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바다의 주인
"개새끼들."
나를 빼곡하게 둘러싼 채로 쉭쉭거리는 소리나, 부글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에워싼 채 주시하는 어인과 심해인 새끼들.
이들의 태도에서 아까와 같은 급박함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들은 명백히 승리를 자신하는지 오히려 한풀 여유로워진 태도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투구 하나만 박살나면 패배. 저쪽의 패배 조건은… 글쎄. 전멸 외에 그런 게 있긴 한가?
이쪽은 저쪽이 정확히 어떻게 싸우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 끽해야 이렇게 포위한 채로 병력을 밀고 들어오다가, 의표를 찌르려고 한다는 것만 알았는데 그마저도 완전 정답은 아니었다.
내 눈이 흘긋 전기톱 방패가 긁어낸 흔적을 바라보니, 왕이 그 방패를 팔에 찬 채로 슬쩍 웃었다.
얼추 방금 일어났던 일을 떠올려본다.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는데, 내가 피하는 자리에 정확히 방패를 던진 건, 밀려오는 군세 틈에서 해낼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정확히 내가 어디로 피할지 알고 있던 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방금, 내 생각을 읽는 것처럼 보였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이런 씨발."
당연한 생각인데 왜 못하고 있던 거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당연히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예측할 수 있겠지. 내가 어디로 피할지 알아내고 던진 거라면 얼추 말이 되었다.
저들의 여유는 거기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막말로 막무가내로 몰려들어도 힘들어질텐데, 그 상태로 저 빌어먹을 방패라도 던진다면.
그 뒤에 일어날 일은 굳이 가늠할 것도 없었다. 주현/성이 되어버리겠지.
"에휴, 씨발. 내 팔자야."
그냥 편안하게 항해나 즐기면서 떡이나 좀 치고, 밥도 잘 쳐먹고, 바다 여정을 좀 보내려고 했건만, 세상은 어째 날 내버려두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날 따먹으면서 죽이려고 드는 미친년을 해치우느라 고역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먹어치우겠다는 씹새끼들까지?
단단히 쥐었던 손을 풀어서,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산물 새끼들은 나를 내려다볼 뿐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거 존나 여유롭네, 씨발놈들.
어쨌든, 그 덕에 나는 시간을 벌었다.
내려다본 검은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수리를 얼마 전에 받았음에도, 이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썰어대고 날아오는 공격을 걷어내느라 상당히 손상이 쌓여있었다.
어쩌면 심해의 압력이 칼에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칼자루는 이미 덜컥대고, 십자막이는 이미 제 역할을 못하고 너덜너덜했다.
바다에 빠질 당시만 하더라도 나름 유지는 하고 있던검날도, 여기저기 이가 나가고 금이 가있었다.
승산은 여기에 달려있지만, 그 방법을 실행하면 분명히 그레이톰의 심판은 부러진다.
겨울의 신부가 해주는 아이템 수리는, 완전한 파손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만 작용하는 기능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정해야했다.
나를 좋아해주고, 나도 꽤 좋아하는 사람이 넘겨준 추억이 깃든 물건을 작살내고 목숨을 구할지, 아니면 목숨을 내던지고 이걸 건질지.
솔직히 고민할 수가 없는 문제였지만.
"…하, 어쩔 수 없지."
그레이톰의 심판을 양손으로 쥐었다. 쥐어짜는 듯한 손동작에도 칼자루가 덜덜 떨리고, 칼날이 비명을 지른다.
꺼져가는 불이 가장 격하다는 말을 증명하듯, 흐려지고 있던 회색빛이 점점 거칠어졌다.
'…뭣?'
그 마지막 불씨에 심해인들이 어찌할지 고민하고, 몇은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자세를 잡았다.
양손으로 쥔 그레이톰의 심판을 당겨, 칼날을 내 몸 가까이 붙이고 칼자루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그레이톰의 심판이 뿜어내는 검기는, 휘두르는 궤적과 힘의 크기에 따라 커진다.
즉, 강하게 휘두를 수록, 휘두르는 각도가 커질 수록 그 검기도 막강해진다.
하지만 내구도를 신경 쓴 탓에, 단 한 번도 전력으로 휘두른적은 없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칼이 완전히 박살날 정도로 강하게 휘두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숨을 들이키자, 투구에 걸린 능력이 산소를 여과해 내 폐부 곳곳으로 보냈다. 들끓는 근육과 혈관을 응축하듯 몸을 틀고, 검을 쥔 손을 단단히 굳혀 자세를 잡았다. 칼끝으로 겨누는 건 허공이고, 내 몸으로 겨누는 건.
[영원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이 공간 전체.
이 무저갱 안에서 최대한 강력하게 검기를 뿜어낸다. 부러뜨릴 것을 각오하고. 그 뒤의 전투는 운에 맡긴다.
수를 쓰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수싸움에, 심해인들이 당황하여 다가오지 않는 사이. 나는 응축했던 힘을 풀어냈다.
꽈릉!!!!
발을 틀어 몸을 회전시키고, 몸에 딱 붙였던 팔을 뻗으며 검을 휘둘렀다.
다시 말하지만, 그레이톰의 심판을 휘두를 때 일어나는 현상은 실려있는 힘과 휘둘러지는 궤도에 비례한다.
즉, 이번에 어떻게 될지 나는 전혀 모른다는 얘기였다.
순전히 운에 맡기고, 나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날이 부러진다. 정확히는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진다. 부러진다기 보다는 깨진다는 말에 가까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깨져나가는 검날의 속에서, 응축된 주문이 있었다.
그 주문은 회색 섬광을 동반했다. 그 주문에 담긴 빛은 마법을 흩어내 분쇄하는 작용을 해냈다.
내 손이 단단히 붙잡은 칼자루에서부터, 빛의 기둥이 솟아났다.
빛의 철퇴처럼, 회백색 섬광은 세상 끝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바다 한 켠을 밝히며 나아갔다.
그렇게 쏘아진 기둥을 따라 살인적인 압력의 바닷물이 밀려났다.
그 기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휘두른 궤적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잔상처럼 남아 그 자리를 밝혔다.
무의식적으로 그 빛의 기둥을 휘둘렀다.
검을 전방위로 휘두르기 위해 허리를 틀고, 팔을 휘두른다. 휘두른 궤적을 따라 섬광에 찢겨져나간 해산물 파편이 날아간다. 마찬가지로 헤집어진 바닷물이 갈라져 흩어진다.
그렇게 잔상을 빈공간에 채워넣는, 언뜻 섬세한 작업에는 당연하게도 파괴가 동반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 마구잡이로 휘둘러댄 빛이 사라지는 순간.
마지막 허공을 회백색 섬광으로 채우자마자 나는 영원의 정신을 해제했다.
아주 짧은 적막. 찰나조차 되지 않는 적막이 지나고.
폭음과 섬광,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공기가 태워져 터져나가고, 그 섬광에 직접 닿은 놈들이 찢겨져 내동댕이 쳐진다.
마치 그 섬광의 빛줄기 하나하나가 검격인 것처럼, 전방위를 점한 섬광은 마치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는 광경처럼 바다 한복판에 펼쳐졌다.
심해인, 어인, 심지어는 바닷물마저도 그에 휩쓸린다. 강대한 거인이 손을 집어넣어 퍼낸 듯, 바다가 갈라져 열렸다.
"…씨발, 좆되네."
하늘을 향해 쏘아진 섬광은 바닷물을 모조리 퍼날라 바다 밖으로 빼냈고, 그렇게 내 머리 위로는 애먼 소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커억… 크어억…."
그 충격파와 검광을 피해낸 듯 몇 마리의 어인과 심해인, 왕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지만, 물을 잃어버린 충격인지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아주 잠시지만 이 일대의 바다는 물을 잃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들이닥쳐야 하는 물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틈이 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압력도, 물의 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신이 아닌 한 나는 지지 않는다.
나는 칼자루를 검집에 꽂아넣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촤아아아아―
콰아아앙!
바닷물이 내 발 밑을 어지럽히는 와중에, 앞으로 달려나가 다리를 휘둘렀다.
가격당한 어인의 몸이 반으로 접혀 절명하고, 그에 질세라 억지로 달려들려는 심해인의 창을 붙들었다.
"그륵…."
창을 당기면서 주먹을 휘둘러 목을 으깬다. 목은 부숴져 앞으로 접히고, 그렇게 죽어버린 시체를 내던진다.
내가 무심하게 죽여나가는 동포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왕이 컥컥대면서도 내게 달려왔다.
꽈아앙!
내가 올려친 주먹을 겨우 방패를 들어 막아낸다. 막아낸 그대로 방패를 들어올려 내게 공격하려고 하지만, 왕은 아까처럼 재빠르지 않았다. 뭍에서는 내가 더 빠르다.
고개를 젖혀 방패의 궤적에서 아예 벗어나고는, 그대로 다리를 낮게 휘둘렀다.
뻑!
깔끔한 로우킥이 자줏빛 다리에 틀어박힌다. 왕은 내가 걷어찬 힘에 밀려나 무릎 꿇었다가, 다시금 방패를 들어올렸다.
꽈릉!
파내어진 바다에 천둥이 울린다. 내가 내리찍은 주먹이 방패에 막힌다. 왕은 그에 다시금 삼지창을 휘둘러 반격한다. 나는 내 목덜미를 노리고 내질러지는 창날 사이에 팔을 집어넣어 막는다.
뻐억!
그 팔을 잡아당기면서 주먹을 휘두른다.
휘두른 주먹에 왕의 얼굴이 부딪히고, 피부가 갈라져 보라색 피를 후두둑 튀긴다. 비늘과 피부는 갈라져 속살을 드러낸다. 왕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바닷물이 들어차면 또 열세다. 나는 연거푸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퍽, 콰득!
창에힘을 주려고 할 때마다 팔을 비틀어 자세를 무너뜨리고 주먹을 꽂고, 얼굴에 꽂힌 내 주먹이 밀려난다 싶으면 손을 뻗어 머리를 잡고 무릎으로 걷어찬다.
걷어차여진 머리가 밀려나 쓰러지기 무섭게 다리를 내질렀다.
으직!
내 다리에 부딪힌 왕의 다리가 ㄴ자로 휘어지고, 왕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 몸에 올라탔다.
쾅! 쾅! 쾅! 쾅! 쾅!
"이, 씨발, 새끼, 존나, 튼튼하네!"
마운트 자세 그대로 주먹을 꽂았다. 주먹질 한 번마다 눈알이 뭉게지거나, 코가 뭉게지거나, 삐죽 튀어나온 귀가 으깨지지만 왕은 손으로 내 몸을 밀어내면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가공할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생명력도 주먹을 내리지를 때마다 깎여나간다. 내 주먹질에 놈의 몸뚱이가 걸레짝이 되어간다.
앞으로 몇 번 더 꽂으면 죽겠다 싶은, 몇 번의 주먹질을 남겨두고 있을 때.
"그르르락!"
어떤 심해인이 고함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그 맹공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 심해인이 먼저 나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 심해인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내 뒤를 점하더니 내 목을 졸랐다.
기긱
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질식사다. 아니면 씨발 익사던가.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고 손목을 붙들었다. 정말 강하게 붙잡았다. 그대로 아귀 힘으로 으깨기 시작했다.
으지지직
"크르르라아아악!!!"
아프단 뜻이지, 씨발놈아?
으깨진 팔을 내팽개치고, 몸을 뒤집고는 주먹을 프레스 기계처럼 내리찍어 머리를 부수는 때에.
그 심해인은웃고 있었다.
아주 환하고, 소름 끼치게.
설마 씨발.
애애애애애애애애앵!!!!
위화감에 뒤를 도는 순간, 왕은 이미일어서 있었다. 구부러진 삼지창이 아닌 방패를 들고. 손에 들려진 방패에서 톱날이 뿜어져나와, 거세게 회전했다.
왕이 내게 달려들며 그 방패를 휘두른다. 제 부하 위에 올라탄 나를 향해서 휘두른다. 뻗어지는 방패는 강맹하게 회전하며 내 목을 갈아버리기 위해 전진했다.
그 톱날이 나를 찢어발기기 전에, 나는 팔을 들어올렸다.
기기기기기기기긱!!!!
"으아아아!!!"
역시 예상했던대로, 방패의 톱날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팔을 들어 막아내고, 사슬갑주를 그 팔에 집중시킨 순간, 그 톱날은 판금갑주를 가르고 사슬갑주를 찢어내면서 내 살에 닿았다.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생살을 억지로 면도기로 저며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내 팔에서 피가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물 흐르듯 했다.
기, 기기긱, 긱
그럼에도 왕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 뼈에 닿은 톱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섰다.멈춰서 기, 기기기, 하고 울고 있었다.
그렇게 멈춰선 방패를 뽑지도, 밀어넣지도 못한 채 왕이 멈춰서는 순간.
나는 주먹을 쥐었다.
"딱 대라, 씨발새끼야."
인중 조져버릴테니까.
나와 왕을 향해 수천톤은 될 바닷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며 비명을 지른다. 쿠오오오, 하고 마지막 고함을 지른다. 나는 그 장송곡을 들으면서 숨을 들이켰다.
주먹을 들어올리고, 팔을 잡아당긴다. 방패가 단단히 틀어박힌 팔은 방패와 함께 왕을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진 그 보라색 심해 엘프는, 푸르죽죽하고 이리저리 뭉게진 얼굴로 마지막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절망이었다.
내 주먹이 그 표정에 닿았다.
뿌드드득!
그 주먹으로 심해 엘프의 보라색 피부가 뭉게지는 촉감이 느껴졌다. 피가 흐르고, 뇌수가 튄다. 뭉게진 수정체가 터져 건틀렛을 적시는 와중에, 나는 그 주먹을 내뻗으며 허리를 틀고, 다른 팔을 잡아당겼다.
으지직….
꽂혔던 주먹을 빼내는 순간, 바닷물이 나를 향해 떨어졌다.
쩌어어엉!
쏴아아아아아!!!
등을 두들기는 물이 지나치게 무거워, 척추가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크으윽…!"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질량의 바닷물이 주변을 메우며, 빠르게 공기를 빼앗고 압력으로 짓누른다.
나는 그 압력에 짓눌리면서도 위로 헤엄쳤다. 부디, 바닷물이 가득 찼을 때에는 수면에 있기를 바라면서.