아냐, 그게 더 아플 거 같아."

그럼 아프다는 얘기는 왜 했나 싶어서 돌아보니, 메이는 갈색 눈동자를 깜빡이더니 배시시 웃었다.

뭔데.


"업어주…면 안돼?"

그래서 그랬나.

굳이 사람을 업고 가야할만큼 가파른 계단인 것도 아니고, 거인의 힘이 꺼져서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계단의 어둑한 부분에서 뭐라도 튀어나오면 대응하기도 어렵고.


그런 이유들로 내가 안된다고 하니, 메이는.


"그, 그럼! 내가 마법으로 알아서 할게. 응?"

그렇게 기를 쓰고 업어달라고 해왔다.

하긴, 아예 안된다고 할  아니다.

메이의 마법 숙련도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고, 나 역시 이제 어느 정도는 기습에 대응할 수 있으니까. 메이가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다면 함정인데….


 뭣하면 다시 내려주면 되는 거니까.

"그래, 업혀라. 업혀."

"고마워."


나는 계단 두 어칸을  내려가 몸을 굽혔고, 메이는 그런 내 등을 보면서 잠시 꼼지락대더니 올라탔다. 다리를 쭉 뻗고, 팔을 내 목에 감으며 끙 하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메이의 몸이 스르륵  등을 타고 내려가길래, 결국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떠올리면서 메이의 엉덩이에 손을 걸쳤다. 탄력 있고 큼직한 엉덩이가 가죽 바지 위로 느껴졌다.

"오."


촉감 괜찮네.

가죽 바지 탓에 완전한 엉덩이의 촉감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탄력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놀라워하는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메이는  가슴을 뭉그러뜨리며 내 목을 껴안고서 귓전에 소리를 흘렸다.

"왜 그래?"

숨이 귓가에 닿는다. 약간 간질간질했다.

계단을 괜히 두어개씩 내려가니, 메이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메이는 싱겁다며 내 머리칼을 괜히 문지르고는  목을 껴안았다. 필연적으로 메이의 가슴은  눌렸고, 나는 흉갑을 입은 것을 후회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앞은 어두웠다.

어둑한 계단을 딛고 내려가는 건 꽤 정신적으로 피로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메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조용히, 왠지 내 목덜미에 뺨을  채로 자고 있는 것마냥 숨을 뱉어대고 있던 메이는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냐?"


"어, 응? 아냐, 안 자! 그냥 생각 좀 하느라."


뭐 생각할 게 있다고.

내가 피식 웃으니 메이는 푸, 하고 숨을 뱉어내면서 토닥토닥,  어깨를 그 작은 손으로 두드렸다.

나름의 불만 표시인 모양이었다.


"내 생각이라도 했냐? 하긴, 내가 존나 잘생기긴 했지."


"뭐야, 또 이상한 소리 해."

메이는 뭔가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투닥대던 손을 고스란히 다시  어깨에 둘렀다.

그 손으로  하려나 싶어서 슬그머니 눈을내리니, 메이가 내 목을 강하게 껴안았다. 곧이어 내 목에 문대다시피 볼을 대고는, 볼을  번 부비면서 조용히 있었다.


"뭔 생각인데. 들어줄게."

메이는 흠칫했다가  어깨에 턱을 얹었다. 입에서 뱉어지는 호흡이 내 어깨를 간질였다.


이 새끼, 이러다가 어깨에 입맞추겠네. 그러면 여왕이랑간접 키스인데.


"으응, 있잖아."


"어."


"겨울 언니랑… 어떤 사이야?"


…이거, 전에도 엇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분명 그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다.

메이는 그때 그렇구나, 하고 말았었고.


그때의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나 싶어서 흘긋 보는데, 뺨을 내 어깨에 얹어놓은 탓인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거 같은데?"

 다른 대답에 메이는 잠시 꾸물거렸고, 나는 괜히 메이가 떨어질까 몸을 들썩여 메이를 고쳐업었다.


"언니랑 키스했어?"

메이 빼고 대부분의 여성 측근이랑 했다고는 할  없었으니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조용하더니, 내 목덜이 기댔던 머리를 들어올리고서 콩, 가볍게 내 뒷머리에  이마를 묻었다.


"…얌마, 목 졸려."

그리고 팔에 힘을 줘서 내 목을 끌어안았는데, 흉갑만  입고 있었으면 메이의 그 큰 빨통의 형태를 명확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근데 그 탓에 약간 목이 갑갑했다.


메이는 으응, 하면서 내 뒷머리에 제 이마를비벼댔다.


"전하랑은 어떤 관계야?"

"그냥 뭐… 봤잖아. 그게 전부지."


여왕이 이 얘기를 들으면 아쉬워 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첩이 되겠다고 한다면 거절하진 않겠지만. 주면 먹는 게 나 주현성이니까.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계단을 성실하게 내려가 긴 복도에 들어섰다. 내려온 계단의 개수를 생각하면 꽤 내려온 거 같은데, 어쩌면 헤로디아의 지하 연구실과 이어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을 가르고 메이가 말했다.

"그럼… 그럼 있잖아."

뭐야, 끝난 거 아니었나.


질문 타임을 연장해오길래, 잠시 조용히 들었다.


"만약에 전하랑 나랑 둘 다 동시에 위험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런 질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양측 모두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질문이라서,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합리적인 대답을 내는 게 나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봤다. 다 동시에 위험하고, 한 명만 구할  있다면 어떻게 할까.

여왕이 죽으면 많이 안타까울 거다. 울 정도는 아니고,  많이 허전하겠지. 이래뵈도 같이 지낸 게 꽤 되니까. 연단위는 아니어도.

하지만 짱깨는 내 여정의 거의 처음부터 함께였으니, 그런 척도로 친다면 당연히 메이가 먼저였다.


"너."

"…진짜?"


메이는 이제 아예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탓에 목소리는 울렸다.

"어, 진짜."


메이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 목덜미에 다시 뺨을 문지르다가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다시 문질러댔다.

입술이 닿는 거 같긴 한데, 입맞추는 것도 아니니 그냥 우연치 않게 닿은 거겠지.


얼추 넘기면서 가만히 서있다가, 메이가 고개를 다시 들어올리는  느껴질 쯔음에 내려주었다.


"편안한 이용 되셨습니까, 고객님?"

"네, 돈 어디에 내면 돼요?"


"뭐래."

내가 건 농담이었지만 생각보다 잘 받아줘서 웃음이 나왔다.

메이는 자기가 말하고는 웃긴지 입을 가리고 웃었고, 나는 그런 메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아아아~ 하지마아~"

"흐즈므~ 요 앞만 얼추 살펴보고 돌아가자."

"응!"


지난 번처럼  기죽은 채로 한동안 유지되려나, 했는데 메이는 생각보다 밝았다.


그런 메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등을 돌리고는 앞장서서 곧 어둑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나와 메이의 발소리만이 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마치 어둠이 넘실대는 파도처럼 내가 뽑아낸 검을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몰려들었다.  파도를 만드는 인력은 내 발걸음이었다. 나는 내딛으면서 이 어둠이 계단에서 불어닥치던 때보다 약해졌음을 깨달았다.


앞에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짧막하게 메이에게 고했다.

"…뭔가 이상하네."

"응?"

"어둠이 옅어. 이 앞에 광원이 있는 거 같아."

물론 짐작일 뿐이라서 뭔가 마법적인 지랄이라면 틀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앞에 빛이 있을 것이다. 그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 메이는 내 뒤를 따르다가 적조를 뽑아들었다. 피를 먹으면 재생하는 검날은 곧 깨끗한 화염으로 타올랐다.


"진짜네."

"그럼, 진짜지."

찍은 건데 정답이네.


나와 메이는 딱 봐도 연구실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들어서있었다.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들어찬 커다란 시험관하며, 거기에 꽂힌  즐비한 강철 파이프까지.


딱 봐도 자연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뭔가 빛나는 액체가 가득찬 시험관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처음 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우와."

"흐음."

메이는 신기하게 여겼지만, 나는 딱 봐도 저게 적이라는  알 수 있었다.

큼직한 뿔이 두  달린, 파충류와 인간을 적당히 섞어놓은 생명체. 기다란 파충류 특유의 주둥아리에 긴 꼬리가 달린 괴생명체.

파충류인 부분은 거기까지로, 손과 발은 인간의 그것을 억지로 잡아늘린 것처럼 생긴데다 주둥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빨들 역시 인간의 이를 닮아있었다.


얘는 이게 안 징그럽나?

그리고  시험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


메이의 얼빠진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단단히 쥐었다. 손에 감겨오는 사슬갑주의 감촉을 느끼면서 숨을 들이켰다.


거인의 힘을 써야하나?

…그르르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뭔지 알 수 없는 초록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비척비척 몸을 떨어트린 그 정체불명의 괴물새끼는 바닥에 그 기괴한 인간의 손을 짚고는 헐떡이면서 무언가를 토해냈다.


투두둑, 촤악!

"씨발…."


존나 역겹네.


토해내진 것들은 주로 내장이나 뭔가의 살점이었는데, 방금 전까지 시험관 안에 틀어박혀있던 괴물의 체내에서 나왔다기에는 부자연스러운 부패 상태와 양이었다.


그렇게 계속 토사물을 뱉어내는 괴물에게서,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 느낌?

일단 마력은 절대 아니었다.


뭔가 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그 감각을 알아보자고 괴물을 방치해두기엔 그랬다.


결단을 내리고서 숨을 들이키고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거인의 힘이 발동됩니다.]

콰아앙!

내가 딛고 있던 타일 바닥이 산산히 부숴지며 흩날렸다.


휘두르는 팔을 따라 회백색의 섬광이 거세게 번지더니 그 회백색의 섬광에 벽에 즐비한 파이프, 석벽, 언뜻 초록색이 감도는 금속장치가 잘려나갔다.


쏘아진 섬광은 벼락처럼 괴물의 목을 잘라냈다.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웅!

단말마조차 없이 괴물의 몸이 바닥에 강하게 떨어졌다. 그러자 언뜻 땅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조용해졌다.

생각보다 무게가 꽤 나가나 보네.


나는 검을 휘둘러 피가 덕지덕지 붙어 회백색 위로 빛나는 붉은색을 털어냈고, 흩뿌려진 피는 잘려나간 파이프 위를 장식했다. 장식된 파이프 안에서부터 초록색 액체가 줄줄 새어나왔다.

"좆밥이네."

칼을 허리춤의 검집에 밀어넣었다. 금속성 위로 토닥토닥에 가까운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메이가 내게 오도도 달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괴물이 좀 많았으면싸우느라 뭘 못 건졌겠는데, 내가 방금 베어낸 자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멀쩡해서 가져갈  있어보였다.


딱 봐도 연구든 뭐든 어딘가 음습한 목적에 쓰였을 기계장치와 샘플들, 뭔지 모를 초록색 액체까지.

붉은 느금마 헤로디아가 꾸미는 일과 연관이 있어보이는 것들 뿐이라, 전부 싸들고 가는 게 나았다.

나야 좆도 모르지만, 대공이 본다면 나름 뭔가 알아내겠지.

그래서 복도로 되돌아가서 사람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머릿가죽이 들썩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현성아?"


메이의 당황한 목소리, 머릿가죽을 들썩이게 하는 감각.

마력과 유사하지만 다른 종류인 게 분명한, 이질적인 감각.  편으로는 무척이나 익숙한 감각.


내가 몸을 돌리니, 그 감각의 중심에서 무언가 일어서고 있었다.


기다란 팔다리는 창백한 비늘로 덮여있지만, 손과 발은인간의 그것을 닮은 괴물.


분명 내가 머리를 잘라냈을 괴물이 몸을 일으키니, 잘려나갔을 머리가 끈적거리는 초록색 액체를 흘려대며 붙었다.

그 부상으로 일어난다고?

이미 재생이라고  수 있을 차원이 아니었다.


심지어 크기도 약간 더 커져있는 게, 아까와는 기세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괴물의 체내에서 무언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주 미약하고, 무언가 이리저리 섞여있어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 그 요동치는 기운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었다. 애써 부정하고 싶던 진실이 내 입에서 빠져나왔다.

"이 느낌은… 신성이잖아."

내 말에 괴물이 눈을 떴다.


그 괴물에게 눈은 하나 뿐이었다. 미간에 단 한 개, 용의 그것을 닮은 어째선지 심하게 충혈된 눈.


메이가 숨을 들이키고, 나는 전신을 검은 사슬로 덮었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이 그 부자연스러운 아가리를 열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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