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바다의 주인
넓은 바다, 그야말로 물과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그바다 위에 배한 척이 떠있었다. 배에대해서 좆도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얼추 다목적에 원정은 가볍게 수행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한 배였다.
나는 그 배 위에서, 출항할 때와는 달리 여유롭게 배 위에 걸터앉거나 한가하게 술을 들이키는 선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에 유리된 건 나와 메이, 겨울의 신부 뿐이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곤란해하는 우리 일행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건 세네카였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보다는 다소 길어진 회색 단발을 어깨에 드리운 채로, 항해에 적합하게 가벼운 셔츠에 흉갑만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눈을 돌리고는 대답했다.
"…아뇨, 별 건 아니고… 뭘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서 여기 그냥 서있었죠."
"…예?"
세네카는 내 말에 당황스러운지 눈을 크게 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그 굵은 팔뚝을 여과 없이 드러낸 채로 배에 기대거나 한 채로 여가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또 그런가 해서 유심히 보면, 몇 명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살피거나 하면서 경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세네카 역시 그 점을 아는지,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냥 쉬고 계시면 됩니다. 굳이 주현성씨가 나설 일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예, 항해의 대부분은 시간을 떼우는 것과 정찰이 전부라더군요. 항해는 제 전문이 아닌지라 저도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주현성씨는 편히 쉬고 계셔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요 며칠 좀 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이 다크 판타지에 떨어지고 나서 그리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쉰다는 사실이 좀 검연쩍게 느껴지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세네카의 말을 듣는 게 맞아보였다. 그 생각은 메이 역시 같았는지, 이제 메이는 선체 하부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네카는 그런 메이를 바라보는 나를 보더니 제안했다.
"정 하실 게 없다면… 방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발데가리아 대공께서도 주현성씨의 방은 세심하게 선정했다고 하더군요. 장식도 다 본인이 도맡아서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한 번 봤는데 대단하더군요."
…굳이 그렇게까지?
대공이 굳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후빨을 해주는 이유는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었다.
내가 그렇게 딱히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대공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살짝 미심쩍어할 찰나, 메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이 잡아당겨져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니, 메이가 생글거리면서 재차 내 손을 잡아끌었다.
"구경 가자!"
"…그래, 어차피 할 거 없긴 하니까."
세네카는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선체 하부에 처음 들어와봤는데, 생각보다 배의 하부는 넓찍했다.
넓은 그 하부에는 이런저런 하적품들이 쌓여있었고, 그 한 켠으로 몇명의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지나가려고 했지만….
"아, 대전사님!"
"함께 승선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전사님."
이렇게 나를 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기는 통에, 나는 삽시간에 하부에서 일하던 모든 선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기인은 이렇게 피곤한 건가. 나는 내게 말을 건네는 이들에게 짧막하게 대응해주며 내 방까지 느리게 전진했다. 결국 쌓여있는 몇 개의 식량상자를 지나쳐 도착한 내 방은, 밖에서 보기에도 상당한 크기였다.
"이거 공간 낭비 아닙니까?"
그래서 대공이 애써 꾸며줬다는 말에도 볼멘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세네카는 내 말에 곤란한듯 웃더니, 문을 열어젖혔다.
"너무 그러지 마시고, 우선 확인해보시죠."
"아니 뭐 얼마나 꾸며놨…다고."
그렇게 열어젖혀진 내 방은, 내생각대로 거대했다. 대공이 직접 꾸몄다는 말은 맞는지, 안에 들어가있는 장롱이나 침대, 테이블부터 어지간한 가구는 얼추 보기에도 최고급품으로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내 눈을 잡아끄는 건, 침대였다.
딱 보기에도 얼추 킹사이즈는 될 법한 거대한 침대. 3P를 하고 셋이 지쳐 잠들어도 딱히 문제 없이 쉴 수있을 것 같은 침대였다.
대공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냐고 생각했는데, 침대 크기를 보자면 얼추 알만한 건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렇게 매일 같이 해댔는데 모르면 병신이지.
"와, 진짜 크다. 셋이서 자도 되겠는데?"
"셋이서 한꺼번에 뒹굴어도 되겠지."
내 말에 메이가 내 허리를 팔꿈치로 툭 치더니 붉어진 얼굴로 변태. 하고 속삭였다. 나는 그런 메이의 머리를 꾹꾹 눌러 쓰다듬고는 세네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네카는 미묘하게 얼굴이 붉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선장실로 가실까요?"
세네카는 그렇게 제안하더니, 혹시 내가 거절할까 덧붙였다.
"선장이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비춰달라고 하더군요."
애초에거절할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선선히 동의하고는 그녀를 뒤따랐다. 메이와 겨울의신부는 방에 남았고.
그 뒤에야 세네카의 안내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는데, 그 방은 내 방으로 배정받은 공간보다 살짝 컸다. 그 큼직한 문짝 앞에서 나는 이 방의 중요성이 부디 내 방보다 크기를 바라면서 문을 열어젖혔다.
넓찍한 실내에 잘 어울리는 거대한 테이블에는, 지도와 이런저런 도구들이 놓여있었다. 몇 개는 얼추 내가 보기에도 항해 목적의 도구인 듯 싶었고, 그렇지 않아보이는 물건들도 나름의 용도가 있겠거니 싶은 외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테이블을 두고, 두 명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의 수염이 수북한 전사와, 딱 보기에도 학자나 책사가 어울릴 것 같은 호리호리한 외양의 청년.
그 둘은 항해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는 중인 듯 보였다.
"중간 보급은 필요합니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항상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그럴 필요가 있나? 내 이 바다를 이번으로 4번째 지나가는데, 이 바다에 위험한 건 없으니 그냥 지나가도 된다니까. 지금 적재량이면 충분하잖나."
둘이 주고 받는 대화에 내가 문간에 서서 멀뚱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세네카는 잠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흘렸다. 그제서야 두 남자는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며 내 쪽을 바라봤다.
"아, 대전사님. 오셨군요."
그런 나를 반긴 건 호리호리한 쪽이었다. 그는 얼핏 웃으며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는데, 바로 옆에 서있는 우락부락한 남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대충 목례만 했다.
호리호리한 쪽이 다시 내게 말을 건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배의 항해사를 맡고 있는 밀튼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대공님 밑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쪽이 항해사였나. 나는 그 호리호리한 체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에 멀뚱히 서서 목례만 했던 전사가 입을 열었다.
"그 뭐냐… 나는 욘이라고 합니다. 대전사 나으리.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혹시 나한테 개소리라도 할까 걱정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자신을 욘이라고 칭한 전사는 퍽 괜찮은 태도로 말을 걸었다.
이 딱 봐도 야만인 계열의 전사로 보이는 남자가 왜 나한테 친근하게 굴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욘은 제 수염을 쓸더니 말했다.
"듣자하니 대전사 나으리는 겨울의 폭군의 선택도 받은 진정한 대전사라고 하던데, 그런 거라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부하놈들도 얼추 대전사 나으리한테 싹싹할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쇼. 딱히 내가 대전사 나으리가 취향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이라면 접어둬도 좋고."
욘은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 손을 내저었고, 나는 그에 겨우 안심하고서 테이블에 다가설 수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그 유사 바이킹은 내 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대전사 나으리를 직접 섬길 수 있다기에 받은 의뢰니까,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 웃었다.
"그럼 왜 불렀는지부터 알려주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조용히 나와 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항해사가 말을 받으며 용건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들과 간단하게 항해가 얼마나 걸릴지, 어떤 문제가 생길지에 대해서 얘기한 후에야 지도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지도실에서 돌아오자마자 갑옷을 풀고, 무기들을 내려놓은 후에는 정리에 시간을 쏟았다. 지도실 자체에서도 오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만은 않았지만, 겨울의 신부와 메이가 도와주니 정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정리가 끝나고 나서는 또 할 일이 없어져, 우리는 결국 오늘은 일찍 잠에 들기로 하고는 큼직한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잠에 들었다.
평소라면 광란의 난교파티라도 벌였겠는데, 흔들리는 배가 익숙치 않다며 멀미를 호소하는 메이를 감안해 우리는 그냥 얌전히 쳐자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두 여자가 내 몸에 딱 달라붙은 채 새근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메이는 아예 내 팔을 베개 삼아 누운 채로 몸을 뒤척였는데, 뒤척일 때마다 여체 특유의 부드러운 향이 훅 풍겨 참기 힘들었다.
얜 또 왜 다 벗고 있어.
"…으응…."
무슨 꿈을 꾸는지 훤히 드러난 내 팔뚝을 입술로 지분대더니 다시 조용히 새근댄다.
그렇게 곤히 잠든 메이를 바라보니, 여체 특유의 보드라운 냄새가 풍겨왔다. 주로 메이의 피부에서.
나는 그 자극적인 냄새를 맡으면서 메이의 뺨을 덮은 머리칼을 쓸어서 넘겼다. 그러자 메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흘렸다.
괜히 심술이 돋아 메이의 큼직한 빨통을 그 빨통이 얹어진 내 가슴팍 위에서 내리면서 한 번 주무르고, 잠들어 조용한 겨울의 신부의 이마에 입맞추고서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을 딛자마자 새벽 특유의 스산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새벽 맞나?"
바깥도 껌껌한 게, 다들 자는지 불을 꺼둔 모양이었다.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죽바지를 집어들어 입고, 셔츠를 두르고는 단추를 잠그면서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철썩
파도가 배에 부딪혀 자아내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속도감이 느껴졌다. 배가 아직도 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울렁거림에 익숙해지려 나무로 된 바닥에 천천히 발을 디디면서 앞으로 나섰다.
삐걱거림에 익숙해지고 갑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일 무렵, 불이 피워진 랜턴과 함께 한 명의 인영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어우, 씨발 내 눈.
"…아, 주현성씨."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훅 끼쳐오는 빛에 눈이 아렸지만, 내 눈앞의 사람은 내 그런 모습을 보고는 부랴부랴 랜턴을 꺼트렸다.
불이 거둬지고 나서야 눈앞의 사람이 세네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네카는 어깨까지 오는단발을 늘어뜨린 채, 몸에 긴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스며드는 달빛에 그녀의 회색 머리칼이 빛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게 물었다.
"잠이 안 오십니까?"
"아뇨, 방금 깼죠. 세네카씨는 좀 주무셨습니까?"
"하하… 배가 흔들려서 그런지 그다지 잠을자진 못했습니다."
세네카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양손으로 쥔 랜턴이 그 동작에 들썩였다.
흠, 잘됐네. 나는 세네카에게 말했다.
"그럼 더 주무시러 가시진 않겠네요?"
"예? 아, 예. 아마 당장은 잠들긴 힘들 것 같네요."
"잘됐네요. 전 원체 한 번 깨어나면 잠이 잘 안 오는 터라, 얘기나 하실까요?"
우리는 바로 옆에 있던 계단으로 향했다. 그 계단에서 그녀는 제 오금 뒤쪽에 손을 얹어 가운을 접어 앉았고,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잔잔한 한기가 마음에 들었다.
세네카는 그렇지 않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짝 쌀쌀하네요…."
"옷이라도 벗어드리고 싶은데 이거 벗으면 저도 알몸이라 그건 힘들겠네요."
"괜찮습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 걸요."
세네카는 생긋 웃더니 랜턴을 계단에 내려놓고 비스듬하게 다리를 기울였다. 그 탓에 가운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조용한 바다 위에서 울렸다.
그녀는 그러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문득 침묵을 가르는 순간에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좀 마음이 복잡해서 말입니다. 작년에만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망망대해에 있는데다 어떻게 하면 신과싸우려는 분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기대어진 머리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나는 잠시 대답을 골라냈다.
새삼 생각해보면 세네카와 길게 이야기해본 기억이 없었다. 세네카는 항상 대답은 간결하게, 업무 관련으로만 말을 하는 편이었고, 그 탓에 나도 그녀를 그렇게 대하고는 했다. 심지어는 제 동생과 함께 내게 안길 때에도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세네카의 이런 말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뜻밖이었다.
나는 대답을 골라내다가 그냥 세네카의 정수리에 내 머리를 툭 부딪히고는 그녀의 팔뚝을 거쳐 손을 꼭 쥐었다.
"…아."
세네카는 내 행동에 놀란 듯 흠칫했다가, 손을 강하게 쥐고는 내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눈을 질끈 감은 걸 보자면 부끄러운 것처럼 보였지만, 떨어질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는 그런 세네카의 이마에 입맞추고는, 나직히 속삭였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아시겠죠? 제가 실망할까 걱정하지 마시고."
진짜 미친 짓 하는 거 아니면 앵간하면 넘겨줄테니까.
뒷말은 삼켰지만, 세네카는 아무래도 좋은지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맞닿은 가슴팍에서 거세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소리가 아닌, 이미 몇 번 몸을 섞었던 여자의 심박음이었다.
항상 동생과 함께 내게 안기고는 했던 그녀는, 드디어 나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는지 얼굴을 붉힌 채로 우물쭈물했다.
얘, 은근히 귀엽네.
나는 고개를 숙여 세네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네카씨가 어디서 주무시는지, 알려주실래요?"
세네카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