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용의 도시 발데가리아
나는 발데가리아로 돌아왔다.
고대의 도시 방문은 실상 1시간을 넘지 못했고, 그 탓에 피곤할 수도 있음에도 메이나 여왕은 군말 없이 나를 따랐다.
오히려 피부가 반들반들하니 컨디션이 좋아보이는 게, 그렇게 존나 해댄 보람이 있었다. 내 허리도 거인의 힘 상시 유지 덕분인지 생각보다 건강했고.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간략하게 설명하고, 여왕과 메이, 거기에 약간의 인선이 추가된 채로 발데가리아로 돌아왔다.
조금 곤란하다던가, 약간의 유예가 필요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내 사람들은 내가 대륙을 넘어가야 한다고 하니 군말 없이 따르며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발데가리아와 고대의 도시 간의 연맹은 빠르고 명확하게 이뤄졌다.
그 연맹의 장은 나였으며, 그 연맹에 소속된 두 도시는 나를 왕으로서 섬기겠노라고 했다.
당연히 발데가리아에서는 약간의 불만이 제기되었으나, 내 무력을 알고 있는 다른 이들이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야 두 도시 간에 순간이동이 아닌 웜홀 같은 게 만들어졌다. 내가 공식 명칭이 있노라고 물었을 때에는.
"명칭이요? 그다지 없습니다만… 대전사님께서 원하신다면 웜홀이라고 부르지요."
라는 대공의 말에 따라 이 마법에는 웜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책임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웜홀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날라지는 온갖 장비와 물자, 그리고 선박에 실을 식량이나 의약품 등, 딱 보기에도 장기간 항해를 위해 필요하겠거니 싶은 물건들이 대공이 제공한 거대한 선박에 실려지는 모습을 보는 건 왠지 뜻 모를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무슨 타이쿤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렇게 대륙을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면서, 현재 발데가리아에 체류하고 있는 인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선 세레나와 세네카는 고대의 도시를 다스리던 노하우와 전투 경험으로 붉은 어머니라는 억제력을 잃은 탓에 몰려드는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겨울의 신부는 이제는 나와 떨어지지 않겠노라며 내 침실을 비우는 일이 없었고, 메이와의 적절한 타협 끝에 이렇게 말했다.
"다른 분들이라면 고민해봤겠지만, 메이씨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당신께서도 그게 기쁘시다면…."
내 허리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거인의 힘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서 매일 메이와 겨울의 신부가 만족할 때까지 박아대고 싸지르고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건 뜻 밖에도 살로메였다.
잘 몰랐었는데, 살로메가 헤로디아의 직계이자 후손이라고 한다.
붉은 주문의정당한 후계라서 어지간한 붉은 주문에 대한 건 다 알고 있었고, 마법에 대한 연구도 지금껏 적극적으로 행해왔던 그녀인지라, 헤로디아의 연구를 해석하는데에 적합했다.
어차피 준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는데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먹고 자고 떡치는 게 전부인 나에게는 살로메의 연구 협력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살로메의 연구실이 되어버린 헤로디아의 연구실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전사님, 드세요."
"오, 이거 오늘의 실험 재료인가요?"
"아뇨, 그냥 차입니다. 조금 피곤해보이셔서."
도마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지만, 살로메는 나한테 개수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헤로디아라면 모를까.
차를 들이키고는 입을 쩝쩝 다시며 찻잔을 바라봤다.
뭔데 이 맛.
뭐랄까… 향이라고 할만한 거 밖에 없었다. 원래 차를 아예 안 마시는 편이라서 이게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떠신가요?"
"음, 괜찮네요. 무슨 차예요?"
"허브입니다. 여기서 얻어낸 연구 자료로 길러낸 허브예요. 붉은색을 띄고 있었죠."
"뭐야, 실험 맞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니, 살로메는 제 몸에 걸쳐진 천조각을 펄럭이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다른 찻잔인가 싶었는데, 그 안에도 내가 들고 있는 차랑 같은 빛깔의 액체가 들어차 있었다.
"제가 직접 마셔보니 괜찮아서… 대전사님께도 대접해드리고 싶었답니다."
"오, 그럼 인정."
망설임 없이 차를 아가리에 들이부어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아서 밍밍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렸다.
이거 효과가 있긴 한 건가?
내 멍청한 표정과는 별개로, 살로메는 비늘로 뒤덮인 제 주둥이를 쓸고는 찻잔을 내려놨다.
그녀의 실험실이 되어버린 이 지하시설에서 뭔 연구를 도운지 이제 며칠 정도. 나는 턱을 괴고는 뭔 정체불명의 용기에 가득 담겨있는 초록색 액체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거, 신성 가진 괴물새끼들 쪼갤 때 몸에서 줄줄 새어나오던 그거 아닌가?
내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살로메가 제 꼬리를 들썩여 천조각을 들어올리고는내 앞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저게 궁금하신가요?"
"예, 뭔지 알아내셨습니까?"
내 질문에 살로메는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녀는 그 도마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다는 듯 즉시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묻습니다만, 대전사님께서 상대하신 실험체 중에 기이하게재생이 빠른 이들이 있다고 하셨었죠?"
"예, 고열과 강한 충격을 가하면 뒈지긴 했지만요."
"그 원인이 저 물약에 있었던 모양이예요."
물약인가?
저게?
딱 보기에도 얼추 색이 음침한 게, 물약이라기 보다는 독으로 쓰인다고 했을 때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외관이었다.
그래서 내가 의구심 섞인 눈빛을 보내는데, 도마뱀이라 인간의 표정을 잘모르는 건지 별 반응이 없었다.
"저 물약과 실험체들의 육체에 더 이상 신성은 남아있진 않았지만, 어떤 권능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갈라진 육체를 다시 붙게 만들고, 독을 밀어내고, 멈춰버린 혈류를 억지로 돌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권능이요."
익숙한 종류의 권능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지금껏 내가 획득하거나 목격한 권능 중에서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살로메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대전사님의 도움이 필요했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도움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피 뽑고 권능 쓰고 하는 게 전부였던지라 그다지 도움이라고 할만한 수고는 없었다.
하지만 살로메의 의중은 그게 아닌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실험 결과, 저 물약과 실험체들에게 담겨진 권능은 대전사님이 습득하신 권능들과 일말의 유사성도 없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즉, 4신이 가진 권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응? 그게 그리 되나?
유사성이 없다길래 얼추 내가 습득하지 못한 종류의 권능이겠거니 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새삼 헤로디아가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생명에게 깃든 생명력은… 창조신의 약소한 권능과도 같은 것. 그 약소한 권능을 끌어모아 자신에게 주입한다면 준신, 혹은 그보다 더 아래의 뒤틀린 모조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었죠.'
설마?
내가 의구심 섞인 표정을 지으니, 살로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씨발, 어떻게 알아먹었냐.
"아마 대전사님과 접점이 없는 가을의 마녀 역시 상관이 없을 겁니다. 대전사님이 사용하신 권능들에 반응하진 않았지만, 대전사님의 피에는 격하게 반응했으니까요. 비록 대전사님의 권능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특수한 방법으로 반신이 되신 대전사님의 피에는 격하게 반응한걸 보면… 저 물약은 창조신의 권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신. 내가 되자마자 내 측근들에게 알렸던 사항으로, 내 실험 조력에 피 뽑기가 들어가있는 이유였다.
창조신의 권능을 그러모아 신이 된다는 헤로디아의 계획을 메이가 스틸해낸 결과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살로메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얼추 알아들었다.
저 물약에 담겨진 창조신의 권능이, 내 육신을 타고 흐르는 창조신의 신성에 반응한다.
원리나 그런 건 좆도 모르지만, 그렇다는 얘기였다.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살로메가 무슨 앰플을 내밀었다. 검초록색의 무언가가 가득찬 앰플이었다. 이게 뭐냐는 듯 내가 고개를 들자, 살로메가 대답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시제품입니다. 이름은… 초재생 물약 정도… 되겠지요."
이게?
내가 그 물약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리니, 살로메가 뱀처럼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고는 길쭉한 주둥이를 열어 말했다.
"붉은 어머니께서 남기신 말에 따르자면, 창조신의 권능의 편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물약을 바라보았다.
그 물약은 거뭇하고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봄의 순례자는 왜 이런 걸 만들고, 왜 헤로디아에게 신이 되는 방법을 알려준 걸까.
그리고 대륙을 건너가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
어느 제국의 수도, 한 무리의 병사들이 어떤 침입자에게 창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 침입자는 짐짓 여유로운 태도였는데, 그 뒤에 널려있는 기사단의 무수한 시체를 보자면 그 까닭이 이해가 갔다.
보통이라면 이런 위급 상황에서는 전 병력이 몰려들어 둘러싸야겠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진 않았다.
병사들의 멀찍한 뒤에서 긴장한 표정을 짓는 젊은 황제가, 그 침입자의 발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발에서 빠져나와 지천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뿌리를.
'이게 무슨….'
길게 뻗어나온 뿌리는 마치 제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뻗어나와 성을 메우고 있었다.
성이라고 하면 온갖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복합적인 건축물.
그렇기에 어떤 거대한 생물을 가져오더라도 한 번에 메울 수는 없다.
게다가 유사시에 제도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지, 그 회랑은 무척이나 넓고 거대했다.
그런데 그 성이,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틈 없이 거대한 뿌리에 뒤덮여 있었다.
그게 지원 병력이 없고, 잔존 병사가 죄다 죽었으며, 가장 인근에 있을 수도회에 있을 모든 병사들이 검은색 혈관에 뒤덮인 채로 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이유였다.
황제는 솔직하게 절망했고, 마지막 남은 병사 두 명은 침을 삼키면서 다리를 떨었다.
한 편,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봄의 순례자는 이제서야 안도했다.
'그 괴물놈이 지나치게 강할 뿐, 원래는 이게 맞지.'
그는 머릿 속에서 어떤 괴물을 떠올렸다.
말하는 거나 하는 짓거리를보면 분명 견습 전사도 안될텐데, 싸우는 모습을 보면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 전사 같았다.
묘하게 솜씨가 좋았다. 묘하게 동작과 행동거지에서 노하우가 있었다.
전략이나 병기술에 관한 책을 독파하는 달인들도 그렇게 싸우진 않는다. 온갖 전투를 직접 겪어본 전사나 용병처럼, 경험으로 체득한 기술로 싸우는 놈이었다.
봄의 순례자는 등 뒤로 자라난 뿌리에 눈을 돋아나게 하여 뒤를 보았다. 쌓여있는 시체 중 하나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리 권능이 있었다지만….'
그가 방금 죽인 어떤 병사는, 황제의 근위대장이었다. 길게 자란 수염에 어울리게도 무척이나 강하고, 수십년을 전장에서 구른 경험 탓에 만만찮은 역전의 용사였다.
하지만 그런전사도 결국 봄의 순례자에게 패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힘의 부족.
즉, 권능이든 마법이든 힘만 충분했으면 화신이나 대전사도 아닌 지금 육체로는 이길 수 없을 수준의 전사였다.
그래서 봄의 순례자는 새삼 주현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족히 수십년을 싸운 전사와 맞먹는 수준에, 가끔씩 떠오르고는 하는, 이유 없는 친숙함이 감도는 정체불명의 야만인.
마치 수십년을 봐온 것 같은 익숙함이 그 대전사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걸 생각하느라 눈앞을 보고 있지 못했다.
까아앙!
'…이런, 너무 위압감을 주고 있었군. 이겨내지 못하고 달려들다니.'
봄의 순례자는 반사적으로 뿌리를 움직여, 뻗어지는 창날을 거둬내며 병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피로 가득 채워넣은 축구공처럼 질퍽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머리는, 투구를 시작으로 벽에 부딪히고는 산산히 부숴져 내용물을 흩뿌렸다.
불필요하게하나를 더 죽여버렸지만, 그렇게 문제될 건 없었다.
남은 한 명의 근위대는, 제 동료가 무슨 닭의 목을 비트는 것처럼 쉽게 죽어버리자 결국 창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끄윽끄윽 울면서 쓰러졌다.
그 틈으로 황제가 앞으로 나섰다. 병사가 떨어트린 창을 집어들었다. 자세가 꽤 능숙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순례자가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황제가 몸을 움찔했다. 평소의 순례자라면 그냥 죽였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목표는 황제를 죽이는 게 아니다. 겁을 먹었지만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황제를 바라보던 봄의 순례자는 입을 열었다.
[어린 황제야, 혹시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황제는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다가, 결국에는 의문을 표하며 기절했다.
봄의 순례자는 혀를 차고는 뿌리를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