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땅이 울린다. 실제로 울리고 있었다. 녀석이 내딛는 걸음마다 자세가 흐트러지려고 하길래, 억지로 거인의 힘으로 내 몸을 찍어누르고 자세를 낮춰 균형을 잡는다.
"으익…!"
메이는 그러지 못했다. 기우뚱 하고 자세가 흐트러진 메이는 바닥에 넘어졌고, 나는 그런 메이의 앞에서 장검을 틀어쥐었다.
"그아아아아!!!"
그런 나와 메이를 향해 녀석은 뛰어왔다. 아까 목을 잘라냈을 때보다 살짝 더 커진 몸집을 대포처럼 쏘아내 거리를 좁혔다.
녀석이 딛고 있던 타일 바닥이 흉하게 부숴져 흩날리는 와중에 녀석과 메이 사이에서 눈을 움직여 거리를 계산했다.
좋아, 이건 어쩔 수 없다.
빠르게 메이를 낚아채 들자 내 어깨에 얹어진 메이는 잠시 힉 하는 소리를 내더니 제 주변에 떠다니던 화염을 쏘아냈다.
송곳 같은 형태로 변한 화염이 날아들고, 괴물은 잠시 주춤하더니 궤도를 꺾어 피하곤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몸을 거의 땅에 닿듯이 숙여 방향을 꺾는 그 모습은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꺄악!"
다가온 녀석이 팔을 크게 휘두른다. 메이가 비명을 지른다.
맞받아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릿 속을 돌아다녔으나 괜히 위협이 남아있을 때에는 경솔하게 접근하지 않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내 어깨 위에 메이도 있고.
몸을 젖혀 피했다. 젖히다 못해 다리를 튕겨내 뒤로 뛰니 녀석의 팔이 강하게 바닥을 후려쳤다.
프랙탈 문양처럼 쪼개져 튀어오르는 타일과 이쪽을 노려보며 그 흉한 인간의 이를 드러내는 기괴한 파충류.
신성을 가진데다 기괴한 생김새에 걸맞게 기괴한 전투 능력을가진 괴물.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내 어깨 위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몇 개의 화염을 띄워올리는 메이를 흘긋 보고는,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내려놓았다.
"화염 최대한 아껴."
"아, 응!"
내리찍어진 자리는 완전히 파손되어 내용물을 잔뜩 쏟아냈고, 그 탓에 나는 저 놈의 공격이 보이는 크기보다 더 무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무거운 놈이라고 친다면 말이 안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온갖 기괴한 새끼들을 봐온 터라, 고작 보기보다 무거운 새끼 정도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오른손으로 그레이톰의 심판을 쥐고, 왼손에 도끼를 꺼내들었다. 도끼의 날이 화염으로 달궈졌다.
괴물은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몸을 깊게 낮추고 그르렁 거렸다. 인간의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아, 거 새끼 징그럽게.
강렬한 시선에 내가 눈쌀을 찌푸리기도 잠시, 녀석이 튀어올랐다.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느려진다.
떠다니는 먼지나 소리조차 더뎌질 정도의 정신적 가속 속에서 내게 달려드는 괴물을 확인했다.
충혈된 눈동자는 이미 나를 포함한 전방 전체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그 방향 너머에 메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도끼를 단단히 쥐었다.
명백히 메이를 경계하는 듯 보이는 모습. 당장 나와 맞붙고 있음에도 메이가 마법을 날려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거 같았다.
느려진 시야에 녀석이 뻗어대는 인간의 주먹이 보였다. 인간의 손을 단순히 크게 확장했을 뿐인 손이지만 그 위력은 막대했다. 무게가 무겁다는 걸 아는 이상 가드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후우욱
콰아앙!
영원의 정신을 풀기 무섭게 앞으로 몸을 튕겨냈다.
녀석을 지나치자 녀석은 제 주먹을 내 동선에 겹치려 애썼지만 닿지 않았다.
대신.
촤아아악!
앞으로 뛰어오르면서 휘두른 그레이톰의 심판이 녀석의 목젖을,낙인이 손가락을 잘라냈다.
갈라진 녀석의목젖에서 또 그 초록색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녀석은 제 목을 짚으며 땅에 엎드렸다.
손가락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내 위치에서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신경 쓸 정도의 상처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에 새겨진 상처는 보통이라면 치명상이다. 나는 거인의 힘을 켠 주먹끼리 부딪혀 도약을 위한 충격을 쌓았다.
아까 잘렸던 목이 다시 달라붙었던 걸 보면, 이번에도 재생할 것이다.
내 온 몸을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덮은 시점에서, 그 괴물이 푹 떨궜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크게 갈라져 고개를 젖히면 그대로 머리가 잘려 떨어졌을 정도의 상처였을텐데, 지금은 흠집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보기보다 무거운데 그체중을 지탱할 수 있는 뛰어난 근력, 재생 능력까지.
이거 씨발 뭔 괴물이야?
저 무게를 데미지로 치환하자면 상당히 밸런스 붕괴 몬스터였다.
심지어 저게 보스급도 아니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더욱.
데미지가 높은데 체력도 높고,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동작을 막아내기는 커녕 경직조차 줄 수 없다.
얼추 보자면 꽤 강력한 놈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면서 녀석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며 걸으니, 그 괴물 새끼가 나를 보고 이를 갈더니 입을 열었다.
"아…파…."
"엉?"
녀석은 그 충혈된 눈에서 눈물을 떨어트렸다. 인간의 구강을 닮은 입을딱딱, 이빨을 거칠게 부딪히며 열었다 닫으면서 녀석은 말했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아!!!"
괴물은 한술 더 떠 광분하며 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리찍은 땅이 움푹 패였다.
이거 씨발 미친놈이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순수한 악의가 느껴졌다. 정확히는 내가 자신을 공격해서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응보 의식 정도일까.
녀석은 한동안 아무 죄도 없는 땅을 때려부수며 광분하더니 곧 대가리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아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청이 울린다. 지하실에서 퍼져나간 소리가 계단을 타고 밖까지 뻗어나간다.
울리는 소리가 계단을 향해서 웅웅 퍼져나가니, 계단 너머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이거 안 좋은데.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이 새끼가 곧 소란을 따라올 사람들한테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대공한테 보고할 부하 몇 명은 남아있는 게 편할 거라는 걸 생각하면, 빠르게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단은 길다.
후, 하고 숨을 내뱉고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낙인으로 강하게 쓸었다.
카라라락!
동시에 화염 부여를 양손에 들려진 무기에 사용하자, 화염이 거칠게 치솟았다.
괴물은 광분하며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들듯 하더니 내 양손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움츠러 들었다.
이 새끼 봐라?
내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 괴물이 뛰어올랐다.
콰앙!
타일이 이리저리 튀었고, 나는 나를 향해 쏘아지는 놈을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맞이하기 위해 땅을 딛고 몸을 튕겨냈다.
*
카아앙!
주현성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인간의 손을 허리를 젖혀 피해냈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자세를 무너뜨렸다. 괴물이 그걸 노리고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주현성은 그 자리에 없었다.검은색 연기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사슬갑주의 능력으로 가속하여 아예 몸을 빼낸 주현성을 확인하자마자 괴물이 고개를 돌렸다. 그 올라간 머리를 향해 화염 몇 발이 날아들어 꽂혔다.
"크아아악!"
마치 소년 같은 목소리로 괴물이 고통에 차 울부짖었고, 허공에 뜬 주현성이 다리를 움직였다.
뻐억!
길쭉한 다리가 반월 같은 궤적을 그리더니 그대로 괴물의 머리를 짓이겼다. 두들겨 맞은 괴물의 머리가 홱 돌아가더니바닥에 쳐박혔다. 어지럽게 돌무더기가 튀었다.
"흐으윽… 아파아아…!"
괴물은 그정도 어휘 밖에 구사할 수 없는지 연신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다.
주현성은 그걸 보면서 미묘하게 불쾌했는데, 그게 저 괴물의 흉측한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아이를 패는 것 같은 뒷맛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저 괴물의 맷집은 신기했다.
"징하다."
땅을 딛고 선 주현성이 주먹을 꽝꽝 부딪히자 울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다시 그의 몸을 휘감았다.
괴물과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간지 몇분째, 주현성은 괴물과 맞서면서 대충 몇 가지의 특징을 추려냈다.
첫번째, 저 괴물은 높은 재생 능력 내지는 소생 능력을 갖고 있다.
이미 서너번 정도 쪼개놨었던 머리가 다시 아무는 걸 보자면 거의 소생에 준하는데, 단순히 재생력이 좋은 괴물이라고 퉁칠 수는 없었다.
신성의 행방이 재생으로 향하는 걸지도 몰랐다.
두번째, 화염으로 입은 피해는 재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화염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완전히 화염피해인 것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톰의 심판에 화염을 두르고 베어낼 경우에는 재생이 더뎌지긴 하지만 재생하지 않는 정도는 아니었고, 낙인으로 베어낸 자리는 여전히 벌겋게 물든 채로 벌어져 있었다.
심지어 메이의 마법으로 얻어맞은 자리도 여전히 그슬린 채였던 걸 보면, 저 괴물 자체가 화염에 약한 모양이었다.
즉, 공략법은 순수 화염 피해를 입히는 낙인에 달려있었다.
주현성은 망설임 없이 그레이톰의 심판을 밀어넣었다. 금속음에 괴물이 짜증스럽게 그르렁 거렸다.
그는 몇 번 손아귀에 들린 도끼를 휘두르고는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푸화아아악!
도끼의 날을 타고 거세게 화염이 타올랐다.
애초에 화염 피해만을 입히는 무기였던 탓인지, 타오르는 화염은 강맹하다는 걸 넘어 주변 공기마저 일그러뜨렸다.
괴물은 그 무기를 보고는 본능적 공포와 위기감을 느꼈고, 주현성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도끼로 목을 치면 죽는다. 저 괴물이 아무리 유아적인 수준의 지능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까지 모르진 않을테니, 도끼로 위협할 생각이었다.
진짜 노림수는 다른데 있었으므로.
주현성의 호흡이 늘어지고, 괴물이 움츠린 순간, 주현성이 뛰어들었다.
"아파!!!"
기합이라기에도 모호한 비명과 함께 괴물이 팔을 휘둘렀다. 그 팔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고막을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압력을 띄고 있었다.
주현성은그에 맞서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거리를 벌려 피했다. 허공을 가르며 나아간팔이 멈칫하더니 떨어졌다. 뒤로 물러나며 휘두른 도끼질에 걸려 잘려나갔다.
"아파아아아아!!! 죽어!!!!!"
괴물은 그리하야 새로운 어휘를 습득했다.
분노에 고통마저 잊어버린 괴물이 달려드는 순간 주현성은 메이에게 외쳤다.
"지금!"
메이가 손을 뻗어내자 그 손바닥 위에서 화염이 휘몰아쳤다. 회오리처럼 똬리를 틀고 일렁이던 화염은 창처럼 앞을 향해 쏘아졌다. 노린 곳은 부정확했으나 범위는 넓었다. 목적은 괴물이 화염을 경계해 피하는데에 있었다.
"아파!"
실 없는 소리와 함께 괴물이 뛰어올랐다. 화염이 그 괴물의 발밑을 태우며 지나쳤고, 괴물은 그제서야 하나 뿐인 눈을 굴려 주현성을 찾았다.
하지만 주현성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의아함과 당혹감, 그리고 삶에서 처음 맛본 불안감에 괴물이 몸을 뒤트는 순간, 그 시야가 반전했다.
괴물은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더 이상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에도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아파, 아파! 하고.
그보다 주현성이 빨랐다.
괴물이 뛰어오름과 동시에 가속했던 주현성이 잘려져나가 떨어지고 있는 머리를 붙들었다. 붙들은 순간 손아귀가 타올랐다. 타오르는 화염은 삽시간에 뇌, 눈, 점막을 태워버렸다. 타들어간 동공이 익어 툭 터지는 순간, 주현성이 머리를 지면으로 향하고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타오르던 머리가 지면과 격렬히 접촉하는 순간 산산히 부숴져 흩어졌다. 잿더미와 뇌간이 적당히 섞인 칵테일을 딛고 주현성은 손아귀를 털었다.
그 뒤로 몸이 떨어졌다. 쿠웅,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나고 몸은 바르작대며 죽었다.
주현성은 괴물의 몸뚱이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메이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자며, 불을 지른 탓에 건질 수 있는 게 없을테니 목격 증언이라도 남기자고 말하려고 했다.
짝, 짝, 짝
갑자기 들려온 소리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라는 의미였다.
주현성이 등을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저 신성을 가진 괴물이 튀어나왔던 시험관 뒤에서, 어떤 여자가 나오고 있었다.
키는 크고, 가슴과 골반, 엉덩이 역시 커다란 여자였다. 풍만한 몸에 잘 어울리는 긴 곱슬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져 있고, 그 허리 뒤에서는 기다랗고 굵은 꼬리가 걸음마다 흔들렸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선 헤로디아가 입을 열었다.
"대단하시네요. 역시 대전―"
그리고 헤로디아의 머리에 도끼가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