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바다의 주인
"무슨 일입니까?"
바깥으로 나오니 선원들인 게 분명한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제 도끼나 짧은 칼을 꺼내든 채로 흉흉한 기색을 흘리고 있었다. 몇명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배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노골적으로 놀라는 반응을 보여준 후에야 대답해냈다.
"모르겠수다. 갑자기 어디서 종이 치니까 그냥 깨어나서 무기부터 챙겼지. 대전사 나으리도 그런 거 아닌가?"
뭐, 그렇긴 한데. 나는 내 몸을 두른 갑주를 흘긋 바라보는 전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허리춤의 도끼를 더듬어 그 자루를 쥐었다.
갑작스레 종이 울려서 세네카는 상황을 파악하러 나가고, 나는 방으로 돌아가 갑주를 챙겼다.
겨울의 신부는 방금 막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충실하게 갑주를 입혀주었다. 그렇게 갑주를 챙겨입고 나서는 메이를 깨워 준비시키고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
예상 밖인 건 아니었지만, 세네카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항해실이나 선장실 등지에 있는 모양이었다.
눈쌀을 좁히며 앞을, 밤안개가 가득 낀 바다를 내다보는 순간 누군가 돛대에서부터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씰룩이는 엉덩이가 바닥에 내려앉고서야 나는 그게 세네카임을 알아차렸다.
"아, 주현성씨."
여전히 세네카는 목이 쉬어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진 않는지, 졸린 눈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졸음을 쫓아내고 있는 메이와 나를 한 번씩 지그시 봤다. 그렇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매가 살짝 휘더니, 한숨을 뱉어낸다.
뭔 일이지? 심각한 일인가?
"우선… 오신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참 착잡하게도 종을 울린 건 딱 맞는 조치더군요. 누가 울렸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제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는데, 그 끝에서는 졸음보다는 과한 섹스로 인한 미미한 피곤이 느껴졌다. 괜시리 미안해지네.
어쨌거나,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피로를 쫓아내더니 말했다.
"배가 출몰했습니다. 종소리는 그 배에서 들려왔습니다."
보통의 바다라면 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이상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해전을 준비할 수는 있더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낮에 항해실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을 욘이라고 칭한 선장의 말이었다.
'이 인근 해역엔 아무것도 없소. 이 근처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나오겠냐만은… 이 근처에는 해양괴물도 그다지 없는 편이라고. 여기 항해사 꼬맹이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요.'
뭐가 없을 거라는 거야, 이 씨발.
나는 그 갑작스러운 선박의 출몰이 굉장히 불길한 신호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야습을 걸어오거나 대포를 쏘는 게 아닌 종을 울렸다는 점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응?"
메이는 이해하지 못했는지 졸린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내쉬는 나와 세네카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결국 세네카는 참다 못해 말했다.
"이 근처는 섬 하나 없습니다. 완전한 망망대해죠.만약 배가 출몰했으며,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는데다 먼저 종을 울렸다면 결코 좋은 일일리는 없겠죠. 과하게 이상합니다."
그녀는 시큰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며 그렇게 대답했는데, 메이는 그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찾진 못했는지 그 큼직한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깜빡이다가 그렇구나, 하고 반응했다.
그래, 확실히 그랬다. 봄의 순례자가 대륙을 건너갔던 걸 떠올린다면, 그 새끼의 수작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득 떠올라 세네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 생각해보면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나? 뭐 본 건 없나?
"…근데 그 배는 어쩌고 있는 겁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위에서 뭘 보고 왔냐는 질문. 내 질문에 세네카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고르는지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눈이 가늘게 떠지더니 잠시 그녀는 그 굳은살이 알알히 박혀있는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그게… 이상합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는 있지만… 그 외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갑판 위의 사람들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요."
…응?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니.
자세한 모습은 못 봤나 싶어 약간 의아할 찰나에, 전사 중 하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온다! 배다!"
그 말에 걸맞게, 고개를 들어올려 슬쩍 바라보니 밤안개를 가르고 무언가 접근하고 있었다.
구름을 갈라내는 비행기처럼, 밤안개를 걷어낸 거대한 함선이었다. 겉면에는 붉은 도료를 칠했는지 화려한 장식과 어우러지는 웅장한 선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이윽고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단단한 목재 공성병기들이 보였다.
함선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량했는지 다소 크기는 작았으나, 배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병기들.
내가 타고 있는 배 정도는 일제사격으로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을 배.
거기에 높게 걸려진 4개의 돛에는 큼직하게 화려한 붉은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씨발."
하지만 그 무엇도 내 눈을 잡아끌진 못했다. 사실 얼마나 큰 배라고 하더라도, 화신 강림을 쓴다면 일격에 격퇴할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니까.
가장 인상적인 점은 갑판 위에 있었다. 수평하게 우리의 배 옆에멈춰선 그 배에는, 수십에 달할 사람들이 굴러다니고있었다.
"…이게… 무슨…."
세네카가 토해내는 경악과 함께 메이가 불안한 눈으로 내 손을 꼭 쥐는 게 느껴졌다.
그 둘 뿐만이 아니라,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강성한 전사들도 얼어붙었다.
나 역시 다소의 불쾌감을 어쩔 순 없었다. 눈앞의 펼쳐진 참상을 보고 얼어붙지 않을 새끼는 없었다.
곱게 발라낸것처럼 산산히 분해되어 흩어진 시체들. 머리를 가로로 잘라내어 먹을 것을 플레이팅 하듯이 즐비하게 세워둔 풍경.
거기에 내장을 곱게 발라내어 내용물을 전부 바닥에 쏟아낸 듯한,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벌어진 선상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세네카가 했던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겨우 이해했다.
*
삐걱
시체가 즐비한 선상에서는 삶의 흔적이 드물게 남아있었다.
예를 들자면 먹기 위해 적당히물에 적신 것처럼 보이는 건량이라던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여다보고 있었을 일기장이라던가.
죽어나간 이들은 신분이 높은 이들도 섞여있는지, 글귀나 화려한 주사위 등의 취미 역시 눈에 띄었다.
"…으윽…."
내 뒤를 따르던 메이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뭐라고 꾸중하기는 뭐했다.
우리는 돛대를 칠한 내장조각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고는 걸음을 내딛었다.
"도대체 뭐에 이렇게…."
세네카가 그 뒤에서 우리를 뒤따르며 활을 이리저리 겨누는 동안, 나는 선상 한 켠에 있던 해치를 열어젖혔다.
열어젖혀진 해치 안에서는, 선상에서보다 더욱 짙은 죽음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늘러붙은 내장에서 나는 악취에 부패가 시작되기 전 육혈의 미묘한 비릿함.
이런 걸 맡아본 적이 드뭄에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할 수 있었다.
얻어낸 권능 때문인가. 아니면….
부풀기 시작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심호흡 한 번을 들이키는 것으로 무마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으으… 이상한 냄새."
메이가 코를 막고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어둑한 하부에 먼저 들어섰다.
예상대로 갑판 아래에는 더욱 시체가 많았다. 그나마 갑판 위와차이를 둔다면, 갑판 위에 있는 시체들은 고통스럽게 찢어진 반면 아래에 있는 시체들은 좀 더 단숨에 죽였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냈다. 화려한 도끼를 타고 드글거리던 불꽃은, 내 허리춤을 벗어나자마자 맹렬하게 타오르며 주변에 빛을 밝혔다.
그 도끼날에 화염 부여를 겹쳐 사용하니, 곧 그 불꽃은 하부갑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강한 빛을 발했다.
"우욱."
메이는 그렇게 피워낸 불꽃이 비추는 풍경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토사물을 흘리지 않도록 인상을 찡그린 채로 주춤주춤물러나면서, 다른 손을 뻗어 마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네카는 그 광경에 눈쌀을 찌푸리긴 했지만, 화살을 활에 걸치며 사방으로 조준을 달리할 뿐 별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둘의 반응을 각각 살핀 후에야 도끼를 한 켠으로 겨누었다.
"…죽은지 얼마 안된 것 같네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겨눈 방향에는 물이 차있었다. 내 발목까지 들어찰 정도의 물이, 하부 갑판에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배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이하긴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 눈에 띄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시체들을 유심히 살폈다.
죽은 시체들은 거의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 세네카의 말대로 죽은지 얼마 안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해보였다.
전문적인 부검의가 아니라서 상세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의 절멸은 우리가 이들의 배를 발견한 직후 내지는 발견하기 바로 직전 쯔음에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저항하려 검을 들고 있으나, 그 칼이 부러져 목에 박혀있는 병사에게 몸을 숙였다.
"…세네카씨. 혹시 문양이 눈에 익는지 좀 봐주시겠습니까?"
나는 그 병사의 어깨 쯔음에 달려있는 문장이 새겨진 장식물을 떼내어 세네카에게 내밀었다. 세네카는 활을 한 켠으로 겨눈 채 고개만 살짝 돌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건넨 문양은 사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붉은색으로 칠해진 사자의 갈기는 타오르는태양처럼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겉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혹여 세네카가 알고 있는 이들일까 했는데, 세네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내게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양식을 가진 이들 정도는 있지만, 아예 똑같은 이들은 없습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서 문장을 도구낭에 밀어넣었다. 전사들 중 누군가는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도구낭에 집어넣는 짧은 시간에, 무언가 어둠 속에서 다가왔다.
절퍽, 절퍽
울리는 물소리와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
허리춤에 도로 밀어넣었던 도끼를 낚아채내미는 순간, 한 눈에 보기에도 멀쩡해보이지 않는 병사가 내 앞에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동공은 오랜 시간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인지 커다란 한 편, 손에 든 무기는 볼품 없이 망가져 있었다.
마치 거인이 손아귀에 넣고 쥐어짜낸 것처럼.
게다가 그의 전신에서는 은은하게 쓴냄새가 났다.
워낙 갑작스러운 등장이라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 병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람이오?"
뭔 씨발 이렇게 클리셰적인 질문이?
내가 눈쌀을 찌푸리니 뭐라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 맞소? 사람이 맞는 것이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아니오?"
"…뭐로 보이는데? 당연히 사람이지. 넌 뭔데?"
남자의 동공은 내가 내밀고 있는 도끼를 직시하고 있음에도 거대했다. 마치 눈앞이 이미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남자는 적의 하나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갑자기활짝 웃었다.
"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이제 집에… 다 끝난 거야…."
그리고는 그큼직한 동공에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륵 떨어졌다. 남자는 잠시 휘청대더니 바닥에 무릎 꿇고서 눈물을 흘렸다.
씨발, 갑자기 뭔 일이야.
명확히 공황장애가 온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하는 횡설수설을 무시하고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 남자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남자는 안도의 눈물을 짓던 방금과는 달리,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돼, 안돼. 물이 있잖아. 물이 있다고!"
"뭐?"
"물이 있다고! 어서 빠져나가야 해, 씨발, 위로, 위로 가야해! 아니지, 위도 안전하지 않아 위도! 아, 아아아…!"
남자의 횡설수설은 점점 심해졌다. 메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세네카가 주변을 경계하던 그대로 내게 고개만을 돌린 상황에서, 나는 귓전에 울리는 소리에 눈쌀을 좁혔다.
기기기기긱
나무를 서서히 꺾어내는 것만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
거인이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만 같은 소리.
수압에 찌그러지는 나무의 소리를 묘사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를 소리.
나만이 아닌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을 무렵, 남자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온다! 온다! 놈들이 온다! 온다고!"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쳐박는 동안, 나는뒤로 돌아 메이와 세네카를 낚아채고는 날듯이 계단을 올랐다.
쾅!
언제 다시 닫혔는지 위에 드리운 해치를 머리로 들이받아 여는 순간, 나는 보았다.
"…씨발."
높게 치솟은 파도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배를 휘감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배가 아닌, 이 배를.
다행히 우리가 타고온 조각배가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이 꼬라지라면 멀쩡하게 탈출하기는 힘들어보였다.
"혀, 현성아."
메이 역시 그걸 알았는지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를 흘렸다. 세네카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불안한 듯 싶었고.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타고 여기까지 왔었던 배 자체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도약해서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삐걱
내 발밑의 나무판자가 자아내는 소음과 은근히 무른 느낌이 들면서 파고드는 걸 보자면, 도약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도약했다간 그대로 바닥이 부숴져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은 도약으로 목표한 지점까지는 커녕 절반도 못 가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작정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아까 그 남자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놈들이 온다!'
이 자연현상이 누군가의 고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내 눈이 조각배에 닿았다가, 두 여자에게 향하고, 다시 내 손으로 향했다.
결단은 의외로 쉬웠다.
"메이, 세네카. 조각배에 올라타세요."
"응?"
나는 재차 말하지 않고 조각배를 집어들었다.
거인의 힘으로 증폭된 근력 탓에 조각배는 가볍게 내 손에 들려 선상에 올라왔다. 삐걱이는 나무판자가 불안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는다. 나는 메이와 세네카에게 고갯짓했다.
"으, 응. 어쩌게? 뭔가 떠오른 거야?"
"응. 오지는 걸로 하나 떠올랐다."
"그, 그치? 난 현성이 믿고 있었어!"
메이가 애써 웃으며 조각배에 오르고, 세네카는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그 위에 몸을 실었다. 두 여자가 올라탄 조각배는 아무도 타지 않았을 때와 비교했을때 그다지 무게의 차이가 없었다.
내가조각배를 들어올리자, 그 위에 있는 메이의 숨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금니 꽉 깨물고, 배 꽉 잡아라. 뒤집어지면, 메이 수영 잘한다고 했었지?"
"으, 어. 응? 무슨 말이야? 뭐하려구?"
믿고 있다며 임마.
내가 피식 웃고는 갑판 끄트머리에 다가서자, 세네카가 깨달았는지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현성씨, 설마."
"예, 그 설마니까. 메이 수영 잘하거든요? 혹시 뒤집어지면 메이한테 의지하세요."
"어, 뭐가? 뭐하는 건데, 현성아?"
메이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는 조각배를 머리 높이 든 채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쿠와아아아아!!!
꺄 아 아 아 아 아 악!
팔을 앞으로 향하며 조각배를 내던졌다. 내던져진 조각배는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올라 타고 왔었던 배 근처에 떨어졌다.
뒤집히더라도, 메이는 수영을 잘하니까. 배가 뒤집혀도 잠시는 부력이 있을테니 괜찮겠지.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전사들이 도와줄테고.
나는 두 여자의 흐릿한 신형을 보다가 부숴져 발목까지 파고든 나무판자에서 발을 빼냈다.
"역시 도약은 무리였나."
만약 뛰어올랐다면 힘이 부족해 곧장 떨어지거나 바다 한 켠에 떨어졌을테니,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 반면, 지금의 경우엔 메이와 세네카를 안전한 곳에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악은 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나 혼자라면 뭔 일이 벌어져도 살아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대자연에도 통용되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렇게 나 혼자 남은 갑판 위에,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제 의지를 가진 듯 치솟던 파도는 이제는 벽 같은 모습으로 배를 휘감았다. 빽빽하게 들어차는 물이 발목까지 메울 무렵, 나는 그 파도의 벽 속에서 꿈틀대는 형체를 보았다.
그건 생물이었다.
두 발로 걸어다니는 듯, 물 속에서 수영하는 인간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물고기 대가리의 생명체.
손에는 조악한병기를 들고 있는 어인.
그들이 파도 속에서 나를 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둑한 물속에서 그 물고기 눈알이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폭군의 검 가져올걸 그랬네."
내가 킬킬 웃으며 도끼를 끌어내려 쥐자, 그 파도 속에서 어인들이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