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자욱한 먼지와 피구름 속에서, 헤로디아는 몸을 일으켰다. 큼직한 꼬리 덕에 그녀의 기상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게 빠르며 미학적이었다.
부스스, 하고 그녀의 몸을 따라 피와 먼지가 떨어졌다. 그 중심에서 그녀는 요염하게 웃었다.
일그러지고, 부숴지고, 얼마 남지 않은 얼굴이 시간이 돌아가는 것처럼 회복됐다. 명백한 마법의 행사.
보통은 부활 같은 강력한 마법은 그 행사와 준비에 상당한시간이 소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헤로디아는 그런 기색도 없이, 즉석에서 그런 주문을 만들어냈다.
"어서오세요, 대전사님."
그리고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주현성에게 말을 건넸다.
주현성은 양팔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헤로디아를 내려다봤다. 주현성이 헤로디아의 권좌를 딛고 서있던 탓이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권좌를 흘긋 보고는 손을 뻗었다. 붉은색 뇌전이 파직대며 주변을 훑었다.
"자리, 돌려주시겠어요?"
말은 부드러웠으나 태도는 권고나 부탁이 아니었다. 곧장 헤로디아의 쭉 뻗은 손에서 번개가 쏘아졌다.
쏘아진 번개가 끔찍한 소음을 내며 어둠속을 뇌전으로 수놓았다. 번개는 피할 수 없다. 그 근본이 빛이기에, 빛보다 빠르지 않으면 피하기는 커녕 인식조차 할 수 없다.
대공이 손을 뻗어, 얼마 없는 정신력으로 방어막을 치려는 순간, 주현성에게 닿은 번개가 산산히 흩어졌다.
"…흐음?"
헤로디아는 의아하다는 듯 주현성을 바라봤다가, 그 주현성 뒤편에 쭉 뻗어있는 터널을 흘긋 보았다. 그 터널 속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누군가 걸어나왔다.
그건 메이였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발이 아프긴 하지만, 싸울 때는 싸울 줄 아는 여자.
헤로디아는 고작 저 쪼그만 여자가 사용한 마법이, 자신의 마법을 가볍게 막아냈다는 사실에 황당해졌다.
분명히 같은 주문 학파에, 숙련도는 그녀가 훨씬 높을텐데도.
의아함에 다시 마력을 끌어모으는 순간, 주현성이 사라졌다.
'아차…!'
허공을 격하며 날아온 주현성의 주먹이, 다시금 헤로디아의 방어막을 깨부수며 접근했다.
분명 실험체들로 측정했을 때에는 이정도로 폭발적인 근력은 아니었는데.
헤로디아는 낭패감을 느끼며 꼬리로, 몸을 뒤로 튕겨냈다.
쿠오오오오!!!
주먹이 스친 자리에서 격풍이 불어온다. 체격과 체중에 적합하지 않은 그야말로 신과 같은 근력.
헤로디아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꼬리로 균형을 바로 잡으니 주현성은 주먹을 휘두른 자리에서 다시 도약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번엔 도약보단 그녀의 마법이 빨랐다.
콰르르릉!
"…큭."
평소의 불 같은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주현성은 그 걸걸한 입으로 욕을 내뱉지도 않고 몸을 웅크렸다. 붉은색 방어막 위로 번개가개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하지만 거의 물러나지 않았다. 번개에는 밀어내는 힘이 부족한 고로, 주현성은 몸을 웅크려 벼락을 막아내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헤로디아가 재차 물러서기도 전에, 주현성은 그녀의 앞을 점했다.
점하고서 팔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주먹은 우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쏘아졌다. 느닷 없이 지저에서 울린 천둥은검은색 폭발을동반했다.
콰아아앙!
으직!
'빨라…!'
일방적인 전개를 상상하며 방심했던 건 방금 전의 일격으로 끝났었다. 이번에는 그저, 주현성이 압도적으로 빠를 뿐이었다.
심지어 저 연기, 휘둘러지는 순간 주현성의 주먹을 폭발적으로 가속시켰다.
헤로디아는 억지로 들어올렸던 팔이 뜯겨져 나가는 광경과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한손으로 마력을 응집시켰다.
"아무리 대전사님이라도 그저 당해줄―"
콰직!
두번째 공격은 발차기.
체중을 그저 앞으로 실으며 내지르는 앞차기.
하지만 거인의 힘이 중복 발동된 주현성의 근력은 폭발적이었고, 다시금 지저에 굉음이 울렸다.
수천의 짐승이 동시에 울부짖는 것만 같은 해괴한 소리와 함께, 헤로디아의 젖가슴과 갈비뼈가 뭉개졌다.
날아가는 의식 속에서 헤로디아는 손을 움직였다. 뭉쳐진 화염이 주현성에게 쏟아졌다.
주고 받기, 두 명이 동시에 튕겨져 나가 반대방향으로 날아갔다.
콰지지지지직!
쏘아진 풍만한 여체가 여러 개의 금속관을 때려부수며 나아가다가, 깊이 파인 도랑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튕겨져 나간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주현성은 다리를 구르며 겨우 멈추고서는 몸을 털어내고 있었다.
헤로디아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뭉게진 전신에서는 피가 흐르고, 부러진 뼈가 후둑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되려 제 몸에 박힌 금속을 뽑아내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할 틈을 안 주시는군요?"
"매료할까봐. 그러지, 씨발년아."
헤로디아는 살풋 웃었다. 매료라면 아까부터 걸고 있다. 그 탓에 그녀의 시야로 남은 병사들이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저 메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다가오지 않는 게 아닌가.
하지만 주현성에게 매료는 먹히고 있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방법을 찾는 고대인을 앞에 두고, 주현성은 쥐었던 주먹을 펴고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하야 회백색 검이 그 선명한 검날을 지저에 피어나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재생한 양손에 마법을 형성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굴레에 벗어난다.
그녀는 굳은 결의로 표정을 굳혔다.
단 한 방울, 단 한 방울이라도 얻어낸다면.
헤로디아는 주현성이 결코 예상하지 못할, 그런 마법을 만들어냈다.
*
기기긱
내 손에 들려진 그레이톰의 심판이 비명을 질렀다.
근력 상승은 나쁘지 않지만, 그레이톰의 심판은 원판이 마법 해제 효과가 달려있을 뿐인 장검이다.
폭군의 검이나 낙인처럼 파괴 불가도 아니니, 거인의 힘 중첩이 켜진 상태로 휘둘러지는 건 그레이톰의 심판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씨발."
화염이 직격했던 가슴팍이 아직도 화끈거린다.
은으로 된 갑주를 입어 그나마 큰 피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상대는 최고의 마법사이자 게임에서는 보스로 한 자리를 꿰차고 있던 년이었다.
계속해서 마법을 맞아주면서 승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서야하는 건 이 무기였다. 원거리, 근거리를 가리지 않고 검로에 닿는 모든 마법을 해제해버리는 아이템, 그레이톰의 심판.
이 근력에 몇 번이나 휘두르는 걸 버틸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한숨을 내쉬며 장검을 단단히 쥐었다. 양손에 감기는 칼자루의 감촉이 낯설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맑은 목소리였다.
"현성아…?"
"별 거 아냐, 그냥 방어만 계속해주면 돼. 네가 생각하기에 괜찮아보이면 마법 지르고."
"응? 내 생각대로?"
메이는 터널 끄트머리에 걸쳐서 선 채로, 아리송한 표정을 보내왔다.
얼추 자존감이 없어보이는 표정이길래, 나는 푸, 하고 숨을 내뱉었다.
"어, 네 생각대로."
메이는 잠시 고뇌하는가 싶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메이 뒤에 도열하고 선 병사들은 그런 나와 메이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는 궁수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렇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거인의 힘 2중첩을 켠 건 좋은데, 여기까지 길을 뚫어오면서 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헤로디아가 내 거인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괴력이 사라지는 순간에는 분명 눈치챌 것이다.
그러면 게임 끝.
이번에도 역시나 치킨 게임이었다.
언제는 아니었겠냐만은.
내가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서자, 헤로디아는여유로운 표정이 지워진, 왠지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펼친 양손에서는 마법이 드글거렸는데, 좆도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저 마법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질적인 면이 아닌 종류적인 의미로.
내가 그 동작과 마법에 눈을 찌푸리니, 헤로디아가 드디어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 큼직한 젖탱이가 출렁였다.
잠깐, 왜 출렁―
"…씹?!"
카아아아앙!
도약이었다. 헤로디아의 몸은, 지금껏 그러지 않은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속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내뻗은 주먹에 부딪힌 마법진 같은 것은, 금속음을 울리더니 튕겨져 나갔다. 내 몸은 쭉 밀려났다.
이런 씨발?
거인의 힘이 2중첩으로 켜져있는 몸뚱이를 무슨 수로 밀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충격량이 훨씬 강했다. 나는 아려오는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다행인 건, 방금의 격돌로 충분한 가속 스택이 쌓였다는 거다. 난 다시금 나를 향해 날아오는 헤로디아를 보면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날아가라…!"
몸을 틀고, 가속하며 회전한다.
씨발, 내가 태권도는 다닌 적 없지만, 이렇게 차려준 밥상이라면 돌려차기는 할 수 있다.
내 길쭉한 다리는 곧장 파공성을 자아내며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씹…!"
헤로디아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내 다리는 가로막혀 있었다.
두 개의 마법진 사이에 끼워져서.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물리력을 무효화하던가 하는 모양이었다.
좋지 않았다. 헤로디아의 길쭉한 손톱이 발목을 파고들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감촉과 선명한 고통이 내 발목 위로 느껴졌다.
"…이런 씨발년이…!"
문득 내 오른손에 들려진 검을 바라봤다.
회백색으로 빛나는 검날.
마법 해제 효과를 지닌 검날.
짧은 휘두르기에도 검로에 끼어든 마법을 박살내버리는 아이템.
나는 가속을 한 번 더 발동했다.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윽?!"
붙잡혔던 다리가 빠져나가자, 헤로디아의 안색이 굳는다. 마법진 사이에 끼워졌던 다리에 고통이 내달리지만, 이를 악물면서 그 고통을 참는다.
나는 발레라도 하는 것처럼 빠져나온 다리로 곡선을 그리며 돌았고, 그렇게 돌면서 땅을 딛었다. 회전력은 여전했다. 회전하면서 그레이톰의 심판을 단단히 쥐었다.
챠아아아아앙!!!
그레이톰의 심판이 휘둘러지고, 회백색 검기가 내 전방을 뒤덮는다.
야구배트 휘두르듯이 간단히 휘둘렀음에도 어마어마한 거력, 헤로디아는 마법으로 틀어막았으나.
"꺄아아아아악!!!"
마법은 내가 휘두른 장검의 궤적에 걸려 찢어졌다.
그리고 그간 내 주먹에 얼굴이 으깨지거나가슴팍이 뭉개지면서도 찍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헤로디아는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투둑
잘려나간 헤로디아의 손가락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헤로디아가 거리를 벌리기 전에 다시 달려들었다. 장검이 덜컥거리는 걸 보건데, 수리 받기 전에는 다시 쓰기 힘들듯 싶었다.
그래서 내 선택지는 주먹이었다.
"흡…!"
숨을 들이키면서 주먹을 다시 올려친다.
콰직, 하는 선명한 피륙의 감촉과 함께 헤로디아의 머리가 움푹 패인다.
으깨진 눈알이 흩날리고, 헤로디아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떠오른다.
뒤로 날아가는 헤로디아가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허리춤에서 낙인을 뽑아내어 한동작으로 던졌다.
즈컥!
날아간 도끼는, 헤로디아의 꼬리를 버터처럼 잘라내고 날아갔다.
되찾기 힘들겠네.
하지만 그 결과 헤로디아는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날아가 기물에 부딪혔다.
콰아아!
금속관들이 엉켜 들고 일어나고, 쳐박힌 뭔지 알 수 없는 구조물과 헤로디아의 몸뚱이가 뒤엉켜 피륙을 마구잡이로 뿜어낸다.
그렇게 뭔지 알 수 없는 구조물이 기울었다.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쿠우우웅….
생각보다 무게가 육중한지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지저에 넓게 퍼진다.
보통의 괴물이라면 뒈지고도 남았을 피해였지만, 내가 보기에 헤로디아는 죽지 않았다. 실험체들의 기이할 정도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검을 단단히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예상대로 헤로디아는 마구잡이로 금속관이 돋아나고 뼈가 튀어나온 팔로 욕조 같은 구조물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헤로디아가 헐떡이면서 나를노려본다. 선명한 악의를 눈동자에 깃들여내고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 욕조 같은 것에 몸을 걸쳤다.
[거인의 힘의 지속 시간이 종료됩니다.]
씨발.
좋지 않았지만, 저런 걸레짝이라면 아직 승산은 있었다.
그레이톰의 심판을 단단히 쥐고 다가서는데, 갑자기 헤로디아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귀에 닿을 것처럼 잔뜩 끌어올리고, 홍소를 내뱉었다.
그 웃음에 뭐가 잘못됐는지 되새겼다.
설마 독 관련 마법인가? 내 상처에 직접 침투시키는?
발목을 슬쩍 내려다봤지만 아무런 이상은없어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니 이변이 있었다.
헤로디아는 회복이 덜 된 몸뚱이로 그 구조물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주저앉았다.
이제서야 나는 그게 의자, 더 나아가 옥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방을 향해 뻗어난 금속관이 그 옥좌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썅년의 손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따끔한 감각에 새삼 고개를 떨궈 내 발을 보았다. 사슬 갑주로 뒤덮은 발에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썅년의 손에 쥐어진 피는, 내 피였다.
"…당신에게 감사를…. 나는 이제,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후련한 듯, 한 편으로는 착잡한 듯 슬픈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는 다시 요염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성을 이식하는 실험, 신이 되겠다는 포부. 그리고 나에 대한 집착.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헤로디아가 웃으며 손을 쥐었다.
그 손에서 내 피가 눈부실 정도로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